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주
(전)5.18진상규명조사위 조사1과장
최용주는 전남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켄터키 대학에서 사회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쳤다. 공직을 은퇴한 후 5.18기념재단 연구위원을 지냈으며, 지금은 독립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서로 <책장 덮기: 역사적 관점에서 본 이행기 정의>(진인진 2022), <5.18 푸른눈의 증인>(한림출판사 2020), <나의 이름은 임대운>(객, 2022) 등이 있다. 1958년 생이다.
최용주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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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문화
광주는 아직도 “무젤만”인가?
히틀러의 나치는 절멸 수용소에 갇혀 영양실조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유대인들을 “무젤만”(Muselmann)이라고 조롱했다. 무젤만은 이슬람 교도를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을 거세당하고 숨만 겨우 붙어있는 좀비 같은 육체를 뜻하는 은어이기도 했다. 유대인 작가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자신의 수용소 생활 체험을 담은 책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무젤만’으로서 유대인의 극단적인 절망감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레비의 책이 출간된 후 ‘무젤만’은 반인도적 국가 폭력의 비극성을 은유하는 인문학적 개념으로 차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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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80년 광주를 도운 초국적 연대 네트워크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은 ‘고립’에서 비롯되었다. 계엄군의 폭력으로 광주 시민들이 죽고 다치고 끌려갔지만, 정부의 철저한 보도 통제로 대다수 국민들은 그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외부와 고립되어 10일 동안이나 계속된 시민의 ‘불복종 저항 운동’은 공산주의와 불순분자의 폭동으로 왜곡되었다. 결국, 광주의 비극은 고립에 그치지 않았다. 망각과 은폐, 나아가 폄훼와 조롱의 낙인으로 이어지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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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2026년 중동에 필요한 ‘스팀슨의 지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계기로 독일의 패전이 임박하자, 연합국 측은 전후 독일 처리 방안을 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이어 또다시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전쟁 도발 의지 제거와 전쟁범죄자 처리가 핵심 과제였다. 1944년 8월, 미국의 재무장관 헨리 모겐소는 매우 급진적인 내용을 담은 전후 처리 계획을 작성해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이른바 “모겐소 계획”(The Morgenthau Plan)이라고 불리는 “항복 이후 독일 처리안”(Suggested Post-Surrender Program for Germany)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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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민주주의 모범생 칠레의 ‘서늘한 경고’
칠레는 중남미 20개 국가 중 군부독재의 유산을 성공적으로 청산하고 민주화를 달성한 대표적인 국가로 평가된다. 칠레 정부는 지속적인 사법 개혁을 통해서 군부독재 시절(1973~1990)의 국가폭력에 책임이 있는 인물 상당수를 처벌했으며, 대통령을 지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의 면책 특권을 박탈해서 인도에 반한 범죄와 반부패 범죄로 기소했다.(피노체트는 가택 연금 상태에서 재판을 기다리다가 2006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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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 어떻게 볼 것인가?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은 외견상 놀라운 사건이 아니다. 지난 한 세기에 걸쳐서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국가에서 유사한 사건이 수십 차례 반복되었으며, 트럼프 행정부는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을 ‘마약테러’(Narco-terrorism) 범죄집단으로 규정하고 수차례에 걸쳐 군사적 경고를 보냈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 군사 행동이 단순한 침공이 아니라 미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한 ‘선제적 자위권’(anticipatory self-defense) 행사라고 주장했으나, 그 실체적·법적 근거는 매우 빈약하다. 베네수엘라 정부가 군사력을 이용해서 미국의 영토를 먼저 침범한 사례가 없으며, 베네수엘라 마약카르텔의 범죄 행위가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만한 ‘무력 공격’(armed attack)에 해당되는지도 의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마두로 정권을 정상 국가가 아닌 ‘마약카르텔’로 간주했으나, 유엔과 국제사회는 오래전부터 니콜라스 마두로를 베네수엘라의 국가원수를 인정했다. 그가 부정선거로 당선되어 국민을 탄압하는 독재자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나, 이러한 정치적·도덕적 결함이 주권국의 통치자로서 그의 대외적 지위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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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내란 후 1년, 여전히 걱정이다
