오비추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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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연 ·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위대한 카이저, 베켄바우어를 추모하며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 이직으로 부산에 잠시 터를 잡았다. 내 학기 말 통지표에 적힌 유일한 칭찬이 “서울말을 잘함”이라 할 정도로 부산은 내게 너무 낯선 곳이었다. 천성이 내성적이어서 몇 달이 지나도 친구도 잘 못 사귈 즈음, 우리 반 친구 중에 빵집을 하는 아이가 나를 가게로 데리고 갔다. 그 빵집이 우리 집과 가까워서 가끔 놀러 가면 친구 아버지가 크림빵을 주셨다. 그날도 솔직히 빵을 먹고 싶어 가게를 기웃거리고 있는데, 유리창 너머 흑백 TV로 축구 중계가 있는 걸 보게 되었다. 친구 아버지가 가게로 들어오라 해서 크림빵에 우유를 마시며 축구를 아무 생각 없이 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1974년 서독월드컵 결승전 서독과 네덜란드의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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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국 · 더불어민주당 의원
타임머신 인생...이종우를 추모하며
종우의 부음을 듣고 며칠째 마음이 심란하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무기력해졌다. 가까운 동료들조차 잘 모르지만 종우와 나는 깊은 인연이 있다. 학교는 달랐지만 우리는 우이동에서 함께 자랐다. 친구의 친구였다가 친구가 되었다. 젊은 시절 우리는 주말에 산에서 더 많이 만났다.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거의 매주 우연히 북한산 백운산장에서 만나서 세상과 자연에 대해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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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기영 · 홍차아카데미 대표홍차에 바친 70년, ‘딜마’ 회장을 애도하며
지난 7월20일 스리랑카 홍차회사 딜마(Dilmah)의 설립자이자 회장인 메릴 페르난도(Merrill J Fernando)가 93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딜마는 유럽을 위시한 서양 국가들이 압도하는 홍차 산업에서 아시아 회사로는 나름 차별화된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한 스리랑카 홍차 회사다. 홍차는 거의 대부분이 인도, 케냐, 중국, 스리랑카, 터키 등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생산된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홍차 브랜드는 거의 다 영국(포트넘앤메이슨, 해러즈, 트와이닝 등), 프랑스(마리아주 프레르 등), 독일(로네펠트 등) 같은 유럽 국가들이 가지고 있다. 아마도 19세기 후반기부터 홍차 음용을 전 세계에 확산시킨 주체가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 국가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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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 팝 칼럼니스트“진짜 적과 싸우자”고 외친 그녀
자신의 미모조차도 경계하는 삭발의 날카로운 감수성, 분노하는 듯하다 이내 서글퍼져버리는 깊고 아름다운 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과 전쟁, 부당한 권위와 천박함에 저항하는 전사, 시네이드 오코너. 2023년 7월 26일 슬픈 채로 이 별을 떠났다. 시네이드 오코너 본명 Sinéad Marie Bernadette O’Connor 1966년 아일랜드 더블린 출생 1987년 데뷔, 2014년까지 총 10장의 앨범 발매 1990년 2집의 Nothing Compares 2 U’ 빅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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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룡 · 숭실대 명예교수
탱크와 지구본
대학 시절에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떠오른다. 담배를 피우려고 창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텅 빈 대학 교정에서 몇몇 군인들이 축구공을 찾고 있었다. 그 광경을 멍하니 내려다보다 무심코 담뱃재를 허공에 털었더니, 곁에 있는 여자가 “재털이가 굉장히 크네”라고 농담을 건넸다. 그 여자는 나보다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벨기에 출신 수녀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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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 · 역사학자강만길의 시대와 지금
며칠 전 작고하신 역사학자 강만길 선생은 조선 후기 상공업사 부문에서 내재적 발전론을 뒷받침하는 등 한국 근현대사 전반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많이 남겼지만, 그의 대표작은 뭐니뭐니 해도 1978년에 출간된 사론집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이다.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일제강점기 ‘민족사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자기 시대의 역사학이 사관(史觀)과 방법론 양면에서 지향해야 할 바는 ‘분단 극복’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일제강점기 ‘관변(官邊) 역사학’은 식민지 통치권력의 한민족에 대한 강권적 지배와 수탈을 역사적으로 합리화·정당화하기 위한 ‘식민사학’이었으니, 이에 대한 안티테제로 정립된 것이 ‘민족사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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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희종 · 서울대 명예교수“과학 실험은 그 자체로 생명이 있다”
