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마르크스주의자 친구를 애도하며

박승호 노동운동가, 5일 향년 64세 별세 김수행 교수 밑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 “혁명의 시절 온몸을 던지며 실천한 삶”

지난 7일 열린 박승호 선생의 추모제.
지난 7일 열린 박승호 선생의 추모제.

알랑 들롱 연상시킨 용모

나는 그의 부음을 직접 받지 못했다. 소셜 미디어에 올라온 누군가의 글에서 그의 죽음을 짐작했고, 이를 계기로 다른 경로를 통해 그가 죽었음을 확인했다. 그와 나는 제법 인연이 깊은 사이였으나, 수 년 전에 무슨 모임에서 딱 한번 만난 것을 제외하면 30년 이상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 못한 상태로 지냈다.

나는 그를 1984년에 처음 만났다. 우리는 똑같이 광주 출신이지만 출신 고등학교와 대학이 달라서 그 이전에는 조우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나와 그를 이어준 사람은 내가 가장 존경하던 친구이자 그의 고등학교 동창인 신영일 군이다. 당시 사회운동을 하던 신 군은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었는데, 신 군의 도피생활을 후원하는 사람들 자리에 나갔다가 동석한 그를 소개받았다. 나를 그에게 소개해준 신 군은 1987년 6월 항쟁 직후 오랜 도피생활의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가혹한 시절이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을 나는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한다. 그는 큰 키에 알랑 들롱을 연상케 하는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얼굴 피부가 귀공자처럼 깨끗하고 눈매가 착해서 우리처럼 깡마르고 눈에 핏발 선 촌놈들과는 어울릴 분위기가 아니었다. 말투도 매우 신중하고 공손했다. 나는 그가 필경 엄청난 명문가의 자식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끝내 갚지 못한 그의 빚

처음 만난 그에게 나는 많은 빚을 졌다. 광주항쟁에 연루되어 감옥살이를 한 나는 가까스로 대학을 졸업했으나, “빨갱이 폭도”인 나를 채용해 줄 회사는 당연히 아무 데도 없었다. 그는 이것저것 다 실패하고 거의 부랑자 신세로 지내던 나에게 선뜻 자신의 거처를 내주었다. 나는 몇 달 간 그의 하숙방에 몰래 기숙하면서 잠자리를 해결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다른 일을 준비할 수 있었다.

당연히 나는 그에게 금전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 내가 그의 하숙집을 나와서 다른 거처로 옮겼을 때 그는 월세금에 필적하는 돈을 내게 빌려주었다. 어찌된 일인지 나는 아직도 그 돈을 갚지 못했다. 아니, 그 뒤로 그를 만날 기회를 거의 잡지 못했으니 갚을 방법이 없었다는 변명이 더 옳을까?

그는 나에게 대학원에 진학해서 본격적으로 사회학을 공부해볼 것을 진지하게 권유한 사람이기도 하다. 내가 당시에 입학하기 힘들었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나에게 준 지적 자극과 격려가 절반 이상 기여했다.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방통대학교에서 조교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의 연구실 구석을 빌려서 대학원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당시의 지적 분위기가 그랬듯이, 그는 학문적으로 마르크스에 많이 경도되어 있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에게 좌파 사회학자인 해리 브레이버만과 마이클 브로웨이의 저작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우리는 알투세와 폴란짜스를 같이 읽고 토론했고, 카우츠키와 레닌의 저작들을 일본어판으로 구해서 러시아 소농경제의 해체와 자본주의로의 이행 과정 등을 같이 공부했다. 지금도 내 책장에 있는 에르네스트 만델의 후기자본주의(Late Capitalism)는 원래 그의 것이다.

