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것 인생’ 살다 ‘아침이슬’로 지다

[‘영원한 청년’ 김민기를 추모하며] 지난해 가을 위암4기 판정후 악화 “나는 할 만큼 다했다”는 묵직한 유언 투사는 아니었지만 ‘저항의 신화’로 그는 노래와 연극으로 세상을 바꿨다

'학전'을 운영하던 시절의 김민기. 사진=연합뉴스
'학전'을 운영하던 시절의 김민기. 사진=연합뉴스

시대의 아픔을 대변한 뮤지션인 김민기가 우리 곁을 떠났다.

김민기는 지난해 가을 위암 4기 진단을 받았다. 그는 최근까지 경기 고양시 집에서 통원하며 항암 치료를 받아왔지만 암세포가 간까지 전이된 상태라 급격히 병세가 악화됐다. 고인은 눈을 감기 직전 “나는 할 만큼 다 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김민기와 절친했던 선배 가수 조영남은 “학전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 통화를 한 것이 마지막이다. 김민기는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 결이 가장 고운 사람이었다. 아침이슬보다도 맑은 사람이다“라고 추모했다.

김민기, 그리고 ‘아침이슬’은 1970~80년대 우리 시대의 아픔을 대표하는 무한한 의미를 지닌 이름이고 노래이며 회억(回憶)의 잔영이다. 그의 이름과 노래는 오랫동안 ‘금지’와 ‘저항’의 대명사였다.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만 해도 그의 이름은 ‘신화’에 가까웠다. 그의 삶과 노래는 굴곡진 우리 현대사의 가장 치열한 기록이다.

아름다운 청년 김민기가 향년 73세의 일기로 21일 별세했다.

미술 접고 음악인의 길로

김민기는 1951년 전북 익산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경기중·고를 다닐 당시 미술에 몰두했던 학생이었으나 1969년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한 뒤 붓을 놓고 음악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1학년 1학기에 낙제를 한 그는 고교 동창을 만나 아르바이트 삼아 듀엣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듀엣의 이름은 ‘도비두’. ‘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이다.

양희은을 만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1970년 어느 날, 고교 동창이던 임문일이 양희은을 소개했다. 집안 사정으로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던 양희은이 가수활동을 시작하며 김민기에게 노래 반주를 부탁했다.

김민기는 재동초등학교 1년 후배인 양희은의 노래를 반주해 주며 그녀를 위해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한다. 1970년 양희은의 데뷔작으로 발표된 ‘아침이슬’도 이때 만들어졌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그러나 김민기의 음악 활동은 시작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1972년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민중가요를 가르치다가 경찰에 연행돼 고초를 겪었다. 설상가상 ‘꽃은 시들어 땅에 떨어져, 누가 망쳤을까 아가의 꽃밭’이라는 가사로 유명한 ‘꽃 피우는 아이’가 금지곡으로 지정되면서 음반 활동에도 타격을 받았다.

그렇게 그는 불온한 사상범이 되었다. 수시로 체포·고문·취조 받는 일이 이어졌다.

축의금 대신 ‘상록수’ 선물

김민기는 1973년 김지하 희곡 ‘금관의 예수’의 극음악을 작곡해 무대 공연 경험을 쌓기 시작한다. 이듬해 4월에는 소리굿 ‘아구’의 대본을 쓴 뒤 작곡가 이종구가 곡을 붙여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소리굿은 공연윤리위원회의 제재를 받고 상연 금지 처분을 당했지만, 이화여대에서 체포 위협을 무릅쓰고 재공연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1974년 입대해 1977년 만기 제대한 김민기는 부평 근처의 한 봉제 공장에 위장취업을 하게 된다. 이 곳은 지금까지 그가 살아왔던 세상과는 180도 다른 곳이었다. 노동자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노래도 가르쳤다. 동료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상록수’를 작곡한 것도 그때였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쳐도

온 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그는 “동료들이 늦게 결혼식을 올리는데 돈도 없고 해서 노래로 대신 부조(扶助)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1978년 발표된 노래굿 ‘공장의 불빛’의 바탕이 된 것도 그의 노동현장 경험이었다. 세간에는 ‘공장의 불빛’이 동일방직사건(파업 노조원에게 똥물을 투척한 사건)을 극화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는 “극 중에 묘사된 철야작업과 구사대, 노조탄압은 당시 어느 공장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 노동현실이었다”라고 말한다.

