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친위쿠데타와 우루과이의 경험

1973년 ‘남미의 스위스’에 닥친 쿠데타 12년간 군부세력,123명 살해·192건 실종 이후 사법정의로 ‘완전민주주의’ 실현 우리도 자칫 ‘민-군 연합독재’ 맞았을 수도 다시 광장으로 나가 이들을 척결해야 한다

2016년11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시위 장면. 사진=연합뉴스
2016년11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시위 장면.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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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쿠데타의 여러 사례

12월 3일 밤의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추가 설명이 필요 없는 친위쿠데타(autocoup, autogolpe)다. 친위쿠데타는 이미 권력을 쥐고 있는 자(또는 집단)가 자신의 권력을 연장하거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서 의회 등 헌법기관의 행위를 무력화시키고,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는 무력 행위를 일컫는다.

이러한 무력 행위는 한편에서는 합법적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불법적으로 이루어진다.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는 비상계엄이나 행정명령과 같은 합법적 장치가 동원되지만,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는 대체로 군부나 정보기관 등 제도화된 폭력 장치의 직접 개입에 의존한다. 신뢰할만한 자료에 의하면(Nakamura, David, “With brazen assault on election, Trump prompts critics to warn of a coup”, The Washington Post, 2021.1.5), 1946년에서 2021년까지 전세계적으로 약 148건의 친위쿠데타 시도가 있으며, 이중에서 110건은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38건은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의 경우,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유신헌법을 제정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박정희의 1972년 조치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의 1972년 9월 23일의 비상계엄 선포의 영향을 받았다. 한 나라의 정치 변화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그 인접 국가의 이전 사례를 보면 된다는 정치학자 길모토로 오도넬의 주장에 잘 부합하는 사례다.

1973년 2월에는 우루과이의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 정권의 친위쿠데타가 성공했고, 여기에 고무된 칠레의 육군 사령관 아구스토 피노체트가 1973년 9월 11일에 쿠데타를 일으켜서 살바토레 아엔데가 이끄는 민주 정부를 무너뜨렸다. 피노체트는 1978년에 다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헌법을 개정해서 종신집권의 지위를 획득했다. 1990년에는 페루의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이 좌파 게릴라 집단을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군부와 손을 잡고 의회와 사법기관을 장악한 다음 재집권에 성공하였으며, 제노사이드에 준하는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캄보디아(훈 센, 1997), 러시아(옐친, 2000), 베네수엘라(마두로, 2017), 말레이지아(야신, 2020), 엘 살바도르(부켈레, 2021), 투지니아(사이에드, 2021), 인도네시아(와히드, 2001), 브라질(보우사나로, 2022), 미국(트럼프, 2021) 등지에서 여러 유형의 친위쿠데타 시도가 있었으며, 일부는 성공했고 일부는 실패했다.

우루과이의 경험

윤석열의 친위쿠데타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우루과이 사례와 많이 닮았다. 첫째, 제법 탄탄한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친위쿠데타가 시도되었다는 점에서, 둘째, 군부와 협력한 통치수반이 군 경력이 없는 민간인 출신이라는 점에서, 셋째 반공과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따라서 1973년 친위쿠데타 이후 우루과이의 정치사회적 격변을 살펴보는 작업은 윤석열의 쿠데타 시도가 성공했을 경우, 우리 사회가 겪게 될 끔찍한 정치사회적 미래를 사유 실험하는데 유용한 비교정치학적 모델을 제공한다. 저명한 사회학자 찰스 틸리는 그의 저서 『민주주의”(Democracy)』에서 “민중이 민주주의를 세우는 데는 30년이 걸리지만 권력자가 그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데는 1년이면 족하다”고 지적했다. 우루과이가 여기에 정확히 어울리는 사례다.