백면서생인 줄 알았는데

나는 그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은 나와 마찬가지로 순전히 학문적 차원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그는 박사과정을 마치면 바로 대학에 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나도 그가 강단의 학자로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와 같은 지적 자질과 여건을 갖추지 못한 나는 그가 부러웠고, 가끔은 질투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갑자기 학교를 그만 두고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서 “현장”으로 들어가겠다고 나에게 말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그가 대학에서 자리를 잡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에게는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학교를 떠나는 그는 하숙집을 비워야 했기 때문에 나는 갈 곳이 없어졌다. 그는 제법 거금의 돈을 내밀면서 당분간 다른 거처를 알아보라며 내 손을 잡았다. 나는 받을 수 없다고 완강하게 거부했으나, 그는 거의 강제로 그 돈을 내 호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나는 척박한 노동운동의 현장으로 떠나는 자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가 베푼 호의로 다른 거처로 옮길 수 있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그 뒤로 우리는 삶의 궤적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나는 그의 소식을 거의 들을 수 없었다. 그가 나에게 베푼 호의를 갚기 위해서라도 내가 먼저 그를 찾아야 했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87년 6월 항쟁 때 광화문 새문안 교회 근처에서 깃발을 들고 선두에서 행진하는 그의 모습을 발견하고 너무 반가워서 달려갔으나, 마침 최류탄이 터져서 대오가 흐트러지는 통에 그를 만날 수 없었다. 그가 구속되어 감옥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나는 면회도 가지 못했다.

2020 교양부문 세종도서로 선정된 박승호 저 '한국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2020 교양부문 세종도서로 선정된 박승호 저 ‘한국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나의 오랜 벗에게”

내가 그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내가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2006년이었다. 무슨 학회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내 예상과 달리 서울대 김수행 교수 지도 하에 박사논문을 끝내고 학계로 돌아온 터였다. 나를 만난 그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건네주었다. 프랑스 조절주의 학파 등 좌파 제도주의 경제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논문이었고 분량이 상당한 대작이었다. 그는 논문 제목 아래에 “나의 오랜 벗에게”이라고 쓰더니 내 눈을 쳐다보고 씩 웃었다. 예전에 비해서 다소 거칠어지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귀공자풍의 미남이었다.

노동운동 현장으로 들어갔다가 늦은 나이에 다시 공부를 시작한 그가 나는 너무나 존경스러웠다. 필시 무슨 극적인 동기가 있었을 것인데, 나는 구태여 묻지 않았다. 나는 그가 이른바 현장 보다는 강단의 자리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가 사실상 사멸하고 학문으로서 그리고 정치경제 이념으로 수명을 다했다고 평가되는 마르크스주의에 아직도 고집스럽게 매달려 있는 그가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다. 마르크스자였던 고 정운영 선생이 자조적으로 토로했듯이 학문 시장에서 “한줌도 안 되는”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그는 여전히 새로운 희망과 개혁의 불씨를 발견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이런 점에서, 비록 안타깝지만, 나는 그가 일관되게 지켜온 실천적, 학문적 신념을 다시 확인했고, 그를 향한 나의 존경은 더 공고해졌다. 내가 한번이라도 그를 닮아본 적이 있었던가?

생전의 박승호 선생.
생전의 박승호 선생.

감히 “동지”라 부를 수 없는 박승호

나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식에 참석했다. 그와 함께 한 지인들이 차례대로 나와서 생전의 그를 추모하고 운동가로서 그의 치열한 삶을 기억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잊고 지내는 동안 그가 도저하게 걸어왔던 불꽃같은 행적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은 잊혀진 혁명의 시절에 온몸을 던진 어느 마르크스주의자가 감내하려고 노력했던 고통의 연대기이기도 했다.

추모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동지”라 불렀다. 나는 그를 그렇게 부르지 못한다. 그가 나를 그렇게 칭했듯이 그는 나에게 “오랜 벗”으로 남을 것이다. 그가 걸었던 길과 좌표를 내가 따라할 용기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그의 동지가 될 수 있겠는가? 광주항쟁 뒤 참으로 척박하고 어려웠던 나의 젊은 시절에 그가 나에게 보낸 감탄스러운 우정과 따뜻한 손길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그 자리에서 바로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 오랜 벗이 나에게 빚 갚을 기회도 주지 않고 죽었다. 나는 이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영원한 죄인이 되었다. 박승호 박사는 이제 편히 쉬시라.

글쓴이

최용주 (전)5.18진상규명조사위 조사1과장

최용주는 전남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켄터키 대학에서 사회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쳤다. 공직을 은퇴한 후 5.18기념재단 연구위원을 지냈으며, 지금은 독립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서로 <책장 덮기: 역사적 관점에서 본 이행기 정의>(진인진 2022), <5.18 푸른눈의 증인>(한림출판사 2020), <나의 이름은 임대운>(객, 2022) 등이 있다. 1958년 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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