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따뜻했고, 우리는 항상 행복했다
국민배우, 국민아버지 최불암이 29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67년 동안 배우로 살아온 그의 삶은 어쩌면 배우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인생이었는지 모른다. 좋은 작품과 좋은 동료를 만났고, 가족의 사랑과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연기자로서 오래도록 기억될 배역을 남겼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상과 영예도 누렸다.
국민배우, 국민아버지 최불암이 29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67년 동안 배우로 살아온 그의 삶은 어쩌면 배우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인생이었는지 모른다. 좋은 작품과 좋은 동료를 만났고, 가족의 사랑과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연기자로서 오래도록 기억될 배역을 남겼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상과 영예도 누렸다.
지난 8월 25일 미국 ‘컨트리 뮤직의 여왕’ 돌리 파튼이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를 얘기할 때 우리 세대는 대체로 ‘몸’을 떠올린다. 컨트리 뮤직이라고는 하는데 그녀의 노래는 기억날 듯 말 듯 하고, 그저 거대한 금발과 풍만함만이 약간은 우스꽝스럽게 기억될 뿐이다. 이제 그녀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이야기하려 한다. 이번만큼은 음악 이외에 다른 할 얘기가 참 많다.
평생을 시대의 과제를 회피하지 않고 살아온 사회운동가이자 민주주의의 산 증인, 한국 정치의 거목인 이해찬 전 국무총리께서 영면에 드셨다. 윤석열의 내란을 극복하고 더 굳건한 민주주의를 구현해야 할 이 시대에, ‘민주주의의 거목’이 남긴 빈자리는 더욱 크게 느껴진다. 생의 마지막까지 이국땅 베트남 하노이에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신 그 치열한 삶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
영화계의 슬픈 소식으로 새해를 시작하게 됐다. 영화계뿐만 아니라 대중의 오랜 친구였고, 가끔 보는 친척처럼 느껴졌던 그가 이 세상의 긴 여행을 마무리했다. 안성기 배우를 떠올리면 특유의 깊고 강한 눈빛과 꽉 다문 입, 그리고 독특한 저음과 느린 말투가 먼저 생각난다. 친근하면서 편안한 느낌 때문에 그는 커피 광고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이기도 했다.
이제야 가을이 왔나 하던 지난주 어느 날, 뉴스를 들었다. 막 손에 든 커피를 한 모금할 참이었다.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가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떠났다고 했다. 입으로 가져가던 커피잔을 멈췄다. 잠시 멍했다. 한참 전에 보았던 영화들이 스쳐 갔다. ‘내일을 향해 쏴라’의 선댄스 키드가,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데니스가, ‘스팅’의 조니가 활짝 웃는 모습들. 그는 1936년생이었다. 그래, 그럴 때가 되었지.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의 사망은 ‘메탈 키즈’의 세계에서나 큰 뉴스려니 했다. 의외로 많은 추모의 글들에 좀 놀랐다. ‘오지형, 고마웠고 덕분에 행복했어’ 같은 애틋한 게시글부터 ‘헤비메탈은 이제 정말 끝났다’라는 격한 댓글들까지. 그 고마움과 행복은 언제까지였을까. 그들의 헤비메탈은 정말 이제야 끝난 것일까.
우리의 스승의 날(5월 15일) 이틀 앞서 인류의 큰 스승 한 분이 이 위태로운 세상을 떠났다. 마음 속으로 늘 존경하며 특히 이 나라 정치인들이 그의 반의 반만이라도 본받는다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했던 어른이었다. 그는 인구 340만 명쯤 되는 작은 나라의 정치인으로, 당대 이 세상에서 가장 탁월하고 특별하고 감동적인 인물로 칭송받았다. 모두가 만나고 싶어하는 지도자였다. 그의 정치에는 그의 특별한 인생이 고스란히 투여되었다.
대한민국 정보화 혁명의 개척자이자 영남 남인 퇴계학파의 학맥을 이어온 행파(杏坡) 이용태 삼보컴퓨터 창업자가 지난 14일 92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이용태 회장은 1980년 삼보컴퓨터를 설립해 PC 대중화에 기여한 대한민국 1세대 벤처기업가이자, 영남 퇴계학파의 학맥을 이어온 대한민국 유림(儒林)의 지도자이다.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정보기술(IT) 기업 중 하나로 삼보컴퓨터를 키워내 최초의 PC를 개발했으며 서울시 교통신호체계망 구축, 행정전산망 개발 등 지금의 대한민국을 ‘인터넷 강국’으로 성장시켰다.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두루넷도 그가 처음 설립했다.
