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혈서지원과 독립군가 ‘용진가’
[이영훈의 노래가 품은 역사] 친일 군국가요 ‘혈서지원’ 부른 남인수 작곡 박시춘, 작사 조명암 南北서 누려 아예 혈서 쓰고 日 만주군 입대 ‘박정희’ ‘용진가’ 부르며 항일 투쟁한 독립군이여
올해 8월 15일은 광복 80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다. 이에 정부는 이를 국민과 함께 기념하기 위한 공식 행사로서 ‘제 80주년 광복절 경축식’을 오전 10시에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한다.서울시도 보신각 타종식, 시향 기념음악회, ‘8.15 SEOUL MY SOUL’ 공연 등을 진행한다.
해방이 되기까지 일제의 압제에 의한 고통의 시간은 길고도 길었다.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온 몸을 던져 투쟁한 애국지사들도 있지만, 탄압에 굴종한 사람들도 많았다. 오늘은 광복절을 맞아 대중가요 분야에 있어서의 친일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자 한다.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2006년 10월 9일 저녁 7시. “친일가수 남인수가요제, 진주대첩 7만 영령이 통곡한다”
개천예술제 행사의 하나인 ‘남인수 가요제’가 열리고 있는 진주성 특설무대 앞에서 ‘친일잔재청산 시민운동본부’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시위를 벌였다. 일제 말기 ‘혈서(血書)지원’ 등 친일가요를 부른 진주 출신 남인수의 이름을 딴 가요제 철폐를 요구한 것이다.
도대체 남인수가 부른 ‘혈서지원’은 어떤 노래일까? ‘혈서지원’은 1943년에 오케레코드사를 통해 발매된 노래로 작사는 조명암, 작곡은 박시춘, 노래는 남인수·박향림·백년설이 불렀다.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일장기 그려 놓고 성수만세 부르고
한 글자 쓰는 사연 두 글자 쓰는 사연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해군의 지원병을 뽑는다는 이 소식
손꼽아 기다리던 이 소식은 꿈인가
감격에 못 이기어 손끝을 깨물어서
나라님의 병정 되기 지원합니다
대표적인 전시 친일 군국가요로 손꼽히는 이 노래는 우리 가요계의 ‘흑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타고난 미성으로 한국 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남인수는 ‘혈서지원’ 외에도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활약을 찬양한 ‘강남의 나팔수’, 징병제 실시를 축하하는 ‘남쪽의 달밤’, ‘이천오백만 감격’ 등도 불렸다.
‘혈서지원’은 ‘혈청지원가’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군가로도 리메이크 되어 불렸는데,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에 국가보훈처는 이 노래를 ‘추억의 군가’로 지정했다. 물론 가사 내용은 ‘일장기 그려 놓고 성수만세 부르고’를 ‘태극기 그려 놓고 천세만세 부르고’로,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를 ‘대한민국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등으로 개사했지만 정신 나간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의 ‘혈서’, ‘혈서지원’의 판박이
‘혈서지원’하면 바로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만주에서 발행되던 일본어신문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에 실린 ‘박정희 혈서 지원’의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29일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교사)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 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 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계원을 감격시켰다.”

박정희는 혈서지원을 포함한 세 차례의 지원 끝에 1940년 4월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만주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2기) 예과 과정에 입학한다. 그는 이 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하면서 만주국 황제 푸이(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일본에 의해 괴뢰국인 만주국 황제로 추대)가 하사하는 금장시계를 은사상으로 받는다.
박정희가 나온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는 정일권 전 국무총리, 백선엽 전 육참총장, 이한림 전 1군사령관, 김동하 전 해병대 중장 등이 있다.