1년 전, 윤석열의 내란 행위는 ‘민주주의의 적’이 우리가 상상한 이상으로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각성케 했다. 그후 그들의 정체가 여기저기서 발각되면서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을 제대로 알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망상증으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학원강사 출신 선동가와 사이비 목사가 제1야당의 정치적 노선의 행방을 쥐락펴락하고, 여기에 부응하는 그 정당 대표의 극우적 발언은 차라리 희극에 가깝다. 그 당이 집권하던 시절에 국무총리를 지낸 자는 허무맹랑한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져서 선동질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대통령 후보를 지낸 김문수가 윤석열의 불법적 행위를 노골적으로 옹호해도 이상할 게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에 책임이 있는 제1야당은 여전히 공식적으로 사과할 의향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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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우리 군(軍)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12.3비상계엄 당시 가장 의아한 장면은 국회로 출동한 군인들의 소극적인 대응이었다. 1980년 5월에 광주를 점령한 공수부대의 만행을 직접 목격하고 진상규명 활동에 참여한 나에게는 더 이해가 안 되는 장면이었다. 사실 이 장면은 외견상 “계엄이 경고성이었다”는 윤석열의 주장을 지지하는 현장증거가 될 수도 있었다. 상급자의 명령에 따라 국회를 점령하고 의원들을 끌어낼 실질적인 의도가 있었다면, 총기로 무장한 대한민국 최정예 부대가 맨몸으로 맞서는 국회 직원과 시민을 제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회로 진입한 군인 중 누군가가 휴대한 자동소총이나 권총으로 공포탄 한 발만 발사했더라도 사태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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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Korea:We Must Invest More in Democracy
By Choi Yong-Ju Former Director, Investigation Division 1, the 5.18 Truth Investigation Commission Yoon Suk-yeol has been impeached. It took a full 110 days to obtain this rightful ruling. During that time, our country paid an enormous price—economically, politically, and socially—and suffered deep wounds that will not easily 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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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우리는 민주주의에 더 투자해야 한다
윤석열이 파면되었다. 이 당연한 판결을 얻어내는데 무려 110일이 걸렸다. 그 사이에 우리나라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너무나 많은 비용을 지불했고 쉽게 치유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특히 12.3내란 사태 이후의 정치적 혼란은 한국 민주주의가 제도와 운영의 측면에서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우리가 제도적 민주화를 쟁취한 1987년 이후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나름대로 지키고 공유했던 민주주의의 기본적 작동 원리에 큰 균열이 생긴 것이다. 윤석열은 이 위기의 원인 제공자가 아니라 위기의 결과 또는 그 한 단면이다. 따라서 윤석열의 퇴장으로 이 위기가 해소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전례 없는 수준의 혁신적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아래와 같은 이유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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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윤석열 효과”에 대하여
1973년 9월 11일, 칠레의 육군사령관 아구스토 피노체트는 군사쿠데타를 일으켜서 자신을 사령관으로 임명한 살바토레 아엔데 대통령을 축출하고 권좌에 올랐다. 피노체트가 17년(1973-1989)의 재임 기간에 자행한 인권탄압 행위는 전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잔인했다. 예를 들어, 칠레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1973년 쿠데타 직후부터 1990년까지 2,095명의 민간인이 정치적인 이유로 살해되었고, 1,102명이 실종되었으며, 3만 8,000명 이상이 고문을 당했고, 20만명 이상이 해외로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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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Korea: The Politics of Liquidation and Severance Are Necessary
By Choi Yong-ju, Former Head of Investigation Division 1, 5.18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Unless another decisive variable emerges, President Yoon Suk-yeol will be removed from office, sentenced as the leader of a coup d’état, and serve a prison term. Those who conspired, executed, aided, abetted, or followed orders related to the coup will also be punished according to the severity of their crimes. A new government will be elected and inaugurated. Does that mean everything will be resolved? Absolutely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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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청산과 단절의 정치가 필요하다
