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노 머시》까지
AI 판사의 가능성을 보여준 영화 AI 사법 시스템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 효율과 공정의 유토피아 영화 <노머시: 90분>은 사법 불신 시대에 90분 안에 증거 제출에서 형 집행까지 이뤄지는 초고속의 AI 판사 시스템을 소개한다.
- 감시와 통제의 디스토피아 그러나 이 시스템은 모든 시민의 사생활을 감시하고 데이터를 기록하는 체계를 전제로 한다. <마이너리티 리포터>는 예지력 있는 인간이 판단하지만 <노머시>는 데이터만으로 판단하는 AI판사라 결정한다. 인간은 무력한 존재로 전락한다.
- 기술 너머의 본질 AI 판사조차 결국 인간적 고뇌에 동화되는 결말을 통해, 진정한 정의는 단순한 데이터 연산이 아닌 ‘윤리적 성찰’과 ‘인간의 영역’에 있음을 시사한다.
“법정에선 자비가 없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 영화로도 제작된다. 아니, 이미 그 전부터 영화는 대중의 심리를 읽고 있었다. 최근에 개봉한 미국 영화 <노머시: 90분>(감독 티무르 베크맘베토브)은, AI가 대중화되면서 언급된 이른바 AI 판사가 모든 범죄를 심판하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주인공인 피고, 레이븐(크리스 프랫)은 의자에 묶여 있어서 꼼짝할 수 없다. 영화 배경인 이곳은 AI 사법 시스템의 법정이며, 검사도, 변호인도, 배심원도 없고, 오직 AI 판사의 얼굴과 목소리만 있다.
피고는 스스로 변호인이 되어 수집 가능한 디지털 데이터를 기반으로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한다.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 모든 증거자료를 검색하고 해결하기 때문에 역동성은 떨어지지만 클릭 하나로 대부분의 일상이 해결되는 지금 시대 상황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단절감이나 지루함 없이 영화 서사가 흥미롭게 끝까지 끌고 가기란 쉽지 않다. 배경이 바뀌지 않고 모니터 화면과 클릭만으로 사건을 풀어나가는 서사는 이미 영화 <서치>(아니시 샤간티 감독,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호세 시의 한 한국계 미국인 아버지가 스터디 그룹을 하겠다며 외출했다가 실종된 딸을 찾는 내용을 다룬 영화- 편집자주)에서 연출된 적이 있다.
기시감이 있긴 하지만, 영화 <노머시: 90분>은 자비 없이 생사가 갈리는 시간을 90분으로 한정해 긴박감을 준다. 노머시는 ‘사법 판단에 자비가 없다’는 뜻이다.
사법의 ‘비정함’에 동의하는 사회
영화는 미국 로스앤젤레스가 배경인데, 사법 체계에 대한 불만과 불신의 목소리가 큰 한국 입장에서는 크게 낯설지 않은 ‘사법 불신’ 서사다.
<노머시: 90분>이라는 제목은 영화의 전반적인 서사를 한 단어로 축약하고 있다. 수개월씩, 심하면 수년씩 걸리는 재판 과정을 디지털 정보에 기반해 인정사정없이 단 90분만에 끝낸다는 뜻이다.
피의자는 의자에 결박당한 채 변호인, 배심원도 없이 AI 법정에 선다. 피의자와 연관된 모든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AI 판사가 유죄 여부를 판단한다. AI 판사 역시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없고 시스템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피의자의 유죄가능성 확률이 숫자로 표시되고 재판 시한인 90분 안에 이 수치가 내려가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사형까지 집행된다. 반대로 무죄가 증명되면 수치가 내려가면서 결박이 저절로 풀리고 자유의 몸이 된다.
하지만 AI 법정에 섰던 모든 피고는 유죄판결을 받았고 의자에 앉은 채 사형됐다. 피고는 한 마디로 기계에 갇혀 있는 무력한 ‘시한부 인간’일 뿐이다. ‘머시 법정’이라 불리는 AI 사법 시스템을 개발한 목적은, 사건이 누적되어 더디게 진행되는 재판절차를 간소화하고, 유죄판결까지 걸리는 시간을 최대한 단축해, 범죄자를 빠르게 처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범죄율을 낮추려는 데 있다.
영화는 ‘머시 시스템’이 도입된 후로 LA의 범죄율이 확연히 낮아졌음을 대대적으로 홍보한다. 덕분에 일반 시민들은 도시가 안전해졌다는 심리적 위안을 받으며 편안한 잠을 취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사법절차에 대한 불만을 종식시킬 수 있는 첨단 시스템으로 시민들이 혜택을 받는 듯 보인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AI 버전
범죄예방책이기도 한 이 AI 사법 시스템이 영화 속에서 홍보하는 것처럼 완벽할까. 완벽해 보이는 시스템에는 항상 허점이 있고 그 누군가의 계략에 의해 이용당했음이 밝혀진다.
