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가슴에 살았던 ‘가장 아름다운 남자’

[로버트 레드포드를 추모하며] 성장기에 감정선 흔들었던 배우 잘생겼고, 감독으로 유능했고 사회운동가로서 얼마나 멋졌는지 삶과 사랑의 쉽고 간결한 메시지 전해줘

잘 생긴 정도가 아니라 감독으로 유능했고 환경운동가로서 고귀했던 로버트 레드포드가 지난 16일 8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잘 생긴 정도가 아니라 감독으로 유능했고 환경운동가로서 고귀했던 로버트 레드포드가 지난 16일 8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칼럼을 대화로 들어보세요

80년대 여고시절 마음속 ‘불멸의 연인’

이제야 가을이 왔나 하던 지난주 어느 날, 뉴스를 들었다. 막 손에 든 커피를 한 모금할 참이었다.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가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떠났다고 했다. 입으로 가져가던 커피잔을 멈췄다. 잠시 멍했다. 한참 전에 보았던 영화들이 스쳐 갔다. ‘내일을 향해 쏴라’의 선댄스 키드가,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데니스가, ‘스팅’의 조니가 활짝 웃는 모습들. 그는 1936년생이었다. 그래, 그럴 때가 되었지.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여름이 지나 가을바람이 부는 것처럼. 하지만 묵직한 상실감 또한 자연법칙처럼 다가온다. 가족이나 친구처럼 직접적인 교감이 있는 사람들의 죽음에는 서러움과 미안함, 후회 등이 슬픔이라는 감정 속에서 소용돌이친다. 그런데 직접적인 교감이 없는데도 상실이 크게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의 성장기에 감정선을 크게 흔들었던 사람이다. 여러 이유로 여린 마음을 흔들었던 그들. 배우 개인이라기보다는 스토리와 미장센으로 기억되는 그들.

그의 죽음이 기사화된 날 오전 내내 80년대 여고 시절을 보낸 동창들의 톡방에는 탄식과 애도가 넘쳐났다. 마음속의 그가 사실은 나의 이상형이었다고, 이제야 ‘커밍아웃’하는 친구도 몇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대체 얼마나 많은 우리 시대 여자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로 살고 있었단 말인가.

그의 ‘잘생김’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당연했고, 감독으로서 그가 얼마나 유능했는지, 사회운동가로서 그가 얼마나 멋진 행보를 보였는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가 감독한 ‘흐르는 강물처럼’의 주인공 브래드 피트는 사실 감독인 그를 닮은 배우가 주인공이라는 것으로 더 화제가 됐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미국에선 그가 미남의 대명사라는 이야기, 선댄스 영화제라는 불멸의 독립영화제는 바로 그가 만든 영화제라는 이야기, ‘내일을 향해 쏴라’라는 괴이한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Butch Cassidy and Sundance Kid는 두 주인공의 이름인데 그가 ‘선댄스 키드’였다는 이야기, 그가 여생을 살아오다 생을 마감한 지역의 지명도 바로 여기서 따왔다는 이야기….

오만하지도. 나약하지도 않은 자유로운 남자

바쁘게 위로 올라가며 이어지는 대화창을 바라보며, 마음을 스산하게 했던 황망함보다는 잔잔한 미소가 지어졌다. ‘얘들아, 반가워. 나도 그랬어.’ 이쯤 되면 로버트 레드포드는 70, 80년대 거의 모든 여성들의 마음으로 파고들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70~80년대에는 잘생긴 헐리우드 남자 스타들이 많았다. 그가 압도적으로 전 세계 여성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었던 건, 눈빛과 턱선이 주는 프로필의 특별한 대비 덕이다. 누구라도 위로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깊고 다정한 눈, 그리고 어떤 역경도 딛고 일어날 것 같은 강인한 턱선(線)의 조화. 약간은 어정쩡한 입매가 연민까지 자아낸다.

사실 어릴 적 나는 금발과 푸른 눈의 남자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편이었다. ‘잘생기면 뭘 해. 너희들의 기준이잖아.’라고 생각한 맹랑한 10대였다. 하지만 그 거부감의 예외가 생기고, 그것조차도 편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그가 주연한 시드니 폴락 감독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보고 나서였다.

