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와 군의 ‘탈정치화’

전두환 처벌 후 30년여만에 또 ‘내란’ 5.18 내란 가담 선배들 ‘약한 처벌’ 지켜봐 공수여단장등 29명 검찰 모두 불기소 ‘불철저한’ 단죄 안돼...예외없는 처벌을 명령 거부한 현장군인들 용기에는 “감사”

12.3내란사태를 주도한 김용현 국방부 장관(육사 38기, 왼쪽부터)을 필두로 박안수 전계엄사령관(46기), 곽종근 전 육군특수전사령관(47기)과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48기). 사진=연합뉴스
12.3내란사태를 주도한 김용현 국방부 장관(육사 38기, 왼쪽부터)을 필두로 박안수 전계엄사령관(46기), 곽종근 전 육군특수전사령관(47기)과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48기).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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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했던 군(軍)의 ‘탈정치화’

윤석열 씨가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한 12.3 내란사건은 한국민주주의 역사에 치욕적인 오점을 남겼다. 우리나라가 군부독재를 종식하고 민주체제로 이행한지 30년 이상이 흘렀는데 어떻게 이런 경악스러운 사태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 우두머리인 윤석열 씨를 “정상적” 인물로 간주하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이다.

12월 3일 밤에 우리 국민과 국회의 기민한 대처가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순식간에 40여 년 전의 상태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상계엄 선포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통과에 이르는 11일 동안 우리 국민들이 광장에서 보여준 민주주의에 대한 놀라운 열망은,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전세계에 증명한 참으로 감동적인 사건이다.

12.3내란은 군부독재 시절의 잘못된 유산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과오가 낳은 필연적인 정치적 결과이면서,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심화를 가져온 “군의 탈정치화”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재검토하게 만든 전례 없이 심각한 정치군사적 사건이다.

또 다시 내란에 동원된 군부

한국의 군부는 1993년 김영삼 정권의 하나회 해체와 1995-1997년의 5.18사건 재판을 통해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처벌되면서 탈정치화되었다고 평가되었다. 이번 사건은 이러한 관행적 평가에 매우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윤석열의 내란 계획 수립과 실행 과정에 군의 최상급 지휘부를 중심으로 상당 수준의 자발적 참여, 동조, 후원 그리고 묵인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곽종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은 12월 6일 민주당 김병주 의원과 최초 면담에서 계엄 발표를 “방송을 통해서 알았다”고 진술했고,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은 자신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계엄 선포 당일에 알았다고 진술했지만, 추가조사 과정에서 전부 거짓임이 드러났다.

앞으로 본격적인 수사를 통해서 밝혀지겠지만, 군의 상층 지휘부 인물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는 “나는 몰랐다”, 또는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다”라는 취지의 진술은 “실패한” 내란 참여자의 알리바이 조작과 거짓 변명일 개연성이 매우 높다. 그 정도 직위에 있는 사람과 기관이 사전에 모르는 상황에서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발동되는 비상계엄 조치가 제대로 실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내란의 범죄를 저질렀나

비상계엄은 입법을 제외한 행정, 사법 그리고 치안 등에 걸쳐서 국가의 주요 기능을 군이 대리 통제하는 극히 예외적 조치다. 따라서 선포 이전에 국가의 여러 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 군의 역량을 치밀하게 검토하여 실행에 옮기는 준비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비상계엄의 대상이 특정 지역이 아니고 전국에 걸쳐 있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우리나라의 과거 경험에서 보는 것처럼, 비상계엄이 내란 실행의 폭동적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비상계엄의 요건을 거짓으로 꾸미고 명분을 조작하는 군사적, 비군사적 조치가 비밀리에 선행되거나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방첩사령부, 정보사령부, 수도방위사령부, 특수전사령부는 말할 것 없고 국가정보원, 경찰, 검찰 등 공권력 집행기관과의 밀접한 협력이 당연히 전제된다.