박정희는 1942년 10월 성적 우수자로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했고, 1944년 4월 일본 육사 제57기와 함께 졸업했다. 12월 일본군 만주국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보병 8단 단장의 부관실에 부임해 작전참모 역할을 하는 을종 부관 겸 부대의 단기를 책임지는 기수로 근무했다. 1945년 7월 만주국군 중위로 진급했다.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문경에서 소학교 교사를 하던 박정희는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왜 갑자기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갈 생각을 했을까? 이 결정은 그의 생애에 중대한 갈림길이 되고 장차 대한민국의 운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일제의 침략전쟁이 정점에 이르고 있을 때 그가 형제들 중 가장 존경한 민족주의자이면서 공산주의자인 셋째 형 박상희의 반대가 완강했는데도 그는 듣지 않았다.
여러 가지 설(說)이 있다.
첫째, 첫 아내 김호남과의 불화로 인한 도피 심리라는 주장. 둘째, 학교를 방문한 장학사에게 장발 상태를 지적받고 물리적 충돌 후 더 이상 교사로 남기 어려워서라는 주장. 셋째,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힘을 기르고자 만군 장교가 되려고 했다는 주장. 넷째, 군인을 선망하는 의지에 따른 선택이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박정희 전기 작가인 전 청와대 비서관 김종신과 박정희의 대화를 들어 보자.
김종신 “각하, 만주군관학교는 왜 갔나요?”
박정희 “긴 칼 차고 싶어 갔지.”
박정희의 대답은 명쾌했다. 어찌 보면 민족의식이니 독립의식이니 하는 것보다 식민지 가난한 젊은이로서 당시에는 자신의 직업적 전망을 더 염두에 둔 현실적 선택이었던 것 같다. 힘센 군인으로 출세하고 싶다는 생각 말이다.
남인수-백년설, 친일행위 705인에 등재
‘혈서지원’을 작사·작곡하고 부른 사람들의 삶은 어땠을까?
해방 전에 ‘애수의 소야곡’, ‘감격시대’, ‘낙화유수’ 등의 히트로 스타덤에 올랐던 남인수는 해방 후에 ‘이별의 부산정거장’, ‘가거라 삼팔선’, ‘추억의 소야곡’, ‘무너진 사랑탑’ 등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당대 최고의 가수로 자리매김했다.
1957년 10월에 대한레코드가수협회를 창설해 초대 회장에 취임했고, 1960년 7월에는 ‘4․19혁명의 노래 전국보급 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1961년 12월에는 한국연예협회 부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1940~50년대 ‘신라의 달밤’, ‘굳세어라 금순아’ 등을 히트시킨 현인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최고 인기가수로 활동했으며 1962년 6월 26일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백년설 역시 남인수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대지의 항구’ 등을 빅히트시켰고, 1960년 이후는 가수협회 회장으로 있다가 1978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1980년 타계했다.
남인수와 백년설은 공통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됐다. 그리고 백년설도 고향인 경북 성주에서 그의 이름을 딴 ‘백년설가요제’가 만들어졌고 ‘남인수가요제’와 마찬가지로 친일 논란으로 파행을 겪다 결국 폐지된다.
‘혈서지원’을 부른 또 한 명의 가수 박향림
1937년 박정림이란 예명으로 ‘청춘극장’을 발표하면서 가수로 데뷔한 그녀는 이어서 ‘고향의 녹야’, ‘추억의 윤락’ 등을 발표하였다. 이후 콜럼비아레코드사로 이적해서 ‘박향림’이란 예명으로 ‘사랑 주고 병 샀소’를 비롯해 ‘찻집 아가씨’, ‘봄 사건’, ‘선창에 울러 왔다’, ‘오빠는 풍각쟁이’ 등을 발표하면서 인기가수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이후 태평레코드사와 오케레코드사를 오가며 많은 인기를 얻었던 박향림은 1946년에 25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일왕에 충성한 조명암, 월북 후 김일성에게 충성
작곡가인 박시춘은 경남 밀양의 부유한 집안 둘째아들로 태어나 일본 유학 시절 중학생 신분으로 순회공연단을 따라다니며 트럼펫·바이올린·색소폰·기타 등 다양한 악기의 연주방법을 익혔다. ‘몬테카를로의 갓난’, ‘어둠 속에 피는 꽃’ 등을 발표하며 작곡가로 데뷔했다.
