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성적순이 아니야” 깨웠던 개혁가
[이해찬 전 총리의 영면을 기원하며] 진실의 책 가득 쌓아뒀던 서점주인 ‘전교조’ 합법 이어 파트너 인정한 장관 학생들 특기·적성,인권 존중한 개혁가 ‘실패’했지만 미래세대 사랑했던 정치인
평생을 시대의 과제를 회피하지 않고 살아온 사회운동가이자 민주주의의 산 증인, 한국 정치의 거목인 이해찬 전 국무총리께서 영면에 드셨다. 윤석열의 내란을 극복하고 더 굳건한 민주주의를 구현해야 할 이 시대에, ‘민주주의의 거목’이 남긴 빈자리는 더욱 크게 느껴진다. 생의 마지막까지 이국땅 베트남 하노이에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신 그 치열한 삶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
민주와 진실을 향한 목마름으로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진실을 향한 목마름이 누구보다 컸던 민주 정치인이라 할 것이다. 필자는 1980년대 대학에 입학한 이후 강의실에서 배우는 것보다 서클 활동과 세미나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한국 사회에 대한 인식을 형성했다. 이른바 언더서클(대학가 학습·운동 소모임) 선배들이 기획한 커리큘럼에 따라 읽어야 했던 책들을 구입하던 곳이 바로 ‘광장서적’이었다.
신림동 289번 버스 종점 근처에 있던 이 서점의 주인은, 까마득한 운동권 선배였던 이해찬 전 총리였다.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사회과학 서적을 구입하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했던 시대에 언제든 연행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며 서점을 운영한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이후, 광장서적을 열고 돌베개 출판사를 운영하며 그는 시대의 암흑을 걷어낼 진실을 지키고, 세상에 유포하는데 앞장섰다.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 『한국사회구성체 논쟁』, 『해방 전후사의 인식』 등은 모두 그 서점을 통해 접한 책들이었고 민주세대 후배들은 ‘광장서적’을 통해 시대의 진실을 가슴깊이 받아들이곤 했다.

교원의 기본노동권을 지켜주신 분
이 전 총리가 교육계에 남긴 뚜렷한 성과는 ‘전교조의 합법화’라고 할 것이다. 1999년 7월 1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10년간의 법외노조 상태를 벗어나 합법 노조가 되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인 1998년 구성된 제1기 노사정위원회에서 교원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한다는 합의가 이뤄졌고, 1999년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제도적 기반까지 마련됐다.
당시 전교조는 10년에 걸친 법외노조 기간을 거치며 조합원 수가 감소했고, 과연 노동조합으로서 합법화가 가능한가를 둘러싸고 내부에서 치열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필자는 당시 전교조 본부 정책실에서 기획국장을 맡으며 노동조합으로서 전교조의 합법화를 간절히 바랐다. 김대중 정부의 출범은 그러한 전교조에게 긴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계기였다.
이해찬 전 총리는 김대중 정부 초대 교육부 장관(1998~1999년)으로 재임하며 전교조가 합법적 지위를 얻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전국연합 등 재야운동에서 오랜 기간 전교조와 동지적 관계를 맺어온 연장선에 있었다. 전교조의 합법 1대 위원장을 맡았던 이부영 전 위원장은, 이해찬 전 총리가 전교조 합법화를 넘어 전교조를 교육정책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수시로 소통하며 의견을 나눴던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
다만 교육부 장관 재임 시절 추진했던 교원 정년 단축과, 김영삼 정부 시절의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인 5·31 교육개혁 방안을 계승하겠다는 입장을 두고는 정책적 갈등을 겪기도 했다.

‘이해찬 세대’라는 논란에도 평가되어야 할 교육철학
교육부 장관으로서의 이해찬 전 총리의 성과는 이른바 ‘이해찬 세대’라는 함축적 표현으로 기억된다. ‘점수만이 아닌 학생들의 다양한 재능을 키우는 교육’, ‘특기 하나만 있어도 대학에 갈 수 있는 시대’를 표방했던 그의 대학입시 정책은 뿌리 깊은 대학 서열 체제와 과잉 입시경쟁 구조 속에서 결국 안착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학교 게시판에 성적순으로 이름을 붙이고, 전국 대학을 일렬로 세우던 ‘한 줄 세우기’에서 벗어나 다양한 특기와 적성을 존중하는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방향성만큼은 분명했고 옳았다. 고등학교 야간 자율학습과 보충수업 폐지, 월말고사·모의고사 등 각종 시험 횟수 제한, 학생 인권을 위한 체벌 금지 가이드라인 마련 등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학생들의 절규에 응답하려는 교육부 장관으로서의 책무였다.
아직도 ‘이해찬 세대’라는 낙인을 찍어그의 교육정책을 비판하지만, 지금 글로벌 문화산업 시장에서 얼마나 많은 K-컬쳐 키즈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세계 스포츠 시장에서도 코리아출신들이 각광을 받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그의 교육철학이 시초였고 밑바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17~19살이었던 ‘이해찬 세대’들은 25년후 학부모가 되었고 상당수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며 자신들이 외쳤던 ‘작은 자유’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권위주의 시대를 걷어내고 민주주의의 광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열망으로 ‘광장서적’의 주인이 되었던 사람, 시대적 과제였던 전교조 합법화를 동지적 애정으로 함께 열었던 사람, 한국 사회에서 가장 어렵고 지난한 교육개혁의 과제를 함께 짊어졌던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삶을 기리며, 부디 평안히 영면하시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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