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나라에는 고비용 저효율의 문제가 없을까

‘한국의 케인즈’, 경제학 스타교수 원조 경제부총리, 한은총재, 서울시장 거쳐 ‘고비용 저효율’ 한국경제 문제 지목 창조적 파괴와 혁신을 강조한 원로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2022년 6월 23일 별세했다. 향년 94세. 조 전 부총리는 서울아산병원에서 노환으로 치료를 받던 중 타계했다. 사진=연합뉴스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2022년 6월 23일 별세했다. 향년 94세. 조 전 부총리는 서울아산병원에서 노환으로 치료를 받던 중 타계했다. 사진=연합뉴스

조순 부총리의 부음을 듣는 순간 책장을 향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있는 그 분의 저서 『J.M. 케인즈(비봉출판사 1982년}』을 펼쳤다. 그 분이 쓰신 수 많은 저서 가운데 내가 가장 아끼는 책이다. 일부 언론의 부고 기사에도 고인을 ‘한국의 케인즈’라고 소개했다. 고인에게서 배운 후학들은 그 분께서 얼마나 케인즈를 추앙하고 닮으려고 했는지 잘 안다. 학문적 업적 뿐만 아니라 사회 활동에서도 케인즈의 행적을 좇아가보려고 노력하셨다. 예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 관직을 맡고 정치판에 뛰어든 것도 “훌륭한 경제학자라면 경세가로서도 성공해야 한다”는 어머니 플로렌스의 말에 따라 케인즈가 걸었던 길을 의식한 것이라고 보인다.

고인이 우리나라에 케인즈를 제일 먼저 소개한 것은 아니다. 고인이 미국에서 돌아와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자리를 잡은 것은 1968년이지만 그 전인 1955년 같은 대학교의 김두희 교수가 이미 『일반이론』을 번역하여 알렸다. 1962년에는 연세대학교의 최호진 교수가 케인즈 이론에 입각한 『현대경제학』을 발표했다. 1966년 성균관대학교의 이형순 교수도 『국민소득론』을 발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인즈를 논할 때 고인을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그 유명한 『경제학원론』 때문이다. 1974년에 발간된 그 책은 유려한 문장력과 명료한 논리 전개 때문에 혼자서 읽더라도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 이전의 경제학 책들은 설명이 피상적이라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웠던 것과 대비되었다. 때 마침 불어온 고시 열풍과 맞물려서 『경제학원론』은 판·검사, 행정관료, 외교관을 지망하는 대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교과서 뿐만이 아니었다. 문제풀이나 암기 위주로 진행되던 다른 강의에 비해서 고인의 강의는 중간중간 수 많은 일화와 사례, 비유가 등장하여 학생들을 매료시켰다. 그 분의 강의는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폭발이었다(외부 활동이 많아서 결강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것이 미안해서 학생들에게 학점도 비교적 후하게 주셨다).

서강학파와 조순 사단

기이한 일은, 고인이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의 케인즈’였지만, ‘한국의 케인즈들’은 고인이 몸 담았던 서울대학교의 동료와 제자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케인즈주의에 입각한 경제정책을 주도한 것은 남덕우 부총리를 필두로 한 서강학파다. 남덕우- 이승윤- 김만제로 이어지는 서강학파 인맥이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근 30년간 우리나라 거시경제정책의 큰 흐름을 이어왔다. 이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필자는 남덕우(1924년생)와 조순(1928년생)의 기질, 서강대학교와 서울대학교의 학풍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남덕우 선생은 집안이 어려워서 어릴 때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일하다가 해공 신익희 선생의 권유로 국민대학교에서 늦깎이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은행에서 실무를 익혔다. 남덕우 선생의 강한 현실참여 의욕은 그런 바탕에서 형성되었다고 보인다. 나중에 합류한 서강대학교에는 특별한 학맥이나 선배 교수가 없어서 남덕우 교수가 자기 뜻을 펼치기에도 좋았다. 1970년 박근혜 학생이 입학할 무렵에는 서강대학교에서 가장 유명하고 존경받는 교수가 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조순 선생의 초년 시절은 순탄했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화려한 학력을 쌓고 일찌감치 육사에서 교편을 잡았다. 하지만 학문욕을 채울 수 없어서 뒤늦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남덕우는 30세에 교수가 되었는데, 조순은 같은 나이에 유학생이 된 것이다. 미국 버클리 대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자리를 잡으면서 현실에 참여할 기회는 없는 듯 했다.

