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나웅배 부총리를 추모하며
“관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실력과 인품 서울시장 후보 양보한 일화...’조순에 부담’
요즘 1930년대 생의 부음을 자주 듣는다. 전두환 대통령(1931년생), 이경식 부총리(1933년생)에 이어 며칠 전에는 나웅배 부총리(1934년생)가 별세하셨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경식과 나웅배 두 사람은 1957년 한국은행에 함께 취직했다. <더 칼럼니스트>를 통해 고 이경식 부총리를 추모했으니, 고 나웅배님께도 똑같은 추모의 마음을 표하고자 한다.
대학 후배라는 것 말고는 필자가 나웅배님과 특별한 인연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고를 접했을 때 애잔한 마음이 드는 것은 그분의 인격에서 풍기는 여운 때문이다. 고인은 날카로운 직관력을 가졌으면서도 잔잔한 웃음으로 주변 사람들을 늘 편안하게 해 주셨다. 다른 사람을 부드럽게 설득하는 비범한 재주도 있으셨다.
1994년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합해져서 재정경제원이 탄생했다. 재경원 장관은 부총리 급이었다. 부총리 겸 장관이 관계기관 수장들만 모아놓고 출석만 불러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정도로 재정경제원의 포괄범위가 컸다. 그때 경제장관회의를 ‘녹실 회의’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5.16 군사정변 직후 경제기획원이 출범했을 때 회의실 바닥에 녹색 카펫이 깔린 데서 연유한다. 제2대 재경원 장관이었던 나웅배 부총리가 소집한 녹실 회의에는 한국은행 총재도 참석했고, 필자가 배석했다. 그때 나웅배 부총리는 뒷자리에 앉은 미관말직의 필자에게도 항상 웃으면서 안부를 묻고 어깨를 두드려주셨다. 까마득한 한국은행 후배라는 것을 안 뒤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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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은 고인을 “관운 좋은 사람”으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해태제과와 한국타이어 등 민간기업의 CEO 경험도 있다. 회사를 상당히 잘 이끌어서 이익이 적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교수와 아주대 총장 등 학계 이력도 만만치 않다. 거기 더하여 4선의 국회의원이기도 했다. 가히 입을 다물 수 없는, 화려한 경력이다.
그 휘황찬란한 경력의 시작은 한국은행 수석 합격이었다. 이미 고등학교와 대학교도 수석으로 졸업했으니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년 10명 정도만 뽑던 신입직원 수를 그해에는 40명으로 늘렸다. 출중한 동기생들이 큰 세력을 이루면서 서로를 이끌어줬다. 그것은 수석 합격 이상의 든든한 재산이 되었다. 육군사관학교로 치자면, 육사 11기생에 비할 수 있다.
1957년 한국은행 신입직원들은 진짜 행운아들이었다. 그 행운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구한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한국전쟁이 끝나던 1953년에 대학에 입학해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았다. 전쟁 중에는 고등학생이라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선배들이 누리지 못했던 천운이었다. 일본에서는 1926~1934년에 태어난 사람들을 ‘쇼와 히토케타(昭和一桁)’라고 부른다. 쇼와 한 자리 해에 태어나 학창시절 태평양전쟁에 투입되었던, 불행한 세대를 말한다. 일본 사회에서는 쇼와 히토케타 중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 극히 드물다.

우리나라의 동세대는 해방 후 한국전쟁까지 겪었다. 그러므로 제대로 배우기는커녕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 세대를 바로 잇는 1957년 한국은행 신입직원들에게는 경쟁자가 있을리 만무했다. 게다가 취직한 직후 5.16 군사정변이 터지고, 고도성장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실력을 뽐내며, 승승장구했다. 나웅배 부총리는 그들 중에서도 선두였다.
물론 고인이 행운만으로 성공한 것은 아니다. 고인이 한국은행에서 근무한 지 3년 되던 때 4.19혁명이 터지고, 이듬해에는 5.16 쿠데타가 벌어졌다. 2년 사이에 한국은행 총재가 4명이나 경질되었다. 고인은 그런 혼란스런 사태에 염증을 느끼고 진로를 바꿨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를 거쳐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경영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뒤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가 배운 것을 실천하려고 경영인이 되었다.