그와 여주인공 메릴 스트립의 깊은 푸른 눈과 나부끼는 금발이 아프리카와 대비되는 것이 불편했던 사람들은 이 영화를 여전히 백인 우월주의 영화라고 비판했다고 들었다. 분명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 가져오는 영화적 극적 효과도 필요악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찌질함은 나머지 백인의 몫이었다. 거기 나오는 모든 아프리카인들은 현명하고 우아하게 그려진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유명한 장면.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유명한 장면.

미의 기준도 시대와 함께 변한다. 그는 확실히 요즘 아이돌 스타일의 미소년 형상은 아니다. 요즘은 ‘남자답다’, 혹은 ‘여자답다’라는 단어가 편견을 조장한다고 잘 쓰이지 않는 단어가 되었지만, 그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달리 표현한단 말인가. 특히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그가 보여준 데니스를.

영화에서 그는 그가 곧 데니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실 많은 여성들이 그렇게 느끼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더할 나위가 없었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성 안에 타인과 세상을 대하는 세심한 깊이를 가진 남자. 결코 오만하지도, 나약하지도 않은 자유로운 남자. 데니스 자체가 여심을 흔드는 캐릭터였고, 이를 표현해 내는 데 그는 외모와 연기 모두 맞춤형이었다.

반세기가 지나가는 지금까지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 아다지오를 들으면 데니스가 초원에서 메릴 스트립이 분한 여주인공 카렌의 머리를 감겨주는 장면이 생각난다. 영화에서 그는 사랑과 삶에 대해 ‘이렇게 하라’고 피상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과 행동을 통해 상대에게 깨달음을 줄 뿐. 쉽게 변질되기 쉬운 사랑과 집착, 존재와 소유의 개념을 긴 설명 없이 전달했다. 그 장면의 영상미와 감동을 따라갈 미장센은 많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하겠지. 일면식도 없는 남의 나라 배우가 천수 다 누리고 때 되어서 죽은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상실감씩이나 느끼느냐고. 그저 여자들은 잘생겼다면 사족을 못 쓴다고 심술궂게 끌끌댈 수도 있겠다.

환경운동가로 변신했던 로버트 레드포드. 사진= 연합뉴스
환경운동가로 변신했던 로버트 레드포드. 사진= 연합뉴스

모두가 함께 살아가자며 사랑 나눈 연인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힘주어 이 이야기 해주려 한다. 로버트 레드포드가 우리 시대에 특별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서부영화로 명성을 얻었던 그가 세기의 연인으로 등극하고, 그의 부고가 코리아의 여고 동창 톡방에서, 혹은 어디에서나 그리움의 대상이 된 이유는 명백했다.

그는 그와 그의 영화를 사랑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삶과 사랑에 대한 쉽고 간결한 메시지를 전달해 준 배우이자 감독이었다. 저예산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간과되지 않도록 그들을 위한 축제의 장을 나서서 만들어 주었다. 이는 말년에 그가 열중한 환경운동의 저변과 다르지 않다. 영화를 통해 보여준, 모두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마음을 나누는 것. 그것이 그가 표현한 시대에 대한 사랑이었다.

故 로버트 레드포드의 명복과 함께, 우리 시대의 영화를 기억한다.
그윽한 데니스가, 낭만의 선댄스 키드가, 위트의 조니가 영원하기를.

이 칼럼을 영상으로 · 5:39 [더칼럼니스트] 할리우드의 영원한 선댄스 키드, 로버트 레드포드가 남긴 메시지!
글쓴이

노수린 칼럼니스트

노수린은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소망하던 방송기자가 되었으나 술을 못마셔서 그만뒀다. IT 통신업계에서 딱 20년을 일하고 퇴직 후, 한림대에서 3년동안 겸임교수로 'IT문화사회학'을 강의했다. 이후 평생을 짝사랑해 온 문화 예술과 함께 하려 서울 양재동 소재 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루덴스'를 차려놓고 각종 전시와 공연을 기획하고 잡글을 쓰며 놀고 있다. 현실에서는 영화 강연으로, 칼럼니스트로, 연극배우로, 합창단원으로, 직장인 밴드 보컬로, 아마추어 화가로 좌충우돌 지내는 문화 잡식 로맨티스트를 자처하고 있다. 큰일이다. 너무 놀고 있다.

댓글

    함께 읽을 글

    칼럼 전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