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더기 코트를 자랑스러워했던 소녀

[선량하고 유쾌한 삶. 돌리 파튼을 기리며]

돌리 파튼 생전의 모습.
돌리 파튼 생전의 모습.
  • 우리 곁을 떠난 돌리 파튼. 어린 시절 엄마가 꿰매준 누더기 코트를 자랑스럽게 입었던 소녀는 자라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제안을 거절하며 주체적인 아티스트의 길을 걸었습니다.
  • 과학자들이 가슴 유선 조직에서 핵을 채취했다며 복제 양의 이름을 가슴이 큰 그녀의 이름을 따 ‘돌리’로 짓자, 불쾌해하기는커녕 “영광이지만 복제되고 싶진 않다”며 유쾌하게 받아넘겼습니다.
  • 동성애자 결혼에 대해 “그들도 이성애자들처럼 고통을 맛봐야지”라는 위트 있는 농담을 던지는 등 세상의 편견과 무거운 일들을 늘 선량한 유쾌함으로 녹여냈습니다.

지난 8월 25일 미국 ‘컨트리 뮤직의 여왕’ 돌리 파튼이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를 얘기할 때 우리 세대는 대체로 ‘몸’을 떠올린다. 컨트리 뮤직이라고는 하는데 그녀의 노래는 기억날 듯 말 듯 하고, 그저 거대한 금발과 풍만함만이 약간은 우스꽝스럽게 기억될 뿐이다.

이제 그녀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이야기하려 한다. 이번만큼은 음악 이외에 다른 할 얘기가 참 많다.

깊은 산속, 노래하는 소녀

돌리 파튼은 컨트리 뮤직의 아이콘으로서 이보다 완벽할 수 있을까 싶은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테네시 주, 스모키 산맥 기슭, 한 칸짜리 작은 오두막집, 12남매 중 넷째...

뭐랄까. ‘옛날 어느 깊은 산속 아주아주 가난한 작은 통나무집에 노래 부르는 걸 너무나 좋아하는 예쁜 소녀가 살고 있었어요’ 같은 느낌?

그녀의 사망 소식에 전 미국이 조기를 걸 정도인 톱스타가 어린 시절엔 장작더미 위에 올라가 닭, 오리, 어린 동생들에게, 혹 아무도 없을 땐 흙더미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는 이야기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실제로 이 동화 같은 이야기는 그림책으로도 여럿 나와있는데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는 부제가 유독 눈에 든다. 동화이자 위인전인 셈이다.

그림책 속에 나오는 돌리 파튼 모습.
그림책 속에 나오는 돌리 파튼 모습.

이 시절의 추억을 노래한 아름다운 곡이 따로 있다. 없는 형편에 엄마가 작은 천 조각들을 일일이 바느질해 만들어준 코트. 아이들은 누더기라고 놀렸지만 돌리는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다. 그녀는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자신 있게, 그리고 그리워하며 그때를 노래한다.

전 세계에 알려진 몇몇 폭발적 히트곡보다 나는 이 노래가 ‘돌리파튼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곡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실제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다.

Coat of Many Colors
-Dolly Parton

‘컨트리의 여왕’에서 ‘팝의 여왕’으로

돌리 파튼이 1967년 데뷔한 이래 평생 판매한 앨범이 대략 1억 장이라고 한다.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 판매량을 기록한 음악가 중 한 명이다. 이미 열 살에 지역 라디오와 TV에서 노래를 불렀고, 고교 졸업 후엔 내슈빌로 진출, 차트에 오른 여러 싱글을 만들며 작곡가로 먼저 성공했다.

최초의 대형 히트곡은 ‘Jolene’(1973)이었다. 이때부터 돌리는 그동안 함께 활동했던 포터 워거너와 결별하고 본격적 솔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직업적 결별이었을 뿐이라 그녀는 위거너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애정을 담아 노래를 하나 만든다. 1992년 휘트니 휴스턴이 영화 ‘보디가드’에서 불러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바로 그 곡 ‘I will always love you’다.

이 곡은 그러다 보니 사실 이별 노래인데 휘트니가 ‘헤어져도 넌 내 거야!!’라는 듯이 박력 있게 부른다면, 돌리는 ‘잊지 않을게요. 당신의 행복을 빌어요.’의 잔잔한 느낌이다.

I’ll always love you
-Dolly parton

엘비스 프레슬리가 이 곡을 탐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그가 부르는 대신 저작권의 반을 가져가겠다는 조건을 걸었고, 돌리는 이를 거절한다. 당장의 이익보다는 아티스트로서의 권리를 지키겠다는 의지였으나, 당시 엘비스의 인기를 생각한다면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19년 뒤 그 힘든 결정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수익을 가져다주게 될지 그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녀의 야망은 컨트리 뮤직에 머물지 않았다. 주류 팝 음악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음악적 다양성을 넓혀간다. 수월하진 않았지만 서서히 길이 열리기 시작했고 1980년 영화 데뷔작 ‘9 to 5(나인 투 파이브)’와 그 음악이 대성공을 거두며 돌리 파튼은 내슈빌의 컨트리 스타가 아닌 세계적 팝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9 to 5
-Dolly parton

이후 케니 로저스와 부른 ‘Islands in the Stream’이 다시 한번 차트 정상에 올랐고 돌리는 미국 팝계의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되어간다.

