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돗물 건배, 알면서도 속아주는 가족 사랑

짐 자무쉬의 ‘파더 마더...’가 제안하는 위안

영화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의 한 장면
영화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의 한 장면
  • [1분 핵심요약]
  • 가족의 민낯 화해와 감동이라는 상투적 틀을 벗어던지고, 테이블에 앉은 가족의 어색함과 거리감을 있는 그대로 포착한 짐 자무쉬의 신작.
  • 수돗물 건배 롤렉스를 차고도 수돗물을 대접하는 아버지와 그걸 알면서도 잔을 부딪치는 자식들. 기만이 아닌 ‘심리적 예의’로서의 속아주기.
  • 관조의 미학 부모보다 타인을 볼 때 더 온화해지는 시선을 통해, 적당한 거리두기가 주는 평온함을 역설함.
  • 한줄평 “따로 또 같이”, 각자 걷다가 아주 가끔 곁을 내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우리 시대의 로드무비.
  • [The Insight - 행간의 재구성]
  • ‘교차로’로서의 가족을 위하여
  • ① 수돗물 한 잔에 담긴 ‘긍정의 기술’ 영화 속 아버지는 궁색을 떨지만 손목엔 롤렉스가 빛난다. 자식들은 그 모순을 폭로하는 대신 수돗물 잔을 맞부딪친다. 이는 비겁한 회피가 아니라, 상대의 초라한 진심을 무너뜨리지 않으려는 ‘관조적 긍정’이다. 때로는 낱낱이 파헤치는 진실보다 적당히 속아주는 배려가 가족 관계의 품격을 만든다.
  • ② 7만 명이 응답한 ‘일상의 시학’ 전작 <패터슨>이 평범한 운전사의 일상을 시로 바꿨듯, 자무쉬는 이번에도 ‘작가주의’의 힘을 빌려 가장 진부한 관계인 가족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7만 명의 관객이 자무쉬에 열광한 이유는, 그가 제시하는 위안이 거창한 구원이 아니라 ‘평범함 속의 특별함’을 발견하는 찰나에 있기 때문이다.
  • ③ 설날, 가족의 새로운 정의 우리는 가족을 영원히 머물러야 할 ‘정박지’로 오해하곤 한다. 하지만 자무쉬는 가족을 잠시 스쳐 지나가는 ‘교차로’로 정의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스케이트보드를 타듯 미끄러져 갈 때, 역설적으로 가족은 가장 안전한 안식처가 된다.

설날에 어색하게 마주하는 가족

왜 우리는 가족 앞에서 더 어색해질까. 그럼에도 왜 그 관계를 놓지 못할까. 설날 아침, 한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의 얼굴을 가만히 살핀다. 가장 가깝지만 때로는 타인보다 멀게 느껴지는 관계. 명절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우리에게 가족은 안식처인 동시에 때로는 견뎌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이 미묘한 온도의 차이를 미국 독립영화계의 아이콘, 짐 자무쉬(Jim Jamusch) 감독은 신작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를 통해 특유의 무심하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해낸다. 지난 1월 초 개봉한 이 영화는 근사한 극적 화해 대신, 삐걱거리는 일상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던 가족의 민낯을 보여준다.

2025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영화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는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평범한 일상을 담고 있지만, 자무쉬만의 빛나는 유머 감각이 있다. 가족은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사람들이다. 가족 안에서도 자신과 타인의 경계선은 분명히 존재하고 가족이지만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만 삶이 순조롭게 이어진다.

영화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예고편.

탄생이라는 출발점에서 시작해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는 여정 자체가 우리 삶의 로드무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무쉬는 그런 삶의 여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파더 마더...>는 삶을 한층 더 넉넉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어서 자무쉬의 연륜에 맞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파더 마더>는 자무쉬 감독의 특징인 옴니버스 형식을 취한다. 운전하면서 차 안에서 나누는 대화 장면이 영화의 반 정도를 차지한다.