미국 뉴웨이브 시네마 시대의 대표적인 배우이자 아카데미상을 두 차례 수상한 바 있는 진 해크먼(Gene Hackman)이 지난 2월 26일 아내와 반려견과 함께 자택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금의 젊은 세대에겐 어쩌면 낯선 이름일 수도 있겠지만 나와 비슷한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배우인지라 며칠이 지나도 그 먹먹함이 쉽게 가시질 않는다. 특히 진 해크먼과 그의 연기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나는 솔직히 아직도 아연할 뿐이다.
‘해뜰날’의 가수 송대관이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 오늘(9일) 오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대한가수협회장으로 고(故) 송대관의 영결식이 치러졌다. 영결식장에는 태진아, 이자연, 배일호, 설운도, 강진, 김성환, 박상철, 김수찬, 김창열 등 후배가수들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생전 고인과 가장 절친했던 태진아는 “형이 떠나고 제가 3일간 밥을 안 먹고 술로 배를 채웠다. 형님이 하늘나라로 가시면 방송하는 게 별로 재미가 없을 거 같다. 치매에 걸린 집사람이 대관이 형이 돌아가셨다고 하니 ‘아이고 어떻게? 왜?’라고 하더라. 아내를 끌어안고 울었다. 형이 우리와 얼마나 가까웠으면 기억을 못 하는 아내도 형을 기억해 줄까 싶었다. 대관이 형, 잘가. 아 영원한 나의 라이벌이여”라며 애통해 했다.
퀸시 존스 (Quncy Jones 1933년 시카고 출신) - 2900곡 이상을 녹음 - 300개 이상의 앨범을 녹음 - 51개의 영화의 TV음악 - 1000개 이상의 오리지널 작곡 - 79번의 그래미 후보 - 27개의 그래미 수상 - 18명의 E.G.O.T 중 1명(에미, 그래미, 오스카, 토니) - ‘Thriller’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 ‘We are the world’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싱글
필자가 고교와 대학에 다녔던 1970년대까지는 프랑스 영화가 꽤 인기가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 시대에는 특히 여대생들의 경우 뭔가 좀 있어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프랑스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야 했다. 1960~70년대에 걸쳐 세계 영화계를 풍미하였던 프랑스 배우 알랭 들롱(Alain Delon)이 며칠 전 향년 8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의 사망은 프랑스 영화의 한 시대, 아니 세계 영화의 한 시대에 쉼표를 찍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1950년대 후반 영화계에 데뷔하여 2010년대까지 활동하였으나, 그의 전성기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 사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요즘 젊은 사람들 가운데는 그의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들도 많고, 심지어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시대의 아픔을 대변한 뮤지션인 김민기가 우리 곁을 떠났다. 김민기는 지난해 가을 위암 4기 진단을 받았다. 그는 최근까지 경기 고양시 집에서 통원하며 항암 치료를 받아왔지만 암세포가 간까지 전이된 상태라 급격히 병세가 악화됐다. 고인은 눈을 감기 직전 “나는 할 만큼 다 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김민기와 절친했던 선배 가수 조영남은 “학전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 통화를 한 것이 마지막이다. 김민기는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 결이 가장 고운 사람이었다. 아침이슬보다도 맑은 사람이다“라고 추모했다.
이틀 전, 알바니아 소설가 이스마일 카다레의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을 듣고 황망했고, 이런 물음이 떠올랐다. 저자와 번역자로 글을 통해 만나는 관계란 얼마나 가까운, 혹은 얼마나 먼 사이일까. 불과 얼마 전까지 그의 글을 우리말로 옮겼는데, 게다가 그동안은 소설 작품으로만 만나다가 그가 사적인 일상을 얘기하고 속내를 털어놓는 에세이를 최근에 번역하면서,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느낌이지만, 전보다 그와 더 가까워진 듯했는데, 그가 이제 더는 이 세상에 없고, 더는 글을 쓰지 못할 거라니, 가까운 지인이 떠난 것처럼 마음이 허전하다.