이 과정에 참여하는 행위자들은 행위의 불법성을 이미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상급자 또는 최종 우두머리에 대한 충성과 특정 정치이념에 대한 비이성적 믿음, 그리고 이러한 불법 행위에 따르는 보상에 대한 기대욕구가 강력하게 작동해야 한다. 나아가 이러한 조치들은 계엄 선포 이전까지 철저하게 비밀로 지켜질 것이라는 믿음이 참여자들 사이에 공유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내란 행위는 광범한 기능과 영역에 걸쳐 있는 참여자들 간 정치적, 이념적, 정서적 신뢰에 기초한 사전 공모(conspiracy)가 필수적이다. 그래서 반란과 내란을 실행해서 반인도적 범죄를 자행하는 집단을 “연결범죄집단”(joint criminal enterpris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철저한 준비에 도상연습까지

민주당 김민석 의원의 지적대로 12.3내란은 오랫동안 준비되고 상당 수준의 도상연습을 거쳤다. 민주적 절차와 통치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국가 수반이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가장 강력한 폭력 수단을 구비한 군의 수뇌부와 수차례에 걸쳐 숙고하고 기획했다. 이 과정에서 내란 성공 이후에 도래하게 될 정치 체제에서 내란 참여자들이 담당할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도 협의가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

내란 세력들은 1972년 10월 16일 박정희의 비상계엄 조치와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신군부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철저하게 학습했다. 여러 진술과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윤석열과 그 추종세력이 기획하고 실행한 비상계엄 조치는 박근혜 탄핵 당시인 2017년 3월에 기무사령부가 작성한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과 흡사하다. 이 문건에 수록된 계엄 선포 후 수도권 주요 기관 점령 계획이나 지역별 계엄군 배치 계획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당시 계엄군 투입 계획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이번 사태는 군의 탈정치화가 완결되지 못한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정치학자 알프레드 스테판이 지적했듯이 이번 사태는 군 상층 지휘부 일부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신직업주의”(new professionalism) 신념과 이 신념에 터잡은 개인의 정치적 야망이 동시에 작용한 사건이다. 말하자면 민주국가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정치적 갈등과 경쟁을 국가안보의 위기로 판단하거나 또는 위장해서 군사적 개입을 당연시 하는 왜곡된 강령이 군 상층부 일부에 잔존하고 있다가 내란의 폭동 행위로 표출된 것이다.

처벌받지 않은 쿠데타 세력들

이러한 왜곡된 이념은 냉전 체제 하 박정희-전두환 군부독재를 거치면서 군 내부에서 엘리트 군인을 중심으로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학습되어 일종의 행위규범으로 자리잡았다. 이런 일탈적 행위규범이 하나회 해체와 전두환-노태우 신군부에 대한 재판 과정 이후 30년에 걸친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도 근절되지 않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나는 1995-1997년 5.18사건 수사와 재판의 불철저성에서 그 한 원인을 찾는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파견된 계엄군의 폭력과 발포로 수백 명이 죽고, 실종되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지만, 5.18 사건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인물은 전두환과 특전사령관 정호용 등 최상급 지휘부에 속한 5명에 불과했다.

검찰 수사 당시 유가족과 피해자 등은 현장에서 직접 내란 목적의 폭동 행위를 지휘하고 반인도적 민간인 살해에 가담한 공수특전여단 여단장과 대대장급 인물 29명을 고발하였으나 검찰은 단 한 명도 기소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정치적 배경이 있지만, 일단 법률적인 측면에서 상부의 명령을 이행한 하급 군인들에 대해서는 죄를 물을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한 탓이다.

기소에서 제외된 영관급 장교 상당수는 장성으로 승진하는 등 요직을 거쳤고 성공적인 군경력을 쌓았다. 예를 들어 5월 27일 광주재진입작전을 지휘한 20사단 62연대장 김동진은 육군참모총장을 지냈으며, 심지어 김영삼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1996-1998)을 역임했다. 광주에 파견된 제3공수여단 13대대장 변길남은 39사단장을, 13대대장 박종규는 56사단장을, 12대대장 김완배는 육군본부 정책위원을 지냈다.

