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5.18과 미국책임론
미국은 5.18 폭력진압 묵인했나 아니면, 광주학살에 적극 개입했나 1989년 국무부 “내정 간섭 권한 없었다” 美, 광주 비극에 도덕적 책임가져야 트럼프 정부, 진상규명에 협조해야
광주항쟁과 반미주의
월남전쟁 이후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가 가장 극적으로 변한 사건은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이다. 광주항쟁은 반미(反美)주의가 정치적, 사회적, 정서적으로 본격적으로 표출될 수 있는 여러 의혹들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의혹들이 얼마나 타당한 근거가 있는지에 대해서 명료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광주항쟁을 계기로 촉발된 반미주의는 ‘사실’의 영역과 ‘도덕과 가치’의 영역이 혼재되어 나타난 사회적 현상임을 감안하면 명료한 해답을 얻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광주항쟁 당시 미국의 역할을 둘러싼 여러 의혹에 대한 점검은 냉전체제 하 한미 관계의 성격을 조명하는데 유용한 단서들을 제공한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반미주의의 주장은 정당한가
당시 가장 단순한 반미주의 근거는 한국 군대에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전두환 내란집단이 군병력을 동원해서 광주시민을 학살하도록 묵인했다는 의혹이다. 이러한 초기 의혹은 나중에 계속 진화하여 미국은 방조 내지 묵인 차원을 넘어서 광주학살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주장으로 확대되었다. 이른바 미국책임론이다.
1981년 광주미국문화원 방화사건, 1982년 부산미국문화원 방화사건, 1985년 서울미국문화원 점거 사건 등 광주항쟁 후 학생운동 세력에 의한 일련의 반미주의적 집단행동은 광주학살을 묵인 또는 교사한 혐의를 받고 있는 미국에 대한 강력한 적대감의 표시였음은 물론이다.
1988년에서 1989년까지 국회에 설치된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규명특별위원회”는 광주항쟁 당시 미국대사와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에 대한 증인 채택이 무산되자 미국정부에 공식 질의서를 보내서 광주항쟁 당시 미국정부의 관여 여부를 질의했다.
나아가 2002년 5월 18일 광주의 시민단체는 미국의 책임을 묻는 “5.18시민법정”을 열어서 당시 지미 카터 대통령,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 존 위컴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 에드먼드 머스키 국무부 장관, 헤럴드 브라운 국방부 장관, 리차드 홀부르크 국무부 동아시아 차관보 등의 미국인 관료에 대해서 ‘인도에 반한 죄와 집단살해죄’ 등을 적용해서 유죄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미국의 혐의’에 대해
구체적으로 보자면 당시 미국이 받았던 혐의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전두환 내란집단이 공수부대와 20사단 등의 병력을 사용해서 민간인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알고 있으면서 작전통제권을 가진 한미연합사령부는 병력 동원을 승인했다.
2)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고 있었던 5월 22일 백악관 국가안보위원회(NSC)는 고위정책위원회(policy review committee, PRC)를 열고 한국정부의 광주진압작전을 승인했다.
3) 한국의 미국대사관, 한미연합사령부, CIA 한국지부 등은 광주의 시위를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민의 정당한 저항이 아니라, 불순분자나 사회불만 세력의 폭동으로 왜곡하여 전두환 내란집단에 대한 카터 행정부의 군사적/외교적 지원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사실로 인정되는 것들
여러 증거들을 종합해볼 때, 위 혐의들은 대부분 사실이다.
첫째, 윌리엄 글라이스틴 미국대사는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전인 5월 7일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서 “우리는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한국정부가 군병력을 동원해서 경찰력을 지원하는 비상계획(contingency plan)을 세우는 작업에 반대해해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또 워렌 크리스토퍼 당시 국무부 차관은 바로 답장을 보내 “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한 한국의 비상계획에 반대하지 않기로 했다”는 국무부의 입장을 전달했다.
광주항쟁 당시 광주에 파견된 공수부대는 이미 한미연합사령부(CFC) 작전통제권 밖에 있었으며, 5월 22일 한미연합사령부는 20사단 병력의 광주 배치를 사후 승인했다. 당시 계엄사령부는 광주진압작전 계획을 세우면서 최소한 두 차례에 걸쳐서 한미연합사령부 작전참모와 협의한 사실도 확인되었다.