지난 6월 11일 아름다운 별이 또 하나 지상을 떠났다. 프랑스의 싱어송라이터 프랑스와즈 아르디(Francoise Hardy, 1944년생). 프랑스와즈 아르디 하면 여전히 10대의 청순한 요정이 떠오르지만, 떠나는 날 그녀는 80세였고, 상큼한 소녀 감성의 곡이 우리나라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1990년대에도 그녀는 이미 40대를 훌쩍 넘겼었다. 세상의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과는 다르게 존재하는, 과연 음악은 요정들의 세계인지도.
마을 숲은 난해하지 않다. 오르기에 힘들지 않다. 산길이 문득 깊어서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고 스며들어도 길을 잃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마을 숲의 다정한 보살핌을 그리워한다. 시도 비슷한 면이 있다. 난해하지 않으나 엄하고 가지런하고 따뜻한 향기를 지닌 시들은 일종의 공공선처럼 느껴진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안온해지기도 하니 말이다.
한손에는 책을, 다른 한손에는 안경을 든 동그란 얼굴에 볼이 통통한 남자가 정면에 있는 1인용 의자에 앉아 자리를 주재한다. 그의 앞 탁자에는 여러 권의 책이 되는 대로 놓였고, 남자 앞쪽으로는 네댓 사람이 마주보고 앉아 남자의 진행에 따라 열띠게 말을 한다. 그들 가운데에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고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있다. 떠들썩하게 웃는가 하면 때로 모욕을 퍼붓고 격하게 소리치며 몸싸움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한다.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피터 힉스(Peter Ware Higgs, 1929-2024)가 지난 4월 8일 월요일 에든버러의 자택에서 혈액에 관련된 질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94세. 힉스는 자신의 이름이 붙은 이론적 도구를 개발해서 입자물리학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1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 밖에도 힉스는 에든버러 대학의 명예교수였고, 왕립학회 및 에든버러 왕립학회의 펠로우이자 영국물리학회(IoP) 명예회원이었으며, 컴패니언 오브 아너(Companions of Honour) 서훈을 받는 등 생전에 영국 물리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저는 선생님의 쇼팽 폴로네즈 음반(DG)을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1976년에 세상에 선을 보인 뒤로 선생님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동시에 지금까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녹음 음반이죠. 명징하고 강력하며 기교적으로 완벽하다는 이유로 찬사를 보내는 이도 있고, 냉정하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이 얼마나 의미가 있겠습니까만, 저는 두 의견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지극히 선생님다운 연주라는 사실 말입니다.
최근에 토리야마 아키라(鳥山 明)의 부고 뉴스를 접하고는 잠시 멍했었다.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영원히 늙지 않을 것 같던 그의 죽음이라니. 그의 나이도 이번에 새삼 알게 되었을 만큼 내게 그는 늘 젊은 감각을 가진 작가로 기억되어 왔다. 나는 올해로 40년 차가 된 셀 애니메이션 혹은 2D 애니메이션(흔히 만화영화라 부르는) 감독이다. 이런 내게 가장 좋아하는 그림 스타일의 만화 작가를 꼽으라면 나는 언제나 첫 손가락에 토리야마 아키라를 꼽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 이직으로 부산에 잠시 터를 잡았다. 내 학기 말 통지표에 적힌 유일한 칭찬이 “서울말을 잘함”이라 할 정도로 부산은 내게 너무 낯선 곳이었다. 천성이 내성적이어서 몇 달이 지나도 친구도 잘 못 사귈 즈음, 우리 반 친구 중에 빵집을 하는 아이가 나를 가게로 데리고 갔다. 그 빵집이 우리 집과 가까워서 가끔 놀러 가면 친구 아버지가 크림빵을 주셨다. 그날도 솔직히 빵을 먹고 싶어 가게를 기웃거리고 있는데, 유리창 너머 흑백 TV로 축구 중계가 있는 걸 보게 되었다. 친구 아버지가 가게로 들어오라 해서 크림빵에 우유를 마시며 축구를 아무 생각 없이 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1974년 서독월드컵 결승전 서독과 네덜란드의 경기였다.
화면은 군더더기를 덜어 더 간결하게, 사진보다 글이 먼저 눈에 들어오도록 꾸몄습니다. 깊은 붉은빛으로 품격을 더했습니다.
세계는 지금 전환기에 서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경제와 문화 역량도, AX(AI 전환) 시대의 기술도 함께 전환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혼란을 넘어 급변하는 세계를 희망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지혜를 담아내겠습니다.
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