이 영화는 2017년에 발표했던 그의 전작 <지상의 밤>을 떠올리게 한다. <지상의 밤>은 다섯 개의 다른 도시를 배경으로 한 다섯 편의 에피소드로 되어 있다. 다른 도시로 건너뛰면서 공간은 바뀌지만 서사는 항상 택시 안에서 운전사와 승객 간의 대화를 통해 진행된다. 같은 시각이지만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생각과 욕망을 가진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사는 세계의 단면을 보여준다.

피 나눈 가족은 특별할까

최신작 <파더 마더...>에서는 그 시선이 실제로 피를 나눈 가족들에게 옮겨 갔다. <지상의 밤>에서는 친가족 대신 형수나 사돈 같은 이른바 법적인 가족만 등장한다. ‘가족을 향한 냉소’를 자무쉬의 유머로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가까워야 할 것 같지만 가족이란 실제로는 부담스럽고 때로는 피하고 싶고, 어떤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해야 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1989년에 발표했던 <미스테리 트레인>에서도 낯선 여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가족이 아닌 우연히 만나게 된, 전혀 모르는 타인이다. 가족에게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타인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자무쉬 영화에서는 그렇게 타인들과 우연한 만남을 통해 자신에 대해 더 잘 인지하게 되는 상황들이 연출된다.

자무쉬는 이번에는 진짜 가족을 통해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파더 마더>에서도 특별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흔히 볼 법한 평범한 가족관계지만 자무쉬만의 특이함이 있다. 아버지를 보러 가는 남매,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자매, 그리고 마치 연인처럼 다정한 남매가 나오는 세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수돗물로 건배해도 되나?

첫 번째 에피소드 ‘파더’에서 혼자 사는 아버지(톰 웨이츠)를 보러 가는 남매 제프(아담 드라이버)와 에밀리(마임 바이알릭)은 승용차 안에서 혼자 사는 아버지를 걱정하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아버지와 만났을 때, 세 사람의 관계는 어색해진다. 아버지는 연신 자식들에게 찾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고 자식들은 생활이 불편하지는 않은지 묻지만, 그들의 대화는 허공에서 떠돌고 엇갈린다.

그리고 그 이유는 첫 번째 에피소드가 끝날 때쯤 밝혀진다. 에밀리는 집안보다는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호수를 보며 더 편안함을 느낀다. 창가 의자에 앉아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다.

부모의 집에 놓여 있는, 어린 시절 자녀의 얼굴을 담은 사진들은 과거와 현재가 어색하게 부딪히는 시간을 만들어낸다. 부모는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 자식에게서 자꾸 어린 시절의 모습을 찾아내려고 하며 과거에 머물러 있고, 그런 부모를 부담스러워하는 자식의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그런 상투적인 관계의 틀을 유머러스하게 벗어던진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들이잖아.”라고 말하자, 아들은 “전 외아들이잖아요.”라고 받아치고 수돗물을 받아 자식들에게 대접하면서 건배를 하자고 하자, 아들은 “그런데 물로 건배해도 되나?”라고 딴지를 건다.

이제는 늙고 돈도 별로 없는 노인네처럼 굴던 아버지가 자식들이 떠나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고 당당한 멋쟁이로 돌변해 데이트를 하러 나가는 반전 아닌 반전도 자무쉬 감독의 유머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딸이 남동생에게 궁색해 보였던 아버지가 차고 있던 시계는 롤렉스 진품이었다고 말하는 장면 역시 알면서 속아주는 가족의 이중적인 모습을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함께 살 수 없어도, 좀 떨어져 있어도