이는 2002년에 나온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떠올리게 한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예지력이 있는 세 사람을 계속해서 최면 상태에 둔 채, 범죄 가능성을 예측하게 만들고 범죄가 일어나기 직전에 범인을 체포한다는 흥미로운 서사로 주목을 받았다.
문제는 범죄가 일어나기 직전에 체포되기 때문에 실제로 범죄까지 이어질지 아닐지에 대한 변수를 무시한다는 점이다. 2000년대 초반에 나왔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인간을 이용해 범죄를 예방했던 시스템이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그 역할을 AI로 바꾼 영화가 나온 셈이다.
좀 더 안전한 세계, 좀 더 편안한 삶을 희구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영화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지만 변수는 늘 발생한다.
AI 재판의 온정, 인간사회에 있는 변수
현대의 AI 역시 비슷한 목적성을 가지고 시작됐지만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는 AI로 인해 갖게 되는 위협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수많은 인력을 대체하고, 나아가서는 인간과 같거나 인간을 뛰어넘는 독립적인 인격체로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도 키우고 있다.
<노머시: 90분>은 복수 서사를 택해 AI 재판에서 있을 수 있는 맹점과 우려를 지적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숨겨져 있던 진실이 밝혀지면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이제 피고가 된 레이븐 형사는 애초에 이 AI 사법 시스템을 도입한 사람이다.
이 시스템으로 인해 피해자가 발생해왔고, 그 뒤에는 그의 동료들이 연루되어 있었다는 스토리까지 보태진다. 이 도식적 스토리임에도,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를 희생해도 되는가에 대한 윤리성을 되짚어낸다.
영화는 AI 판사에 대한 호기심과 신뢰성을 반전의 서사를 통해 풀어낸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항소심을 거치면서 판결이 뒤집히는 것은 같은 증거와 주장을 놓고 법적으로 어떻게 해석하고 판단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법과 판례를 바탕으로 판단하지만, A라는 판사가 판단하는 근거와 B라는 판사가 판단하는 근거에 차이가 생긴다. AI 판사가 탄생하면, 그는 주관적인 견해를 완전히 배제하고 이른바 ‘공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좋을 만큼 일관성 있게 판단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연출된 AI 판사, 매독스는 사실에만 근거해 판단하고 냉정한 태도로 일관해야 하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기계보다는 인간에 가까워진다. 프로그램에서 벗어난 질문에 당황해하며 오작동을 일으키기도 하고, 레이븐의 논리에 설득당하거나 감정적으로 동화되기까지 한다.
프로그램된 대로 작동하는 기계가 아닌, 자신의 실수 가능성까지 인지하는 성숙한 인격체의 모습까지 보여주며 지극히 영화적인 결말로 끝난다.
영화에서 AI 판사는 물리적인 형체만 없을 뿐이지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면서 관객에게 위안을 줬을지는 모르지만 AI 사법시스템에 대한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으로 마무리된다.
그럼에도 영화는 정확성, 효율성, 정의 구현이라는 듣기 좋은 단어 뒤에 감춰진 맹점과 위험성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현실에서 ‘인간 판사’ 역시 맹점에 쉽게 사로잡히고 있음을 메시지로 담고 있다. 또한 AI와의 협력은 되돌릴 수 없이 추세이지만, 여러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도 하고 있다.
언제쯤 AI사법시스템이 도입될까
영화에서 연출된 AI 사법 시스템을 인간이 언젠가 실제에 적용하게 될까. 그럴려면 AI판사가 완벽한 증거 기록과 디지털 정보를 열람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전제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모든 시민의 사적인 기록까지 중앙정보시스템에 등록되어야 한다. 이는 모든 시민을 감시체계 안에 둔다는 뜻이 된다. 영화에서 연출된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이미 와있는 현실인지 모르겠다.
AI는 이미 우리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 있다. 챗GTP와 몇 시간씩 진지한 대화를 나누면서 지식의 폭을 넓혀가거나, 심리적인 위안을 받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보다 훨씬 더 말을 잘 들어주고 지치거나 지겨워하지도 않으니 굳이 인간 친구가 필요하지 않는 세상이 됐다.
AI는 날로 발전하고 있고 모든 영역에서 점점 더 적극적으로 활용될 것이다. SF영화처럼 현실에서도 AI가 모든 인력을 대체하거나 인간의 통제권에서 벗어나 재앙이 되는 날이 올까.
영화는 예지력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SF와 재난 서사가 실제로 비슷하게 현실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인간의 상상력은 전혀 근거 없이 허무맹랑하게 작동하지는 않는다. 늘 보고 들어왔던 일들이 단초가 되고 확장된다.
그러니까 상상력의 시작은 현실에 바탕을 둘 수밖에 없으며 동시대 사람들의 욕망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그 둘을 조합해서 만들어진 매체인 영화에서 연출된 서사는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영화에서처럼 AI에게 감정이 생기고 명령과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아가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SF 영화에서처럼 자아가 생긴 AI들이 인류를 공격하고 주인이 되어 세상을 지배하는 극단적인 상황보다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악용했을 때 우려가 더 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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