그녀의 이런 행보는 이후 많은 젊은 가수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마일리 사이러스, 테일러 스위프트 같은 이들이 컨트리와 팝 양쪽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데에는 그녀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은 돌리 파튼의 최전성기였지만 그 후로도 그녀는 전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아티스트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그래미 어워드 11번 수상, 빌보드 컨트리 차트는 1위만 26회, 배우이자 작곡자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이름을 올렸고,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도 올랐다.

‘Islands in the Stream’은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곡이라 생각되는데 그녀의 히트곡으론 드물게 자신이 만들지 않았다. 작곡자는 비지스(Bee Gees). 모를 땐 몰라도 알고 들으면 정말 비지스 노래구나 싶은 느낌의 곡이다.

세상 모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힘들게 자랐다고 해서 누구나 가난한 이들에게 따뜻해지는 건 아닐 것이다.

돌리 파튼의 자선사업과 사회에 공헌한 내용들은 이게 한 개인이 한 게 맞나 싶을 정도인데,
가장 감동적인 선행은 그녀가 설립한 돌리우드 재단의 일부인 ‘상상력 도서관’(Dolly Parton Imagination Library)이 아닐까 한다.

아이들이 태어나 유치원에 갈 때까지 책을 보내주는 사업으로, 처음 시작(1995년)은 수십 권이었다. 테네시 주지사 등이 같이 나서면서 지금은 테네시뿐 아니라 미국 전역, 캐나다, 영국 등 1600개 이상의 지역사회로 매달 6천만 권 이상의 책이 우편으로 배송되어 75만 명의 어린이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미국 5세 미만 어린이 7명 중 1명이 책을 받을 정도이다. 돌리는 가난으로 학교를 가지 못해 글을 읽을 수 없었던 아버지와 주위 친척들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5살이 된 상상력 도서관의 ‘졸업생’들은 돌리로부터 이렇게 적힌 편지을 받는다.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없단다. 너희가 갈 수 있는 거리에도 한계가 없어. 큰 꿈을 꾸고,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우며, 너희를 아끼는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겨라.”

'돌리 파튼 상상력 도서관' 홍보 그림.
‘돌리 파튼 상상력 도서관’ 홍보 그림.

그녀가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했던 노력의 정점은 테네시 산골에 세운 ‘돌리우드 테마파크’다. 4,000명가량의 직원을 두고 있는데 연 방문객이 400여만 명애 이를 만큼 간접고용 효과는 10만 명에 이른다.

테네시에서는 ‘돌리 파튼이 예수보다 유명하다’는 농담이 있다는데 그럴 만도.

돌리우드 테마파크
돌리우드 테마파크

돌리 파튼이 지금까지 사회에 기부한 금액이 6억 달러에 이른다. 재산이 많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누가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녀는 가난한 아이들뿐 아니라 과학 연구에 거액을 기부한 후원자이기도 한데, 코로나19가 유행하던 2020년엔 밴더빌트대 병원에 100만 달러를 기부했고 백신이 개발되자 직접 접종 장려 활동에도 나섰다.

그 외에도 에이즈 퇴치 기금 마련, 테네시 병원 설립을 위한 기부와 공연, 소아감염병 연구를 위한 기부 같은 유명한 사실들 외에 뒤늦게 알려진 잔잔한 미담이 끝도 없다.

경계를 모르는 선량한 유쾌함

나는 돌리 파튼이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찬성하는 의미로 했다는 유명한 농담을 좋아한다.

“동성애자들도 이성애자들처럼 결혼의 고통을 맛봐야지.”

자신은 기독교 신자이지 신이 아니라며 어떻게 누군가를 심판할 수 있겠느냐는 명쾌함.

그러나 그녀는 10대 때 첫눈에 반한 남편 칼 딘이 작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60년간 변함없이 화목한 가정을 꾸려왔다.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인생을 살아온 셈이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의 색이 짙은 컨트리 세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트럼프의 대통령 훈장을 거절했고 이후 바이든의 훈장 역시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재밌다. 정치적 경계 없이 전 미국인이 그런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음악적 취향을 떠나 나는 그녀의 유쾌함을 좋아하는 것 같다. 화려하고 과장된 외모가 늘 조롱의 대상이 되었지만 발끈하거나 혹은 이용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고 당당하다.

1997년의 그 유명한 ‘복제 양 돌리’는 돌리 파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가슴의 유선 조직에서 핵을 채취해 복제했다는 이유로 그녀의 풍만함을 빗대어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녀는 불쾌해 하긴커녕 “영광”이라며, ”그러나 내가 복제되고 싶지는 않다“는 농담까지 던진다.

진지할 법도 한 코로나 백신 캠페인 때의 영상에서도 자신의 히트곡을 곁들여 즐겁게 노래한다. 무거운 일을 가볍고 유쾌하게 풀어내는 재주가 있다.

사랑하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아픔도 그녀에게 그늘이 되지 않았다. 어린 동생들을 남편 칼 딘과 평생 자식처럼 보살피며 살았다.

호들갑스럽게까지 보이는 미국 사람들의 깊은 애도가 가진 의미를,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선량한 유쾌함’을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We’ll always love you.

글쓴이

김효진 팝 칼럼니스트

김효진은 팝 칼럼니스트 입니다. '아직도 안 망했냐'는 말을 4년 가까이 들으며 잠실에서 LP 바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시집 한 권과 여기저기 써낸 음악 에세이가 자꾸 늘어가는 무명작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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