상당기간 재계에 머물던 나웅배 사장이 제5공화국이 시작되자 정계의 부름을 받아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어서 관계로 진출하여 재무부, 상공부, 경제기획원, 통일원, 재정경제원의 장을 두루 걸쳤다. 지금까지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경제기획원 장관은 명예롭고(honorable), 재무장관은 힘이 있고(powerful), 상공장관은 화려하다(colorful)”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거기에는 재미난 일화가 있다.
1986년 상공장관에 임명되자 금성사(그때는 LG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 삼성전자, 대우전자 등 가전사 직원들이 앞 다투어 신임장관의 집에 들이닥쳤다. 다짜고짜 집안의 모든 전자제품을 거둬내고 자기 회사 물건으로 바꾸면서 “오늘부터 우리 물건을 쓰시라”는 부탁을 남기고 사라졌다. 오늘날에는 김영란법 위반이 될 텐데, 그때는 명사 마케팅으로 간주되던 관행이었다. 퇴근한 나웅배 장관은 집안에 들어서자 “가전3사 새 물건들 때문에 집안이 칼러풀하군”하고 웃었다. 거기서 “상공장관은 화려하다”는 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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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지자체 선거가 치러졌다. 35년만의 일이었다. 그때 나웅배 부총리가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로 손꼽혔다. 최종 순간 정원식 전 국무총리로 결정된 것은 김영삼 대통령의 뜻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3당 합당을 계기로 김영삼 민자당 대표가 정원식 문교장관의 교체를 요구했던 데 대한 미안함이 이유였다고 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아니다. 이미 선거를 여러 번 치러 본 나웅배 부총리 자신이 별 의사가 없었다.
1993년 영국에서 돌아온 김대중 전 대표가 조순 전 부총리를 민주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영입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서울시 행정이 복마전이라는 오명을 의식하고 경제전문가를 고른 것이다. 그러자 나웅배 부총리가 무척 난감해했다. 여러 모로 선배인 조순 부총리와 선거에서 붙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탓이다. “자네는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나?” 어느 날 경제장관회의가 시작되기 전 나웅배 부총리가 필자에게 물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조순 교수님이 케인즈를 소개하면서 강조하신 것이 있습니다. 케인즈의 어머니인 플로렌스는 아들에게 ‘훌륭한 경제학자는 시장 정도는 맡을 행정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고, 스스로 켐브리지 시장에 당선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조순 선생님이 쓰신 「케인즈 평전」에도 그 점이 유난히 강조되고 있습니다. 저는 조순 부총리께서 틀림없이 출마한다고 봅니다.”
필자는 나웅배 부총리가 필자에게 묻는 이유를 알았고, 나웅배 부총리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빙그레 웃었다. 한 달 뒤 민자당은 정원식 전 국무총리를 서울시장 후보라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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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고 나웅배 부총리에 대해 필자가 기억하는 전부다. 1934년생인 고인은 쇼와 히토케타 세대다. 일본의 그 세대들은 기록을 잘 한다. 회고록과 비망록이 차고 넘친다. 전쟁의 불행을 후대가 기억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우리나라도 1920년대 생까지는 회고록이 비교적 많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교육을 받은 영향이다.
그런데 1930년대 생에 이르러서는 회고록이 뚝 끊긴다.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필화(筆禍) 사건을 여러 번 목격한 탓이리라. 경이로운 경력을 가진 고 나웅배 부총리도 이렇다 할 회고록을 남기지 않았다. 무척 유감스런 일이다.
미국의 경우 글을 쓰지 않더라고 녹음을 통해 기록을 남긴다. 연방 정부 공무원들이 과거 고위관료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하고, 그것을 국가기록물로 관리한다. 이를 구술 회고 면담(oral history interview)라고 한다. 사후에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미국의 힘은 과거의 경험에서 지혜를 얻는 것을 제도화하는 데서 나올 지도 모른다. 고 나웅배 부총리를 추모하면서 필자가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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