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광주를 도운 초국적 연대 네트워크
이 글을 2026년 4월에 작고하신 패리스 하비 목사님 영전에 바칩니다.
- 고립을 깬 자생적 네트워크 1980년 5월 광주는 국내에서는 고립됐지만, 기독교계 인권 단체를 주축으로 한 초국적 연대망(NACHRK 등)이 가동되어 광주의 참상을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전파했다.
- 행동하는 양심들의 연대 제시 잭슨 등 미 민권 운동가들의 추모 예배, 현지 진상 조사단 파견, 뉴욕타임스 반론 기고 등 해외 활동가들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신군부를 압박하는 강력한 플레이어로 활동했다.
- 공동체 정신이 인류 보편의 가치 이러한 국제적 압력은 김대중 구명과 구속자 석방, 신군부의 유화 조치를 이끌어낸 실질적 힘이 되었으며, 오늘날 한국은 국제 사회가 우리에게 보내준 연대와 후원에 보답해야 할 위치에 있다.
망각되고 은폐될 뻔했던 광주의 비극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은 ‘고립’에서 비롯되었다.
계엄군의 폭력으로 광주 시민들이 죽고 다치고 끌려갔지만, 정부의 철저한 보도 통제로 대다수 국민들은 그 실상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외부와 고립되어 10일 동안이나 계속된 시민의 ‘불복종 저항 운동’은 공산주의와 불순분자의 폭동으로 왜곡되었다.
결국, 광주의 비극은 고립에 그치지 않았다. 망각과 은폐, 나아가 폄훼와 조롱의 낙인으로 이어지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 시선을 바깥으로 돌려보면 광주는 반드시 외롭지는 않았다.
나는 몇 년 전 미국 UCLA의 동아시아 도서관에서 광주항쟁 관련 문서 아카이브를 조사하다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국내에서는 광주의 참상이 철저하게 은폐되던 당시, 미국·일본·유럽 등지에서는 광주의 소식이 신속하게 전파되고, 각종 연대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외롭지 않았던 광주
이러한 소식은 정규 매체가 아니라 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러 인권 단체들과 관련 활동가들이 촘촘하게 연결된 자생적 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 네트워크에 관련된 여러 단체들과 인물들은 당시 한국 내에서 활동하던 비슷한 유형의 단체 및 인물들과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당시 한국의 정치 현실과 인권 상황을 중심으로 ‘초국적 연대’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었고, 이러한 망을 통해 광주의 비극적인 소식이 체계적으로 전파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대 네트워크는 대체로 기독교 계열 인권 단체가 주축이 되어 운영되었다.
여기에는 여러 배경이 있겠으나, 무엇보다 먼저 종교 조직의 특성상 네트워크의 구축 및 운영에 필요한 인적·재정적 지원이 수월하고, 기독교적 인본주의가 이러한 이타적 활동의 도덕적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970년대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는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이 종교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이른바 제3세계 권위주의 정권의 인권 탄압 행위에 대한 관심이 사회선교(social mission)의 일환으로 강조된 시기이기도 했다.

중심적 역할을 한 NACHRK
이 연대 네트워크의 중심에 뉴욕과 워싱턴 DC를 중심으로 활동한 “한국인권을 위한 북미 연맹”(North American Coalition for Human Rights in Korea, NACHRK)가 있었다.
이 단체는 1975년에 설립되어 1995년까지 활동했는데, 북미 지역에서 활동하던 기독교 관련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이 단체의 결성과 운영에는 “한국교회협의회”(NCCK) 출신 인권 운동가로 미국에서 활동하던 김재준 목사가 깊숙이 관여했고, 1960~70년대에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김대중 구명 운동에 관여했던 패리스 하비(Pharis Harvey) 목사가 실무 책임자로 활동했다.
NACHRK는 1960년대 후반에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결성한 비공식 조직인 “월요모임”(Monday Night Group)과도 밀접하게 연계되었다. 월요모임은 또한 비슷한 시기에 설립된 한국교회협의회(NCCK)의 “인권위원회”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등 국내의 기독교 계열 인권 단체와 긴밀하게 교류했다.
“월요모임”은 광주에 거주하는 선교사 등을 통해 수집한 “광주사태“ 관련 정보를 국제 전보나 인편을 통해 NACHRK로 보냈고, NACHRK는 수집된 정보를 편집해서 미국 내 다른 인권 단체 등으로 전파했다.
일본 기독교계 인권단체의 도움
NACHRK는 또한 일본의 기독교 계통 인권 단체들과도 수시로 접촉했다. 실무 책임자인 패리스 하비 목사가 초기에 일본에서 활동한 탓도 있지만, 당시 한국의 인권 단체와 활동가들이 일본의 인권 단체들과 밀접하게 연계된 영향도 크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아시아 기독자 협의회”(Christian Conference of Asia)가 운영한 “아시아 행동 그룹 자료 센터”(DAGA), “일본교회협의회” 산하 “한국 문제를 위한 긴급회의”(Emergency Christian Conference on Korean Problem, ECC), “일본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Japanese Catholic Council for Justice and Peace) 등이 NACHRK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활동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T.K생”이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지명관 교수의 “한국에서의 통신”과 유르겐 힌츠페터 기자를 광주로 보낸 독일 출신 선교사인 폴 슈나이스(Paul Schneiss)의 활동이다. 유럽에서는 독일에 본부를 둔 “한국민주화를 위한 세계 기독교 네트워크(ICNDK)가 주축이 되어 활동했다.
이 연대 네트워크에 참여하고 있는 단체들은 단순한 정보 전달에 그치지 않았다. 광주의 소식을 접한 즉시 한국 대사관으로 몰려가서 항의 시위를 벌이고, 워싱턴의 백악관과 의회 앞에서 호소문을 배포하고, 기도회와 모금 활동을 통해 한국 사회와 광주의 시민들에게 연대의 메시지를 보냈다.

