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화한 미소, 나직한 목소리. 그가 떠났다
[국민배우 안성기를 추모하며] 커피 광고에 가장 어울렸던 배우 특유의 서민성·순수함·성실·인자함 악역에서도 카리스마 창조한 연기 권위·신비 물들지 않은 ‘진짜 우리 배우’
한국 영화 전성시대를 알린 배우
영화계의 슬픈 소식으로 새해를 시작하게 됐다. 영화계뿐만 아니라 대중의 오랜 친구였고, 가끔 보는 친척처럼 느껴졌던 그가 이 세상의 긴 여행을 마무리했다. 안성기 배우를 떠올리면 특유의 깊고 강한 눈빛과 꽉 다문 입, 그리고 독특한 저음과 느린 말투가 먼저 생각난다. 친근하면서 편안한 느낌 때문에 그는 커피 광고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이기도 했다.
8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세대는 그를 빼놓고는 한국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었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문화에 가장 민감했던 20대의 우리들은 안성기라는 배우의 특별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날 것 느낌의 거칠음, 그럼에도 악한 기운이 없는 순박함은 그전까지 한국 영화에서 우리가 알고 봐왔던 배우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이른바 코리안 뉴웨이브와 한국 영화 전성시대의 시작을 알린 배우였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성인 영화배우로서 데뷔작인 셈이다. 안성기는 그 시절 동네 골목에서 마주쳤을 법한 허술하고 순박한 중국집 배달부 역으로 성인 연기자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이 영화로 그는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했고, <꼬방동네 사람들>에서는 소매치기 전과자라는 편견 때문에 누명을 쓰고 삶을 망친 억울한 가장 역을 했다. 이철용의 자전적 소설이 동명 원작이며, 배창호 감독의 데뷔작인 <꼬방동네 사람들>은 소외되고 힘든 삶을 함께 견디며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80년대 대학가의 이념과도 맞아떨어졌다.
연기경력 70년, 끝없는 연기 변신
하지만 배우 안성기는 인기배우의 단점이 될 수도 있는 고정된 이미지나 배역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서 쾌유를 빌면서 그가 출연했던 대표작들을 다시 훑어보았다. 그가 맡은 배역의 성격과 직업군은 짧은 지면에 나열하기 힘들 만큼 다양하다.
5살부터 연기를 시작했으니, 연기 경력만 70년 가까운 경이로운 기록을 지닌 배우가 늙어가는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한 세계가 막을 내리는 기분이다. 배우 안성기의 모습은 그대로 보존되어 원할 때마다 꺼내볼 수 있겠지만 그의 영화를 대하는 느낌은 사뭇 다를 것이다. 그는 이제 전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아역배우 출신은 성공하기 힘들다는 징크스를 깨고 그는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별이 되었다. 그의 얼굴에서 아역 때의 앳된 느낌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선이 굵은 남성적인 얼굴은 배우로서 여러 가지 역할로 변신하기 쉽지 않을 것 같은 선입견을 깨고 안성기 배우는 다양한 연기를 펼친다. 그리고 그의 끝없는 변신은 이상하리만큼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설득력 있는 악역, 미워할 수 없는 카리스마
실제 삶에서 배우자를 포함해 타인에게 화를 내거나 험한 소리를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만큼 조용하고 인성이 훌륭한 사람으로 알려졌지만, 배우 안성기는 선하고 인자한 역할만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악역이었을 때조차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배우가 안성기였다. 충격을 줬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부러진 화살>에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캐릭터를 연기할 때도 안성기였기에 우리는 영화에서 그가 펼치는 논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투캅스>에서 부패한 경찰일 때도, 최초 천만 관객 영화 <실미도>에서 냉혹한 군인일 때도,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대사가 단 한 마디뿐인 범죄자일 때도 미워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실감 나지 않는 악역이라고 말할 수 없게 하는 모순적인 카리스마가 독보적이다.
작년 말부터 한 세대를 함께 숨 쉬며 살아왔던 배우들이 차례로 떠났다. 어쩌면 가족보다도 더 친근하게 느껴질 만큼 익숙한 존재들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국내 주요 영화제의 상을 휩쓴 화려한 수상 경력이 배우 안성기의 가치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는 수많은 트로피나 상패보다 더 귀중한 추억들을 우리 마음에 남겨주었다.

우린 그를 어떤 모습으로 기억할까
안성기 배우는 앞으로 대중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겠지만 그를 기억하는 방식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모습이 있지만 커피를 마시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그를 기억하거나, <실미도>에서 책임감과 양심을 지닌 비장하고 굳건한 대장의 모습으로, <라디오 스타>에서 일반인 안성기에 가까운 소박하고 정겨운 모습으로,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절대 변하지 않을 듯한 순정파 연인의 모습으로, <한반도>에서 국민이 원하는 대통령의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을 수 있다.
그에게서 인기배우로서 권위나 신비주의로 포장한 아우라를 찾을 수는 없다. 안성기만이 지닐 수 있는 아우라는 그런 데 있지 않다. 공로상을 받았을 때, 안성기 배우는 앞으로도 계속 연기할 텐데 아직 그런 상을 받을 때가 아니라고 농담 삼아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빨리 찾아온 이별이 더욱 아쉽다.
친근하게 느껴지면서도 존경과 신뢰를 모두 받는 배우가 되기는 쉽지 않다. 그런 귀한 배우가 떠났다. 하지만 그가 옆에 있다면 부드러운 눈주름, 온화한 미소와 함께 나지막한 목소리로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해 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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