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경식 부총리의 영전 앞에서

“나는 촌놈”...허세부림 없는 소박한 성품 IMF사태에 자책..낙향후 속죄 생활 하늘나라에서 ‘촌놈’으로 평안하시길

향년 88세의 나이로 별세한 고 이경식 한은총재. 사진=연합뉴스
향년 88세의 나이로 별세한 고 이경식 한은총재. 사진=연합뉴스

먹먹하다.

그 분의 부고를 접하는 순간, 바로 전날 머릿속을 스쳤던 생각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직감했다. 전날 서울 망원동의 최규하 대통령 자택 부근에서 점심식사를 하면서 옛날 그 집을 함께 드나들던 고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님을 떠올렸다. 1979년 12.12사태 당시 경제수석비서관이었던 고인은 한은 총재가 된 이후에도 최규하 전 대통령께 자주 문안을 드렸다. 그때마다 필자가 고인의 비서로 동행했다. 퇴임한 대통령과 비서, 그리고 그 비서의 비서가 소박한 응접실에서 차를 마셨다.

고인과 필자의 인연은 1995년 8월 24일 시작되었다. 장맛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던 날이다. 그날 고인은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비오는 출근길에 혼자서 택시를 타고 청와대로 가서 한은 총재 임명장을 받았다. 당시 한은 총재는 공석이었고, 고인은 금융실명제를 성공시킨 경제부총리답게 철저하게 인사보안을 지키셨다.

고인은 청와대를 나온 뒤에야 한국은행에게 차가 필요하다고 알리셨다. 필자는 놀란 마음에 달려가 상견례와 함께 업무보고를 드렸다. 오전 10시 조선호텔에서 처음 뵌 고인은 격의 없고 온화한 표정이셨다. 고인과 얽힌 일화는 끝없이 늘어놓을 수 있지만, 그 중에서 특별히 두 가지만 기록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고인의 소박한 성품이다. 고 이경식 총재는 어떤 사람한테도 허세를 부리거나 가식을 피우지 않으셨다. “체험! 삶의 현장”이라는 KBS 프로그램의 초창기에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 사회지도층 인사가 하루 종일 막노동을 하면서 노동의 가치를 발견하고, 거기서 받은 품삯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내용이다.

점잔빼는 사람들은 손사래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고인은 그 취지를 들은 뒤 선뜻 출연을 수락하고 부둣가 잡역부로 땀을 흘리셨다. 콧노래를 부르며 그 일을 얼마나 유쾌하고 재미나게 하셨던지 함께 출연한 코미디언 이경실 씨가 “진짜 한은 총재 맞으세요? 코미디언보다 더 웃기시네”라고 할 정도였다. 평생 “나는 촌놈이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삶의 철학이 묻은 에피소드다.

두 번째는 고인의 고통이다. 한은 총재로서 외환보유액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 속에서 고인은 IMF 사태 직후 연락을 끊고 낙향하셨다. 아주 가끔 서울에 올라오셔서 햇볕에 탄 얼굴을 보여주셨는데, 그때마다 그분의 속마음을 보는 것 같아서 애잔했다. 고인은 아마 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차마 볼 수 없으셨을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고인은 경제부총리까지 오르셨지만, 공무원으로서는 주류가 아니었다. 1957년 한국은행 조사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거기서 김정렴 차장(훗날 대통령비서실장, 상공장관)을 만났다. 그리고 김 차장의 권유로 몇 년 뒤 경제기획원 경제정책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용한 분위기의 한은보다는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정부가 적성에 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창락(한은 총재), 강경식(경제부총리), 진념(부총리) 같은 행정고시 출신의 쟁쟁한 선후배들이 터를 잡고 있어서 뿌리를 내리는 데 힘들었다.

그때 강경식 씨와는 일종의 신사협정 같은 것이 맺어졌다. 두 사람의 경식, 그러니까 강경식(서울대 법대, 행시)은 기획원 내 주류의 대표이고, 고인인 이경식(고려대 상대, 非행시)은 비주류의 대표로서 상대방을 서로 존중하며 일체 비판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관계는 IMF 직전 각자 경제부총리와 한은 총재로 일할 때까지 이어졌다.

강경식 부총리가 지휘하는 정부가 환율방어를 위해서 외환보유액을 풀 때 한은 총재였던 고인이 크게 저항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런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돌아보건대 고인이 한은 총재로 임명된 것은, 1957년 한은에 함께 입행했던 김명호 총재가 3억 원의 화폐도난 사건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인은 훨씬 많은 수백억 달러의 외환보유액 소진을 막지 못했으니 마음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고인이 생전에 필자에게 그 말을 여러 번 하셨고, 아마 그 뜻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돌아가시기 전날 필자의 뇌리를 잠깐 다녀가신 것 같다.

고인은 경제부총리, 한은 총재, 가스공사 사장, 대우자동차 사장 등 화려한 자리를 거치셨으나 항상 자신을 낮추셨다. 1957년 한국은행 입행 동기인 나웅배(훗날 부총리, 국회의원), 김명호(한은 총재), 이상근(한미은행장), 신철규(현대종합상사 사장, 신현송 BIS 수석이코노미스트의 부친) 등 특출한 인물들 앞에서 뻐기는 일이 없었다. “나는 촌놈이다”는 생각으로 한결 같이 행동하셨다.

1996년 가을 IMF 연차총회 참석을 위해서 워싱턴을 들리신 고인은 필라델피아에서 공부하고 있던 필자를 부르셨다. 헤어질 때 200달러가 들어있는 봉투를 주시면서 “촌놈은 워싱턴에서 출장비 쓸 일이 없어” 하고 웃으셨다. 하늘나라는 외환위기가 없으니 ‘촌놈’에게 평안한 곳이리라.

글쓴이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은 한국은행에서 36년째 근무하고 있는 금융전문가다. 한국은행 조사부, 자금부, 금융시장국 등 정책관련 부서를 거쳤고 워싱턴사무소장, 인재개발원장, 금융결제국장, 부산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대통령비서실과 미주개발은행(IDB) 등에서도 근무했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 '숫자 없는 경제학', '금융오디세이', '중앙은행 별곡', '법으로 본 한국은행'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한 금융 에세이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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