1931년 남인수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이 히트하면서 오케레코드사 전속 작곡가로 발탁되었고, 1939년 조선악극단 일본 공연에서 현경섭·송희선 등과 함께 ‘아리랑 보이즈’라는 보컬팀으로 공연하기도 했다.
대한레코드작가협회 초대회장(1958), 연예인협회 이사장(1961~1972),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1966), 예술윤리위원회 부회장(1966), 음악저작권협회 명예회장(1981) 등 대중문화계의 요직을 역임했다. 1982년 대중가요 창작인으로는 최초로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다. 박시춘 역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됐다.
주요 작품으로는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전선야곡’,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럭키 서울’ 등이 있다.
작사가인 조명암의 삶은 좀 더 특별났다.
1941년 일본 와세다대 불문과를 졸업한 조명암은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동방의 태양’으로 등단했다.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많이 썼고 ‘신동아’, ‘인문평론’, ‘예술운동’ 등에 많은 시를 발표했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연극동맹 부위원장으로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해 ‘독립군’, ‘논개’, ‘위대한 사랑’ 등의 희곡을 발표하고 1948년 월북했다. 일찍이 ‘낙화유수’, ‘바다의 교향시’, ‘꿈꾸는 백마강’ 등 대중가요 수백 곡을 작사했던 그는 월북 후 ‘조국 보위의 노래’, ‘어머니 우리 당이 바란다면’을 비롯한 가사 작품들과 민족가극 ‘금강산 8선녀’, ‘춘향전’, ‘밝은 태양 아래’ 등의 작품을 남겼다.
북한에서 교육문화성 부상(副相, 차관), 평양가무단 단장,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1973년 북한으로부터 국기훈장 제1급과 ‘김일성상 계관인’ 칭호를 수여받았고, 1993년 사망한 후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나라님의 병정이 되자”며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고 ‘2차대전 전범’ 일왕 히로히토에게 충성한 조명암은 해방이 되자 월북해서는 ‘6·25 전범’ 김일성에게 충성했다.
북한은 정권 수립 후 친일파들을 모두 청산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지만, 월북한 조명암의 친일 행위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마지못해 노래 몇 곡 부른 게 뭔 죄냐”라고?
“나라님(일본 천황)의 병정이 되자”며 식민지 조선 청년들에게 징병을 권유하는 ‘혈서지원’ 노래가 서울 오케레코드사 스튜디오에서 녹음되던 그 시간, 광활한 만주 벌판에서는 ‘조국을 찾겠노라’며 목숨을 건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독립군들의 다음과 같은 노랫소리가 창창한 하늘에 울려 퍼졌다. 독립군가 ‘용진가’이다.
요동만주 넓은 뜰을 쳐서 파하고
여진국을 토멸하고 개국하옵신
동명왕과 이지란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 쳐보세
나가세 전쟁장으로 나가세 전쟁장으로
검수 도산 무릅쓰고 나아갈 때에
독립군아 용감력을 더욱 분발해
삼천만 번 죽더라도 나아갑시다.
한산도의 왜적을 쳐서 파하고
청천강수 수병 백만 몰살하옵신
이순신과 을지공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 쳐보세
“영하 사십도 시베리아 추위에 여름 모자 쓰고서 홑저고리로 밑 빠진 메커리(짚신)에 간발하고서 벌벌 떨고 다니는 우리 독립군!”
1920년대 러시아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었던 김경천 장군이 지은 ‘불쌍한 독립군’ 중의 한 구절이다. 황량한 만주 벌판에서 추위와 굶주림, 죽음의 공포와 맞서 싸우던 그때의 청년들을 생각하면 참 마음이 무거워진다.
일부에서는 “일개 가수가 일제의 압박에 못 이겨 노래 몇 곡 부른 것이 뭐가 그리 큰 죄냐?”고 묻는다. 정말 죄가 없을까? 민족을 배반한 그들, 그러나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해방 후에도 누구누구는 대한민국에서, 누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았다. 분노와 부끄러움, 가슴이 먹먹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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