경성고등상업학교에서 출발한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은 해방 전까지 일본인 교수들 뿐이었다. 1950년대까지는 그들이 남기고 간 자급자족론, 마르크스 이론 등을 가르쳤다.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덕분에 일제강점기에도 한국인 교수들이 많았고 근대 경제학을 전파하던 연희전문학교와 판이했다(우리나라 근대경제학의 출발지는 연세대학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근대경제학(연세대학교 상경대학 백년사, 김학은 지음, 2015년)』을 참고하라. 필자도 발간에 일부 기여했다).

그런데 5.16 쿠데타 이후 서울대 교수들이 거의 전원 물갈이 되었다(서울대 교수는 문교부 소속 공무원이었다). 이후 새로 투입된 교수들도 근대 경제학 이론을 배운 것은 아니었다. 교직을 평생 직업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박희범(문교부 차관, 충남대 총장)과 박동묘(농림부장관, 국회의원, 성균관대 총장)교수처럼 관직을 거쳐 기관장이 되거나 이승윤(훗날 서강대 교수, 재무장관, 국회의원)교수처럼 다른 대학으로 옮겼다. 서울대학교 안에서는 비슷한 연배의 조순과 변형윤 그리고 이현재(훗날 서울대 총장, 국무총리)교수 세 사람이 스스로 기둥이 되었다.

일찌감치 서울대학교에서 강사생활을 시작한 변형윤, 이현재 교수가 제자양성 면에서는 더 확고한 위치에 있었지만, 변형윤 교수는 관직에는 뜻이 없었다. 이현재 교수는 강의보다 학교행정에 투입되었다. 결과적으로 서강학파에 대비되는 서울학파는 출현하지 못했다. 반면 관계로 떠난 서강학파가 학교 안에는 후학을 남기지 못하여 학문적으로는 불임으로 끝났다.

조순 전부총리(왼쪽)와 그의 제자 정운찬 전총리. 사진=연합뉴스
조순 전부총리(왼쪽)와 그의 제자 정운찬 전총리. 사진=연합뉴스

조순 부총리, 조순 총재, 조순 시장

1981년 조순 교수가 학술원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때부터는 케인즈 이론의 전문가를 넘어 우리나라 경제학계의 간판으로 자리를 잡았다. 매년 가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면 관련 이론과 수상자에 관해 무게감 있는 촌평을 하는 것도 조순 교수의 몫이었다.

1988년 노벨경제학상은 비교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의 모리스 알레 교수에게 돌아갔다. 마침 서울올림픽이 개최되던 때라서 자부심이 넘쳐났던 우리나라 국민들은 “우리나라에서는 도대체 언제쯤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나?”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경제학에 대해서는 더 가혹하게 물었다. “미국에서 공부한 경제학자들은 많은데 왜 노벨경제학상을 못 받나?”하는 도발적 질문을 미국 유학파 조순 교수에게 물었다. 그러자 “모범적인 경제에서 모범적인 이론이 나온다. 경제구조가 왜곡되고 경제정책이 교과서에서 벗어나 있는데 어찌 좋은 이론가가 나오기를 바라느냐?”는 식으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강원도 출신다운 무뚝뚝한 그 답변은, 서강학파와 관료들이 이끌어 왔던 경제정책 전반에 대한 신선한 문제제기였다. 때마침 5공 청문회가 시작되어 전국이 뜨겁게 달아오르자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 열 달 만에 국면 전환을 위해서 개각을 구상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금융실명제 실행을 철썩같이 약속했었으므로 이를 보증할 수 있는 상징적이고 참신한 인물이 필요했다. 육사 생도시절 스승이었던 조순 교수가 최적임자였다. 그렇게 맡게 된 경제부총리가 고인의 첫 번째 공직이었다. 하지만 1년여뒤 3당 합당과 함께 금융실명제 공약이 파기되면서 경 제부총리 직에서 물러났다. 그것이 미안했던지, 노태우 대통령은 고인에게 다시 한국은행 총재 직을 맡겼지만 그것도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임명한 박재윤 경제수석비서관(훗날 통상산업부 장관, 부산대 총장)이 서울대학교 대선배 교수이신 조순 총재를 거북하게 생각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물론 한은 총재 중도 하차의 배경에는 공식 버전이 따로 있다 김영삼 대통령의 진노설이다. 1992년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가 “한국은행이 민자당 김영삼 후보에게 3천억원을 지원했다”고 주장하자 조순 총재가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하지만 선거 직후 정주영 후보가 그 발언을 사과했고, 그에 따라 조순 총재도 고소를 취하했다. 두 사람 모두 강원도 출신이다. 보름 뒤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은행의 그 ‘아마추어적 정치감각’에 화를 냈다. 야당을 길들일 좋은 카드를 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공직에서 물러난 고인은 잠시 쉬다가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다. 그리고 1995년 서울시장에 당선되어 첫 임무로 삼풍백화점 사고를 지휘했다. 그러나 김대중 총재와는 결이 많이 달라서 6개월만에 탈당하고 독자 노선을 걸었다. 이후 민주당- 한나라당- 민주국민당을 전전하며 정치적 풍파를 겪었다.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다. 송충이가 솔밭을 벗어났던 그 민망한 이야기는 더 하지 않겠다.