우루과이는 중남미의 다른 국가와 달리 1941년 이전에 자유선거를 도입한 전세계 11개 국가 중의 하나로, “라틴 아메리카의 스위스”라 불릴 정도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안정된 국가였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이후 주력 산업인 수출농업이 침체되고 토지개혁이 실패하면서 정세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대지주와 자본가 세력에 대항하는 좌파게릴라 집단인 투파마로스(Tupamaros)가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우파 집권여당인 콜로라도 당의 정치적 입지를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1972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는 취임 후 국정연설에서 국가전복을 꾀하는 좌파 세력 척결을 위해서는 군부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보르다베리는 1973년 2월에 행정부의 기능을 군장성으로 구성된 국가안보위원회에 위임하였으며, 그해 6월에는 군대를 동원해서 무력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기존의 헌법 기능을 정지시켜버렸다. 이런 친위쿠데타 과정에는 안보와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정치개입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군부의 압력도 크게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말년의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
말년의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

좌파 세력에 의한 국가전복을 막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현실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군부는 우루과이 시민사회 및 정치경제의 모든 영역을 무력으로 통제했다. 보르다베리가 1976년에 퇴임하고 야당인 브랑코당의 아파리시오 멘데즈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나, 그 과정을 보면 유권자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군부에 의한 정권교체 공작의 성격이 짙었다. 1973년에서 1985년까지 우루과이의 통치체제는 선거에 의한 대통령제를 표방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군부가 실권을 장악하는 일종의 혼성독재, 또는 ‘민-군 연합독재’(Civil-Military Dictatorship)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민-군 연합독재가 공고화되면서 ‘남미의 스위스’ 우루과이는 “남미의 고문실”이라는 오명을 얻을 정도로 국가폭력이 광범위하게 자행되는 국가로 변해갔다. 군부는 좌파 게릴라 집단 뿐만 아니라 정계, 학계, 언론계, 노동계에 걸쳐 활동하던 사회주의자들과 반정부 인사들을 납치하여 고문하고 실종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등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인권탄압을 자행했다. 1973-1985년의 12년 동안 군부세력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자행된 인권탄압과 국가폭력에 대한 공포는 우루과이 시민사회를 무력화시켰고, 민주화와 사회발전을 위한 민간의 역량을 크게 위축시켰다.

우루과이의 인권 탄압의 강도는 비슷한 처지의 이웃 국가 아르헨티나와 칠레 보다 더 심각했다. 예를 들어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의 2000년 조사는 군사독재 기간 중 우루과이 국민 600명 당 1명꼴로 구금 상태에 있었다고 추정했는데, 칠레 1,200명 당 1명, 아르헨티나 2,000명당 1명인 것과 비하면 2~3배 높은 수준이었다. 군사독재 기간 중 최소 25만 명이 해외로 추방되었고, 6만 명 이상이 불법적으로 체포되거나 구금되고, 5천 명 이상이 정치적인 이유로 장기복역을 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우루과이 인권위원회의 2014년 조사는 1973~1985년의 기간 중 최소한 123명이 정치적으로 살해되었으며, 강제실종은 192건에 달한다고 보고했다.

지난 2022년 5월 20일(현지시간)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 시내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1973~1985년의 군사독재 시절 실종된 사람들의 추모 사진을 들고 침묵의 행진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지난 2022년 5월 20일(현지시간)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 시내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1973~1985년의 군사독재 시절 실종된 사람들의 추모 사진을 들고 침묵의 행진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독재 체제로의 퇴행이 민간과 군부에 걸친 지배 엘리트 간 합종연횡의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민주 체제로의 이행도 군부와 엘리트 정치집단 간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1984년의 국민투표에 의해서 신임을 잃은 군부 세력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는 조건으로 자신들이 자행한 인권탄압 행위에 대해서는 사법적, 정치적으로 면책을 받을 수 있는 조치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결국, 1984년 12월, 군부를 비롯하여 주요 정당 대표들은 수도인 몬테비데오의 해군 클럽에 모여서 군부의 불법적 행위에 대해서는 국가안보를 위한 정당한 통치행위로 간주하고 일체의 책임을 묻지 않는 조건으로 정권을 민간으로 이양하기로 합의했다. 이 협상에 기초해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전통적으로 군부와 밀접한 협력 관계를 맺은 콜로라도 당의 호세 마리아 산구이네티(1985~1990)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루과이는 1990년대 중반부터 시민사회의 강력한 저항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2005년에는 진보세력의 연합정당인 광역전선당(Frenter Amplio)의 테베레 바즈케즈(2005-2010)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잃었던 민주주의를 되찾을 수 있었다. 2010년에 보르다베리는 법원에 기소되어 내란죄로 30년 형을 선고받았고, 2011년에는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실질적인 통치수반이었던 전직 장성 그레고리오 알베레즈가 인도에 반한 죄 등으로 2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러한 사법정의 실현 덕분에 우루과이는 현재 이코노미스트지(誌)의 민주주의 지표에서 중남미 국가에서는 칠레와 함께 “완전민주주의”(full democracy)를 실현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끔찍한 미래