90년대초 초급 장교였던 이들이 내란을 주도

이들은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로 이행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고급 장교로 복무하면서 군사독재 정권 시절의 정훈 이념을 계속 고집했고, 초급 엘리트 장교를 대상으로 자신들이 구국의 일념으로 실천했던 신직업주의적 소명을 주입시켰다. 이번 내란 사태에 관련된 군수뇌부 인물들은 대부분 90년대 초중반에 초급 장교 경력을 쌓으면서 이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박안수 계엄사령관(육사 46기), 여인형 방첩사령관(육사 48기), 곽종근 특전사령관(육사 47기), 이진우 수도방위사령관(육사 48기), 문상호 정보사령관(육사 50기) 등은 1990년에서 1994년 사이에 소위로 임관했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민주 체제로 이행한 1994년까지 특수전사령부, 수도방위사령부과 주요 보병사단에서는 민간인 시위 진압 목적의 “소요진압훈련”이 주기적으로 실시되었다. 이 훈련은 전두환 신군부가 80년대 초에 강도높게 실시한 민간인 시위진압 훈련인 “충정훈련”을 이름만 바꾼 것으로, 그 주요 진압대상은 국가안보를 저해한다고 판단되는 학생운동권, 노동조합, 농민운동단체, 그리고 재야 정치권이었다. 90년대 초 정치적 민주화를 경험한 당시의 초급 장교들은 이런 훈련과 학습을 통해서 민간인에 대한 군의 무력적 통제의 당위성을 체득하는 모순된 경험을 한 것이다.

이번 내란에 관련된 군수뇌부 인물들이 광주에서 학살에 참여하고도 처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행위를 애국심의 발로로 여기는 선배 장교들을 롤모델로 삼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인형 사령관이 취임하면서 방첩사령부에 전두환과 노태우의 초상화가 다시 걸렸다는 보도를 보면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볼 수는 없다. 최소한 이들은 12.3내란 행위에 관여해서 자신들이 감수해야 할 위험과 그 반대급부인 정치적 보상을 추정하는 과정에서 선배 장교들의 행적을 판단의 준거로 삼았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리고 여기에 자신들의 행위가 국가안보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명분이 더해졌을 것이다.

군을 어떻게 해야할까?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는 더 이상 불철저한 과거사 청산의 과오를 반복하면 안 된다. 이번에는 말 그대로 예외 없는 처벌이 이루어져야 하며, 사법정의가 엄존하고 있음을 반드시 보여줘야 한다. 사법정의의 엄격한 실현은 민주주의가 바로 서고 인권이 존중되고 사회정의를 제대로 실현한 여러 국가들이 예외 없이 취해온 조치들이다. 전후 독일, 프랑스,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군부독재 종식 후 포르투갈, 칠레, 우루과이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리고 이러한 사법정의의 실현을 기초로 군이 본연의 업무에서 일탈하지 않도록 제도적 개혁과 인적 청산을 즉각적이고 단호하게 단행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계엄법을 개정해서 계엄의 발동 요건을 강화해야 하고, 계엄을 빌미로 인권 유린이 발생하지 않도록 각종 법제도적 견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군부독재 시절에 군이 자행한 각종 인권유린 사건과 5.18 당시 군의 민간인 학살 등 군의 정치적 일탈 행위가 빚어낸 역사적 비극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서 군 내부의 자발적 각성을 유도해야 한다.

다행히 이번 사태에서 젊은 현장 군인들과 일부 중간급 장교들이 보여준 정의롭고 용기 있는 대응은 우리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최후 보루로서 군의 미래가 결코 어둡지 않음을 증명했다. 우리는 이들에게 아낌 없은 격려를 보내야 한다. 이들이 진짜 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진짜 군인이기 때문이다.

글쓴이

최용주 (전)5.18진상규명조사위 조사1과장

최용주 (전)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1과 과장은 전남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켄터키 대학에서 사회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쳤다. 공직을 은퇴한 후 5.18기념재단 연구위원을 지냈으며, (전)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1과 과장을 맡았다. 지금은 독립연구자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서로 <책장 덮기: 역사적 관점에서 본 이행기 정의>(진인진 2022), <5.18 푸른눈의 증인>(한림출판사 2020), <나의 이름은 임대운>(객, 2022) 등이 있다. 1958년 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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