곧바로 시작된 백악관 앞 시위와 희생자 지원 활동
1980년 5월 20일, 미국 시카고의 인권 단체가 광주 소식을 담은 영문 유인물을 최초로 배포한 것을 시작으로 뉴욕, 로스앤젤레스 등 미국 주요 도시를 비롯하여 일본과 독일 등지에서도 광주 희생자를 돕기 위한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항쟁이 끝난 직후인 1980년 5월 27일에는 NACHRK를 비롯한 세 개의 인권 단체가 공동으로 성명서를 발표해서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인권 유린 행위를 강력하게 규탄하고, 인권 외교를 강조하는 지미 카터 행정부의 강력한 외교적 대응을 촉구하였다.
1980년 5월 29일에 뉴욕 맨해튼의 유서 깊은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열린 ‘광주 희생자 추모 예배’에는 제시 잭슨 등 미국 내 저명한 민권운동가들과 정치인들이 참여하여 국제적 관심을 환기했다.
또한 미국, 유럽, 일본의 인권 단체들은 서울과 광주를 방문해서 진상 조사를 실시하고 관련 보고서를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유엔, 미국 정부 등에 제출해서 국제적 공론화를 유도했다.
1980년 6월, NACHRK는 두 명의 미국인 의사 Glen Gordon과 Young Song Kim을 광주에 파견하여 희생자 실태 조사를 실시하였고, 관련 보고서를 미국 국무부 한국과 과장인 밥 리치(Bob Rich)에게 전달했다.
1980년 7월에는 퀘이커교 인권 단체 소속 활동가 두 명이 광주와 서울을 방문해서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1980년 10월에는 일본 ECC 소속 활동가들이 한국을 방문해서 계엄군의 과잉진압 실태, 구속자들에 대한 인권 탄압, 김대중 내란 재판 소식 등을 조사했다.

언론 매체 통해 광주 참상 알리기도
인권 단체들은 언론 매체를 이용해서 광주의 참상과 한국의 인권 상황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워싱턴의 극우파 논객인 어니스트 르페버(E. Lefever)가 뉴욕타임즈 칼럼(1980.6.18)에서 ”광주사태“는 좌파 학생들이 준동한 폭동이며 한국은 아직 민주주의로 발전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주장해서 논란이 되자, 한국 관련 인권 네트워크에 속한 싱크탱크 국제정책센터(Center for International Policy)의 도날드 레이나드(Donald Renard)는 뉴욕타임즈에 반론(1980.7.4)을 게재하여 르페버의 주장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민권 운동을 이끌었던 앤드류 영(Andrew Young)은 NACHRK의 청탁으로 워싱턴 포스트에 광주항쟁을 추모하고 김대중의 석방을 촉구하는 칼럼(1980.9.29)을 게재하였다. 1981년 1월, 레이건의 초청으로 전두환의 방미가 확정되자, 미국 내 40여 개 인권 단체가 연서한 전두환 방미 반대 성명서가 뉴욕타임즈에 광고 형식으로 실리기도 하였다.
광주항쟁을 거치면서 이러한 연대 네트워크의 활동이 워싱턴 정가 및 의회에 미치는 영향력도 점점 증대하였다.
1981년 4월 10일, 하원 “국제관계 및 인권 소위원회”(Subcommittee on Human Rights and International Organiztion)는 NACHRK의 패리스 하비를 증인으로 출석시켜 국무부의 1980년판 한국 인권 보고서 내용에 대한 검토 의견을 청취하였다. 하비의 증언은 미국 의회가 한국 관련 인권 단체를 증인으로 채택해서 정책을 검토한 최초의 사례로 평가된다.
레이건 정부가 극우 논객인 어니스트 르페버를 국무부 인권 담당 차관으로 임명하려고 하자 NACHRK가 중심이 된 한국 관련 인권 단체들이 라틴 아메리카 인권 단체와 연합해서 임명을 철회시키도 했다.

덕분에 ‘자부심과 품위’ 회복할 수 있었던 광주
이러한 연대 활동들이 광주의 참상을 포함해서 한국의 인권 상황 개선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다. 레이건 정부가 전두환을 국빈으로 초대하면서 큰 실망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광주사태“로 군법회의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1980년 말부터 점진적으로 석방되고, 김대중이 사형을 면제받게 된 것은 국제적으로 형성된 연대 네트워크의 열성적인 활동에 크게 힘입은 것이다.
집권 초기 전두환이 가장 꺼끄럽게 여긴 ”외부 세력“은 광주항쟁을 계기로 영향력이 강력해진 이 연대 네트워크의 활동이었다. 전두환의 1983-1984년의 제1차 유화 조치는 이러한 초국적 연대 네트워크의 국제적 압력을 수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치유하기 힘든 깊은 상처를 입은 광주의 시민사회가 이러한 국제적 연대 활동을 통해 회복할 수 있었던 자부심과 품위는 참으로 값진 것이다.
광주항쟁 이후 힘겨운 과정을 거쳐서 놀라운 정치경제적 발전을 이룩한 한국은 당시 국제 사회가 우리에게 보내준 연대와 후원에 적극적으로 보답해야 할 위치에 서 있다. 이 보답은 1980년 5월에 광주가 보여준 경이로운 공동체 정신이 곧 인류 보편의 가치임을 다시 확인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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