한 달 전인 지난 5월 10일, 저명한 과학철학자인 이언 해킹(Ian Hacking)이 87세의 나이로 캐나다 토론토 요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과학철학 분야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라 생각되는 대표적인 인물이지만, 그는 단지 과학철학에만 국한된 이는 아니었다. 다양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여러 분야에 걸친 활동으로 주목받은 전형적인 유형의 연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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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희 · 경희대 국제지역연구원 교수음악은 자유롭게 한다, 사카모토 류이치
사카모토 류이치는 1952년 도쿄에서 태어나 3살 때부터 피아노를, 10살부터 작곡을 배웠습니다. 도쿄예술대학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고, 1978년 <천 개의 나이프>라는 곡으로 솔로 데뷔를 한 뒤 같은 해 ‘YMO(Yellow Magic Orchestra)’를 결성했으나, 1983년에 해산합니다. 그 해에 본인이 배우로 출연한 영화 <전장의 메리 크리마스>로 영국 아카데미상 음악상을 수상했고 1987년 <마지막 황제>로 아카데미상 작곡상, 골든 글로브상 최우수작곡상, 그래미상 영화·TV 음악상 등을 수상합니다. 1999년 제작한 오페라 <LIFE> 이후, 환경·평화운동에 관련된 활동을 했고 숲 만들기를 추진하는 ‘MORE TREES’를 설립하는 등 많은 사회활동을 했으며 2009년 자서전 『음악은 자유롭게 한다』를 간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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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희 · 경희대 국제지역연구원 교수문학이 ‘인류 보편적’이길 바랐던 오에 겐자부로
돌아가시기 며칠 전 술자리에서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선생님 소식을 들었습니다. 출판사 관계자들도 아주 조심스럽게 상황을 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눈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인터넷을 통해 부고를 들었습니다.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오에 선생님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방한하셨을 때 한두 번 인사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동그란 안경과 단아하고 자그마하신 모습이 인상에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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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희 · 경희대 국제지역연구원 교수“나는 욕심이 있습니다”라며 웃던 윤정희
나는 좀 바보 같은 사람이에요. 실수도 많이 하고, 길눈도 어둡고 잘 넘어지고 좀 똑똑하지 못 해요. 적고 보니 한 편의 ‘시’처럼 느껴지는 이 말은 배우 윤정희씨가 2010년 KBS 인터뷰(감성다큐, 2010년 4월 17일 방영)에서 했던 말입니다. 지난 1월 19일, 프랑스 파리에서 배우 윤정희씨가 7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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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은 · 소설가30여 년 오해와 이해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저는 2022년 12월 26일, 하루 늦게 접했습니다. 1942년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나 올해 80세로 영면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하필 인천역을 빠져나오고 있었습니다. 올봄 코로나에 감염되면서 지병이 악화한 게 선생님의 사인이었습니다. 목적지를 지나치는 바람에 헐떡이며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그러다가 인천역에서 만석동 일대까지 걷던 지난해 일을 떠올렸습니다. 그 순간 공장지대의 굴뚝이 눈에 들어왔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책장이 닳도록 읽던 옛 기억까지 함께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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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민 · 칼럼니스트
노옥희 교육감을 추모하며...’그때 그 신부’
매해 3월 초 우리 동아리는 항상 바빴다. 호기심으로 문을 두드리든 작심하고 찾아오든 동아리방을 찾는 신입생들이 드글거렸고 그들에게 술과 밥 사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신입생 환영 공연을 연중행사로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으로 후배를 맞았던 1989년 3월도 다르지 않았다. 노래 연습하고 멘트 준비하고 대본 준비팀은 날밤을 몇 번이나 까면서 공연을 만들어 갔다.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순서가 슬라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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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주 · (전)5.18진상규명조사위 조사1과장어느 마르크스주의자 친구를 애도하며
나는 그의 부음을 직접 받지 못했다. 소셜 미디어에 올라온 누군가의 글에서 그의 죽음을 짐작했고, 이를 계기로 다른 경로를 통해 그가 죽었음을 확인했다. 그와 나는 제법 인연이 깊은 사이였으나, 수 년 전에 무슨 모임에서 딱 한번 만난 것을 제외하면 30년 이상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 못한 상태로 지냈다. 나는 그를 1984년에 처음 만났다. 우리는 똑같이 광주 출신이지만 출신 고등학교와 대학이 달라서 그 이전에는 조우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나와 그를 이어준 사람은 내가 가장 존경하던 친구이자 그의 고등학교 동창인 신영일 군이다. 당시 사회운동을 하던 신 군은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었는데, 신 군의 도피생활을 후원하는 사람들 자리에 나갔다가 동석한 그를 소개받았다. 나를 그에게 소개해준 신 군은 1987년 6월 항쟁 직후 오랜 도피생활의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가혹한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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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진 · 한국은행 자문역하늘 나라에는 고비용 저효율의 문제가 없을까