둘째, 5월 22일 오후 4시(한국시간 5월 23일 오전 3시) 백악관에서 열린 고위정책평가위원회(PRC)는 광주의 상황이 더 악화되면 북한의 도발을 야기할 수도 있으므로 한국정부의 군병력 동원을 반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날 회의에는 백악관 안보수석, 국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 CIA 국장을 비롯해서 총 22명의 고위급 인사가 참석했으며, 회의를 주재한 국가안보수석 지비그뉴 브레진스키는 회의 결과를 “단기적으로는 (군부) 지원, 장기적으로는 정치발전 촉구”(In the short term support, in the longer term pressure for political evolution)로 요약했다. 그리고 이 회의 결과는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정부에 신속하게 전달되었다. 이 결정은 전두환 내란집단에게 무력진압의 “그린 라이트”(green light)가 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세째, 한국 주재 미국 고위 관리들이 광주시민의 시위를 민주화운동 또는 국가폭력에 대항하는 시민의 정당한 저항으로 평가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글라이스틴은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서 광주항쟁의 원인을 호남 차별에서 빚어진 지역갈등으로 평가했으며, 광주가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이라는 점을 유독 강조했다.
글라이스틴은 자신의 회고록(Massive Entanglement, Marginal Influence: Carter and Korea in Crisis, 1999)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1980년 5월 17일 전국에 걸쳐 군부에 의한 강압적 질서가 유지되고 있었으나 전라지방의 역사적 중심지인 광주의 학생시위는 계속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계속된 직접적인 원인은 서울에서 있었던 강경 시위의 책임을 물어 전라도가 배출한 영웅 김대중의 체포에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뿌리 깊은 지역감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서울의 지도층과 많은 한국인들은 전라도 사람들을 차별해서 그들을 2등시민 내지는 상대 못할 인간으로 취급했다. 지역감정은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가 특히 심했다.” (127쪽)

존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은 계엄군의 발포 때문에 시민들이 무장하게 된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광주 시위가 외부 불순분자의 개입에 의한 무장 “폭동”(riot)으로 변질되어 있다고 본국에 보고하였다. 존 위컴은 자신의 회고록(Korea on the Brink: From the 12/12 Incident to the Kwangju Uprising, 1979-1980)에서 아래와 같이 기술했다.
“5월 25일 광주에서 전해 온 소식은 불행히도 나쁜 것이었다. 유병헌 합참의장은 시민들이 무기를 반납하던 5월 24일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과격파 중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 극력 분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범법자와 극빈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핵심적인 과격 세력은 약 500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그들은 군인 복장과 무기로 무장했으며 총격전을 벌일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 그들은 시 전체에 걸친 지휘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으며 “인민재판”과 “즉결심판”의 형태로 “선량한 시민”들을 자신의 지시에 따르도록 협박하고 있었다.” (141쪽, 따옴표는 필자가 첨가)
1989년 문서가 인정하는 사실은 “몰랐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미국 측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미국의 입장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1989년에 미국정부가 한국의 국회에 보낸 답변서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미국정부의 성명서”(United States Government Statement on the Event in Kwangju, Republic of Korea, in May 1980)이다.
이 문서는 당시 우리 국회가 미국정부에 보낸 질의 내용에 대한 답변서 형식으로 작성된 것이다. 52쪽에 달하는 이 답변서의 요지는 다음 세 가지다.
1) 미국정부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2) 미군이 한국군대에 대해서 행사하고 있는 작전통제권은 강제력이 별로 없는 권고적 조치다.
3) 미국은 주권국인 한국의 내정에 간섭할 권한이 없다. 즉, 미국은 정보 부족으로 정책 수립에 한계가 있었으며,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한국정부, 특히 쿠데타 세력을 대상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단과 외교적 명분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한계?
1990년대 초반 이후 각종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미국의 1989년 답변서에 여러 모순이 존재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기존의 관점을 철회하지 않았다. 특히 글라이스틴과 위컴은 공교롭게도 같은 해인 1999년에 회고록을 출간했는데, 그 서술의 관점과 사건에 대한 해석은 1989년 성명서의 그것과 한치도 다른 게 없었다. 이 두 회고록은 1989년 성명서에 대한 공식 주석서인 셈이다.

글라이스틴과 위컴의 회고록을 관통하는 공통의 관점은 당시 미국은 한국의 국내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참고: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4447352 )
글라이스틴 회고록의 제목이 잘 암시하고 있듯이 당시 박정희 사후 광주항쟁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엄청난 혼란”(massive entanglement)에 놓여 있었는데, 미국은 “제한된 영향력”(marginal influence)을 발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제한된 영향력은 주권국 대한민국의 정치적, 경제적 발전에 힘입은 바 매우 크며, 자국의 운명은 결국 자국이 결정할 수 밖에 없다는 주권국으로서 지위에 대한 규범적 각성이 크게 작용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미국을 농락한 내란집단의 정보력
실제로 1979년 박정희 사후 5.18에 이르기 까지 국내 정치상황과 한미관계를 살펴보면 미국은 전두환 내란집단에 의해 이리저리 이끌려 다닌 기색이 역력하게 나타난다.