‘공장의 불빛’ 카세트테이프를 배포할 때 김민기는 투옥될 각오를 하고 있었다. 1978년 양희은의 음반에 ‘늙은 군인의 노래’나 ‘상록수’를 실을 때, 심의 통과를 위해 작곡가 이름으로 김아영이란 가명을 사용했던 그가 이번에는 카세트테이프에 보란 듯이 김민기 이름을 새겨 넣었다.

작곡·작사료는 ‘막걸리 두 말’

김민기는 카투사에서 군 복무 중이던 1975년 초에 유신 반대 시위에 모인 군중이 ‘아침이슬’ 을 불렀다는 이유로 보안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아침이슬’은 금지곡으로 지정됐고, 영창살이를 마친 김민기는 강원도 최전방 부대로 재배치됐다.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던 곳이다.

1976년 겨울, 그곳에 퇴역을 앞둔 선임하사관인 상사가 있었다. 그는 김민기에게 ‘자신의 30년 직업군인 인생을 노래로 만들어 달라’라고 부탁했다. 답례는 소속 부대원들이 나누어 마실 수 있는 막걸리 두 말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노래가 ‘늙은 군인의 노래’다. 30년 이상 직업군인으로 헌신했던 노병의 애환과 설움을 담았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 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1977년 군대를 제대한 김민기는 이미 대학가의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대신 정부에 의해 공식 활동이 정지되었다. 그러나 양희은이 부른 이 노래는 삽시간에 전국의 병영으로 퍼져나갔다. ‘병영에서 괴상한 노래가 돌고 있다’라는 소식을 접한 국방부 장관은 ‘군인들의 사기를 저하시킨다는 이유’로 전군에 노래 금지령을 내렸다.

결국 이 노래는 사상 최초 국방부 장관 지정 금지곡 1호가 되었다. 그리고 1979년 4월 26일 방송윤리위원회(방윤)에 의해 정식으로 금지곡 지정이 되었고, 1987년 9월 5일 금지곡에서 해제됐다.

“농사 때문에 못 가” 국풍81 거절

음악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자 김민기는 고향인 전북 익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 암살된 10·26사태 뒤인 1979년 12월에 잠시 음악활동을 재개했지만,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세력들이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게 되자 다시 농사를 지으며 대외 활동을 삼갔다.

1981년 전두환 정부가 관제 예술제인 ‘국풍81’에 참여하도록 회유했지만, 농사일을 핑계로 끝까지 참가를 거절한 일은 유명한 일화다. 당시 허문도는 김지하, 김민기, 채희완, 임진택 등을 ‘국풍81’에 참여시키기 위해 각별히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민기가 밝히는 당시의 거절 이유가 재미있다.

“김제에서 농사지을 땐데, 허문도가 온 건 아니고 누굴 보냈더라고. 서울대 출신. 내려와 가지고 국풍 얘길 하길래, ‘나 농사지어야 해서 못 간다, 풀 뽑으러 가야 돼서 싫다’라고 했지. 그랬더니 백지명함 같은 걸 내 앞에 내미는 거야. ‘돈 쓰고 싶으면 맘대로 쓰라’면서.”

대신 틈틈이 찾아와 농사를 도와주던 전북 지역의 연극패·노래패들과 동학농민운동을 다룬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를 만들어 전주에서 근대사 세미나와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같은 해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으로 옮겨가 참깨 농사를 시작했다. 이 때 비료 회사에서 사익을 챙기기 위해 규정량보다 많은 양의 비료를 권장량으로 속여 판 것을 알고는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배상금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후에도 민통선 이북의 논에서 벼농사를 지으며 청년회를 조직해 농산물 직거래에 나서기도 하는 등 사회 운동에도 참가하기 시작했다.

1983년 화재로 집이 전소돼 서울로 올라온 김민기는 이듬해 대학 노래패들의 노래를 모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음반을 제작했다. 노래패 ‘노찾사’의 시작이었다.

스타들의 산실 ‘학전’

1991년 김민기는 20년 넘게 달려온 음악인의 길을 내려놓고 변신한다. 본격적인 연극연출가로의 길로 나선 것이다. 이른바 ‘뒷것 인생’의 시작이다.