이제 다른 결정적인 변수가 없는 한 윤석열 대통령은 파면되고 내란 우두머리 현행범으로 실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그와 함께 내란을 모의하고 실행하고 조력하고 방조하고 명령을 수행한 자들도 그 죄질에 따라 처벌될 것이다. 그리고 선거를 통해 새 정권이 들어설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다 끝난 것인가? 아니다. 12.3내란과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일련의 정치적 혼란은 우리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정치-사회적 하부구조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아래와 같은 점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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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한국 민주주의와 군의 ‘탈정치화’
윤석열 씨가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한 12.3 내란사건은 한국민주주의 역사에 치욕적인 오점을 남겼다. 우리나라가 군부독재를 종식하고 민주체제로 이행한지 30년 이상이 흘렀는데 어떻게 이런 경악스러운 사태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 우두머리인 윤석열 씨를 “정상적” 인물로 간주하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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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윤석열의 친위쿠데타와 우루과이의 경험
12월 3일 밤의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추가 설명이 필요 없는 친위쿠데타(autocoup, autogolpe)다. 친위쿠데타는 이미 권력을 쥐고 있는 자(또는 집단)가 자신의 권력을 연장하거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서 의회 등 헌법기관의 행위를 무력화시키고,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는 무력 행위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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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5.18과 미국책임론
월남전쟁 이후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가 가장 극적으로 변한 사건은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이다. 광주항쟁은 반미(反美)주의가 정치적, 사회적, 정서적으로 본격적으로 표출될 수 있는 여러 의혹들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의혹들이 얼마나 타당한 근거가 있는지에 대해서 명료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광주항쟁을 계기로 촉발된 반미주의는 ‘사실’의 영역과 ‘도덕과 가치’의 영역이 혼재되어 나타난 사회적 현상임을 감안하면 명료한 해답을 얻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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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문화
소년이 죽었다...한강...그리고 노벨상
노벨문학상을 수상해서 전국민을 기쁘게 만든 한강 작가의 작품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항쟁 당시에 희생된 영령에 바치는 일종의 진혼곡이다. 여기서 소년은 죽어서는 안 되고 죽을 이유가 없는 선량한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부당한 국가폭력이 자행한 전대미문의 비극적 사건을 재현하는 문학적 은유로 읽힌다. 내가 문학 전공자가 아니어서 잘 모르겠으나, 한강의 작품 세계를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인간 삶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강력한 시적 산문”이라고 평한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의 지적은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항쟁이 빚어낸 비극성과 그 역사적 트라우마는 “작가” 한강이 상상하고 묘사한 그 지점을 훨씬 뛰어넘는다. 소년은 왔고 그 소년은 죽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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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추어리
어느 마르크스주의자 친구를 애도하며
나는 그의 부음을 직접 받지 못했다. 소셜 미디어에 올라온 누군가의 글에서 그의 죽음을 짐작했고, 이를 계기로 다른 경로를 통해 그가 죽었음을 확인했다. 그와 나는 제법 인연이 깊은 사이였으나, 수 년 전에 무슨 모임에서 딱 한번 만난 것을 제외하면 30년 이상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 못한 상태로 지냈다. 나는 그를 1984년에 처음 만났다. 우리는 똑같이 광주 출신이지만 출신 고등학교와 대학이 달라서 그 이전에는 조우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나와 그를 이어준 사람은 내가 가장 존경하던 친구이자 그의 고등학교 동창인 신영일 군이다. 당시 사회운동을 하던 신 군은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었는데, 신 군의 도피생활을 후원하는 사람들 자리에 나갔다가 동석한 그를 소개받았다. 나를 그에게 소개해준 신 군은 1987년 6월 항쟁 직후 오랜 도피생활의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가혹한 시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