두 번째 에피소드 ‘마더’에서 어머니 역을 샬럿 램플링이, 연례 행사로 어머니 집을 방문하는 두 딸 역을 케이트 블란쳇과 빅키 크리엡스가 연기한다. 다과 테이블 셋팅부터 옷차림까지 격식과 우아함을 잃지 않는 어머니는 첫 번째 에피소드에 나왔던 아버지와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자식들과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같다. 자의식이 강한 유명 소설가를 어머니로 둔 딸들이 성장하면서 느꼈을 법한 결핍감이 대화 중에 간접적인 방식으로 알게 모르게 노출된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부모를 잃은 쌍둥이 남매가 텅 빈 부모의 집에서 흔적을 더듬는 애도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눈물보다는 미소를 보이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두 사람의 태도는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남매가 있다는 데 더 위로를 받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영화'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서 부모를 잃은 쌍둥이 남매가 부모의 집을 찾아 애도하는 장면.
영화’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에서 부모를 잃은 쌍둥이 남매가 부모의 집을 찾아 애도하는 장면.

에피소드마다 공통적으로 삽입되는 장면이 있다. 가족이 모여 차나 커피를 마시면서 서로 건배하듯 잔을 부딪히는 모습을 카메라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기법인 ‘부감 쇼트’로 잡은 씬들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프레임 안에는 같은 잔에 담긴 같은 색깔의 음료수만 보인다. 가족은 서로 같은 색깔의 옷을 입었다고 좋아하거나 같은 음료수를 마시며 사물을 통해 형식적으로나마 친밀함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이제는 함께 산다거나, 같은 생각을 하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사물 속에서 유사함을 찾는 정도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가족의 모습이다.

반복되는 또 다른 장면이 있다. 길가에서 젊은이들이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장면인데 슬로우 비디오로 부드럽게 묘사된다. 그들은 정해진 궤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미끌어지듯이 지나가고 그들을 보는 주인공들의 시선은 매우 따듯하다.

부모를 대했을 때보다 더 너그럽고 온화해서 그 장면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자신의 삶에 지나치게 밀착되지 않고 관조적으로 바라볼 여유가 생길 때, 마음은 평온해진다. 하지만 가족을 볼 때는 그렇게 편한 거리감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자무쉬 감독은 가족이 가진 모순적인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과장되지 않게 그려내고 있다. 일상적인 사건을 특별하게 만드는 자무쉬만의 독특함이 담겨 있고, 편안함을 주는 영화지만 누적 관객 수가 기대만큼 많지 않아서 아쉽다. 각자 걷다가, 아주 가끔은 함께 옆에 붙어서 걸어주는 ‘삶의 로드무비’라고 이 영화를 칭하고 싶다.

미 독립영화계의 아이콘 짐 자무쉬 감독.
미 독립영화계의 아이콘 짐 자무쉬 감독.

짐 자무쉬, 7만 명의 관객이 발견한 일상의 시학

짐 자무쉬는 동시대 영화계에서 ‘작가주의’라는 명명이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하는 몇 안 되는 거장이다. 작품마다 급진적 변신을 꾀하는 봉준호식 스타일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자신만의 미니멀한 형식을 고수하며 그 안에서 시대의 공기를 미세하게 변주한다. 비슷한 형식 속에서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는 짐 자무쉬 감독이다.

예술 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7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전작 <패터슨>도 평범한 일상을 ‘빛나는 시적 순간’으로 치환하는 그의 탁월한 안목 덕분이었다. 이 영화는 버스 운전사인 주인공이 직업과는 어울리지 않은 ‘시 쓰기’ 작업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특별하게 만들고, 평범함이 빛나는 순간으로 변화시키며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자무쉬의 영화가 평범 속에서 특별함을 만들어내는 순간이다. 신작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는 그 시선을 가족이라는 가장 폐쇄적인 소우주로 확장했다. 거장은 수돗물 한 잔에 담긴 그 어색한 진심을 긍정하는 ‘관조적 위안’을 제시한다.

글쓴이

이화정 영화심리상담사

이화정 영화평론가는 700여편의 영화를 번역하고 영화이론과 통합예술치료를 공부했다. sbs 스브스프리미엄 등 여러 매체에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칼럼을 썼고 현재 국제영화비평가연맹(피프레시) 한국본부 정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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