1994년에는 학전극장을 상주 공연장으로 하는 극단 ‘학전’을 창단했다. 그는 이 극단에서 ‘지하철 1호선’ 외에 록 오페라 ‘개똥이’의 작사·작곡·연출과 록 뮤지컬 ‘모스키토’, 뮤지컬 ‘의형제’의 번안·연출을 담당했다.

‘학전’은 유명 배우를 꽤 많이 배출했다. ‘학전 독수리 오형제’로 널리 알려진 김윤석, 황정민, 설경구, 조승우, 장현성은 현재 충무로를 이끄는 스타가 됐다. 그 외에도 이정은, 배성우, 배해선, 김희원, 안내상, 김원해, 방은진, 나윤선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학전’을 거쳐 갔다. 들국화, 유재하, 강산에, 동물원 등 통기타 아날로그 가수들은 학전에서 라이브 콘서트 무대에 섰다. 특히 김광석은 1991년부터 1995년까지 매년 학전에서 라이브 콘서트를 개최하는 등 김민기와 각별한 관계를 맺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학전(學田)이 한자로 배울 학에 밭 전 자다. 학전 처음 열 때 내가 한 말이 있다. 여기는 조그만 곳이기 때문에 논바닥 농사가 아니다, 못자리 농사다. 못자리 농사는 애들을 촘촘하게 키우지만 추수는 큰 바닥으로 가서 거두게 될 거라고. 뭐 더러 잘되는 놈도 있지만 아직도 잘 풀리지 못해 자괴감에 빠져 있는 놈들이 90퍼센트가 넘으니 걔네들이 더 밟히지.”

고인은 ‘배움의 밭’(학전)에 널리 씨앗을 뿌렸지만 자신이 그 열매는 취하지 않았다. 배우와 가수들인 ‘앞것’들을 빛나게 하고 그는 그저 ‘뒷것’으로 살았다.

‘영원한 청년’ 김민기의 열정도 세월을 이기진 못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만성적인 재정난으로 학전 운영 중단을 결정했다. 학전이 문 닫는다는 소식과 함께 그의 건강 문제가 알려지자 많은 이들이 쾌유를 기원했다. 그러나 끝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을 바꾼 그의 노래

김민기는 투사가 아니다. 그는 투사가 되기에는 너무 심성이 여린 사람이다.

그는 남들에게 자신의 노래에 대해 소개하고 또 설명하는 데 완강하게 반발했다. “노래라는 것은 만들어지면 부르는 사람이 임자지, 작곡자는 철저히 제3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노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 자체를 기피하다 못해 혐오했다.

김민기는 인터뷰에서 세상의 이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사각형이라는 건 그렇게 오래가지를 못한다고. 임시적인 방편이야. 인간이나 자연 어디를 보더라도 직선이라는 건 없어. 어느 시점에서 이렇게 사각형까지 해보자, 이런 거지. 사각형이 자기 주장이 되었을 땐 억지가 되기 쉽다.”

1970년대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노래를 불러보지 않은 기성세대가 몇 명이나 있을까? 그가 만든 노래는 역사가 되어 우리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누군가 조용필의 노래는 가요계를 바꿨지만, 김민기의 노래는 세상을 바꿨다고 말한다.

소설가 김훈 선생은 죽음에 대해 “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볍다”라고 말했지만, 아름다운 사람과의 이별은 늘 가슴을 무너지게 한다.

그의 노래 ‘친구’를 듣는다. 가슴속에서 쓰리고 아린 파도가 일렁거린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오

그 깊은 바닷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 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글쓴이

이영훈 가요연구가

이영훈 가요연구가는 국제신문, 동아일보 등에서 신문기자로 20여 년간 근무하다 방송으로 옮겨 10년째 기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채널A 보도본부에 근무하면서 메인뉴스 편집데스크와 디지털뉴스부장을 지냈고 쾌도난마, 뉴스톱텐 등 여러 시사 프로그램의 제작데스크로 일해 왔다. 보도본부 선임기자를 거쳐 현재는 심의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한국정치, 바람만이 아는 대답>, <유행가는 역사다>, <그 노래는 왜 금지곡이 되었을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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