윤석열의 친위쿠데타가 성공했다면 우리도 우루과이와 같은 전철을 밟게 되었을까? 몇가지 유보사항이 있지만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우선, 우리나라 군부의 정치적 성격이 1973년의 우루과이 군부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우리나라 군부는 김영삼 정부의 하나회 척결과 1995~1997년의 5.18 사건 재판을 거치면서 완전하게 탈정치화 되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 기무사령부가 작성한 비상계엄 문건 사건과 이번에 김용현 국방부 장관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군부 엘리트 세력의 등장은 우리가 가정한 군부의 탈정치화가 ‘미신’일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정치학자 알프레드 스테판이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권위주의 체제를 경험한 군부 엘리트는 자신들이 국가 내부의 정치적,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는 마지막 주역이라는 왜곡된 소명에서 완전하게 자유롭지 못하다. 군부 엘리트는 국가 내부의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결국은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국가안보의 위기와 직결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 민간 엘리트가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군부에 협력을 요청하면 군부는 정치개입을 일종의 소명으로 간주할 개연성이 매우 높아진다. 스테판은 이러한 “내부안보” 중심의 소명 의식을 “신직업주의”(new professionalism)로 정의하고 전통적인 외부의 적(즉, “국방”) 중심의 “구직업주의”와 구분했다.

여러 증거와 정보를 종합해보면 윤석열은 자신의 위기가 곧 국가안보의 위기이며,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제도화된 폭력 도구를 보유한 군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여전히 신직업주의에 경도된 일부 군부 엘리트는 윤석열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해서 이런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군대를 동원해서 이번 기회에 “반국가적 종북세력과 범죄자 집단으로 몰락한 야당을 일거에 척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용현 국방부 장관, 여연형 국군방첩사령관, 이진우 수도방위사령관, 곽종근 특전사령관, 박종선 777부대장 등이 그 주역들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한국 사회는 우리가 겪었던 박정희-전두환 독재 체제와 비교해서 그 폭력성의 강도가 다소 완화된 형태로서 민-군연합독재 혹은 연성독재 체제가 될 것이다. “구국의 일념”으로 쿠데타를 기획하고 참여하고 조력한 군부 엘리트와 그 후원 집단은 자신들이 실행한 정치적 모험에 대한 대가로 정치적 지위를 획득하면서 우리 시민사회와 공공영역에 걸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며칠에 걸쳐서 1979년의 부마항쟁, 1980년의 5.18민주화운동, 그리고 1987년의 6월항쟁을 거치면서 지난 30년 동안 축적한 민주주의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사건을 경험했다. 다행히 우리의 민주주의와 시민사회는 놀라운 역량을 발휘해서 당장의 위기는 모면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위기의 제공자와 그 후원세력이 우리 사회의 공공영역에 잔존하고 있는 한 절대 안심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해 있다. 우리의 소명은 이제 너무나 자명하다. 그들을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척결”하는 것이다. 우리는 또 광장으로 나가야 한다.

글쓴이

최용주 (전)5.18진상규명조사위 조사1과장

최용주 (전)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1과 과장은 전남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켄터키 대학에서 사회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쳤다. 공직을 은퇴한 후 5.18기념재단 연구위원을 지냈으며, (전)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1과 과장을 맡았다. 지금은 독립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서로 <책장 덮기: 역사적 관점에서 본 이행기 정의>(진인진 2022), <5.18 푸른눈의 증인>(한림출판사 2020), <나의 이름은 임대운>(객, 2022) 등이 있다. 1958년 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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