12.12사태 때 전두환 내란집단은 미군 측에 있는 작전권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전방의 9사단 병력을 후방으로 빼내서 쿠데타 병력으로 동원했으며, 광주항쟁 당시에는 미국 측이 발표한 유감성명서를 조작해서 방송했고, 미국이 자신들의 무력 진압을 승인했다는 내용의 선무방송을 공공연하게 했다가 미국측의 강력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한국의 정세, 신군부의 쿠데타, 광주항쟁의 전개 등 중요 사건에 대한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미국은 신군부 또는 여기에 협력하는 정치집단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정보의 비대칭은 미국이 한국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의 범위를 축소하는데 기여했다. 미국은 중요 정보의 상당 부분을 전두환 내란집단측으로부터 얻어냈으며, 이런 정보의 태반은 당연히 신군부 측에 유리한 쪽으로 재가공되었다.
미국, 자신의 혐의에 억울하기만 할까
이런 점을 감안해서 미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에서 광주항쟁의 비극에 이르는 혼돈의 과정과 관련되어 미국에게 씌워진 혐의는 억울한 것이다. 글라이스틴은 회고록 서문에서 아래와 같이 토로하고 있다.
“한국군의 작전명령권이 미국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많은 한국인들은 미국을 광주의 비극과 같은 사태 발전의 공모자로 생각했다. 실제는 우리는 정보 부족과 실효를 거둘 만한 통제수단이 없어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았다. 미국은 한국의 정치적 자유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펼쳤지만, 전두환 장군의 대통령 취임과 더불어 자유를 향한 개혁 노력이 실패로 끝나고 독재정권이 수립되자 많은 한국인들은 좌절하고 미국을 비난했다.”(4-5)
이 쟁점은 매우 논쟁적인 주제다. 국제관계에서 패권세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주의(realism)의 측면에서 봤을 때와 영토주권을 가진 개별국의 입장이 강조되는 규범론적 측면에서 봤을 때 그 평가가 달라질 수 있는 쟁점이다. 한미관계에서 미국의 역할을 과대평가해서도 그렇다고 과소평가해서도 안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이 문제는 논리적인 자기모순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도 강조될 필요가 있다. 즉 우리가 문제가 삼는 게 주권국 한국에 대한 미국의 “간섭”이라면 그 효과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간섭의 부당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1980년에 미국이 전두환 내란집단을 후원한 게 문제가 된다면 1987년에 전두환 정권의 군동원 계획을 저지한 미국의 조치도 명백히 주권국 행정부의 결정에 개입한 것이므로 그 결과와 관계없이 비판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최소한 논리적으로 성립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한국의 정치에 간섭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광주의 비극에 책임이 없다는 주장은 냉전 체제 하에서 실질적인 위성국가인 한국에 대한 패권국 미국의 책임이 어떤 각도에서 규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 부재가 초래한 외교적 변명임은 분명하다. 본질적으로 한미관계에 있어서 미국은 그 존재 자체로 한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미국대사 글라이스틴과 한미연합사령관 위컴은 바로 패권국의 영향력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핵심 행위자(key actors)의 위치에 있었고, 자신의 능력 여하에 관계없이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은 광주항쟁의 비극적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최소한 도덕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진상규명위원회가 요구한 기밀문서의 공개
수집된 여러 증거들과 조사 결과를 종합해볼 때, 광주항쟁의 배경, 전개과정, 그리고그 비극적 종말과 관련된 총체적인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제기된 여러 미국 관련 의혹들이 분명하게 정리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4년 6월에 활동을 종료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법적인 한계 때문에 관련 의혹들을 제대로 검토하지 못하고 조사활동을 종결했다.
위원회는 관련 기밀문서의 공개를 미국 측에 수차례 요청했으나 큰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앞으로 이 의혹들은 반드시 국가 차원에서 재검토되어 새로운 공식 보고서가 작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 차원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미국의 책임 범위가 분명해진다면 우리 정부는 미국 정부에게 그 책임에 걸맞는 조치를 요구해야 한다. 이 작업을 위해서 우리 정부는 새롭게 출범하는 트럼프 행정부에 위원회가 이미 요구한 관련 기밀문서의 공개를 촉구해야 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