조순 부총리의 부음을 듣는 순간 책장을 향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있는 그 분의 저서 『J.M. 케인즈(비봉출판사 1982년}』을 펼쳤다. 그 분이 쓰신 수 많은 저서 가운데 내가 가장 아끼는 책이다. 일부 언론의 부고 기사에도 고인을 ‘한국의 케인즈’라고 소개했다. 고인에게서 배운 후학들은 그 분께서 얼마나 케인즈를 추앙하고 닮으려고 했는지 잘 안다. 학문적 업적 뿐만 아니라 사회 활동에서도 케인즈의 행적을 좇아가보려고 노력하셨다. 예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 관직을 맡고 정치판에 뛰어든 것도 “훌륭한 경제학자라면 경세가로서도 성공해야 한다”는 어머니 플로렌스의 말에 따라 케인즈가 걸었던 길을 의식한 것이라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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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과리 · 연세대 교수다른 길을 간 두 사람의 우정에 대하여
김지하 선생이 돌아가셨다. 편찮으시다는 얘기는 오래전부터 소문으로 돌았지만, 선생은 끈질기게 죽음과의 줄다리기를 이어 나가셨다. 선생의 병을 걱정하시던 사모님, 즉 토지문학관의 김영주 관장님이 2019년에 먼저 돌아가셔서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생전에 부부의 정이 무척 애틋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전 해 10월에 박경리문학상 수상자와 함께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까지 부부가 함께 오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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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정 · 영화심리상담사우리에겐 ‘매혹적인’ 강수연이 있었다
전주국제영화제에 참석하던 중에 뜻밖의 비보를 들었다. 강수연 배우가 무의식 상태에 있다는 소식에 이어 곧 사망 소식까지 접했다. 아직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나이가 아니라서, 회복을 기원했으나 결국 다시는 볼 수 없는 하늘의 별이 됐다. 스타의 죽음은 늘 충격을 주지만 강수연의 죽음은 인기 절정에 있는 배우의 비보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배우 강수연 하면 아시아 배우로서는 최초로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라는 거대한 타이틀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동시대에 태어나 어린 시절 모습부터 그녀를 보아온 필자의 세대에서 강수연에 대한 기억은 그녀가 세계적인 배우로서 입지를 구축하기 이전부터 강하게 각인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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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진 · 한국은행 자문역고(故) 나웅배 부총리를 추모하며
요즘 1930년대 생의 부음을 자주 듣는다. 전두환 대통령(1931년생), 이경식 부총리(1933년생)에 이어 며칠 전에는 나웅배 부총리(1934년생)가 별세하셨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경식과 나웅배 두 사람은 1957년 한국은행에 함께 취직했다. <더 칼럼니스트>를 통해 고 이경식 부총리를 추모했으니, 고 나웅배님께도 똑같은 추모의 마음을 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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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칼럼니스트
재미 평화운동가 이현정씨 암투병중 별세
[여성의 날, 어느 평화운동가의 부고 소식을 전합니다] 평화운동가 이현정 선생께서 오늘(현지시간 2022년 3월 7일) 아침, 부모님과 가족들의 사랑과 기도 속에 미 코네티컷 자택에서 편안하게 영면에 드셨습니다. 향년 52세 고 이현정 선생은 국제적 여성평화단체인 ‘Women Cross DMZ’의 조직위원으로서, 미 의회와 워싱턴 정치권을 상대로 한반도 평화를 위한 공공외교와 한국전쟁 종식을 위한 평화협정 체결을 촉구하는 캠페인을 국제적으로 이슈화시키는데 전념해 온 평화운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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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학 · 푸르메재단 상임이사준비되지 않은 이별....김정주 창업주를 기리며
“이곳이 기적의 병원인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해 더 많은 기적을 이어갈 수 있도록 열심히 돕겠습니다.” 2021년 4월 28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서 열린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 5주년 기념식에서 김정주 넥슨 NXC 사장님의 인사말입니다. 이날 행사에는 병원 건립에 마중물이 되어준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김정주홀’ 제막식이 열렸습니다. 그가 쾌척한 나눔의 참뜻을 기억하기 위한 행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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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 · 미술평론가이어령 선생님을 추모함
나는 이어령 선생님을 몇번 만났다. 첫 만남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74년이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학교 도서관에서 그 책을 빌려다 하숙집에서 보았다. 퍼덕이는 문체에 가슴이 마구 뛰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개회 몇 달 전에 ‘백남준 이어령’의 대담이 서울 강남의 한식집에서 있었다. 백남준 선생님이 그 해 9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중앙로비에 설치할 비디오 작품 다다익선 제작을 위해 서울을 방문했을 때다. 현대화랑 발행의 계간지 ‘현대미술’에 실을 두 분의 대담을 위해 현대화랑이 자리를 마련했다. 잡지의 편집장이었던 나는 두 분의 대담을 녹음하기 위해 말석에 앉았다. 8명쯤 되는 문화계 수장들이 함께 있어 대담 자체가 불가능했다. 나는 녹음을 포기하고 그냥 듣기로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