조순 총재와의 인연

고인은 필자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평생 길러낸 수 많은 제자 중 하나일 뿐이다. 강의를 제외하면, 그분과의 인연은 한은 총재로 계실 때 잠깐 모신 것이 전부다. 1992년 3월 필자는 5급 행원이었다. 입행한 지 7년 째 되는 고참 행원이라서, 한은내 서울대학교 동문회(한양회, 韓洋會) 총무를 맡고 있었다. 동문회 규정에 따르면 최연장자 또는 최고위직이 회장이 되어야 한다. 선배가 짊어져야 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였다. 하지만 총재가 동문회 회장인 경우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김준성 한은총재의 경우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민 끝에 총재실을 찾아갔다.

“총재님, 직원의 30%가 총재님 제자들입니다. 대학 동창들끼리 사무실 밖에 모여서 총재이자 스승을 회장으로 모시는 것은 적절치 않으니 차라리 한양회를 해산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랬더니 신임 조순 총재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해 주면, 나야 고맙지요”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30년 전통의 한양회가 해산되었다. 하나회 해산에 비할 일은 아니었지만 유난히 동질성이 강조되던 한은 조직문화를 바꾸는 계기였음은 틀림없다.

3년 뒤 조순 서울시장이 필자에게 연락을 해 왔다. 서울시는 복마전이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과연 정치권과 업자의 청탁이 끊이지 않았다. 다음 선거를 항상 의식하는 직업 정치인이 아니라 학자 출신이었으므로 물밑 거래와 타협이 체질에 맞지 않았다. 조순 시장은 남들에게 전화 받는 것조차 힘들어하면서 피난처를 찾았다. 서울 시장 관용차는 시내 어디에 있건 경찰을 통해서 소재가 금방 파악된다. 그래서 보안이 확실한 한국은행 주차장에 차를 숨기고 조용히 사색하기를 원하셨다(서울 시청과 한국은행은 도보로 5분거리다). 비서실에 근무하던 필자가 비밀 사무실과 주차공간을 마련해 드렸다.

고인이 한은에 재직하셨던 기간은 350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은 직원들에게 큰 자부심을 불어넣어 주었다. 경제부총리 출신의 대학자가 한은 총재에 취임하자 안팎에서 한은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김유택, 유창순, 신병현, 김준성의 경우 한은 총재 뒤에 부총리가 되었다). 그래서 그 분이 취임한 직후 입행한 사람들 중에는 똑똑한 친구들이 참 많았다.

필자가 학교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한은 총재실에서 보고할 때는 고인을 크게 기쁘게 해 드린 일이 있다. 1992년 여름 쯤 조사국장을 쫓아서 결재를 받는데 조순 총재님의 눈길이 보고서 한쪽에서 오래 머물었다. “한국 경제의 문제는 고비용 저효율”이라는 문장이었다. 총재께서는 무릎을 탁 치시면서 “바로 이거야! 내가 지금부터 이 말을 쓰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해도 괜찮겠습니까?”라며 기분 좋게 물으 셨다. ‘고비용 저효율’이라는 말은 지금도 회자된다. 출처불명의 그 말이 Made in BOK(한국은행)임은 현장에 있었던 필자가 보증한다.

고인이 한은 총재로 근무할 때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1992년 투신 3사에 대한 특별융자였다. 1989년 소위 ‘12.12 조치’를 통해 정부가 3 투신사를 통해서 대대적으로 주식을 매입하여 증시를 부양하려고 했다가 실패한 데 따른 뒷수습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노태우 정부의 실책이었고 선거를 앞둔 여당의 큰 악재였다.

그때 정부가 한은의 특별융자를 요구하자, 조순 총재는 국회의 지급보증 동의를 요구했다. 행정부를 향한 완곡한 질책이었다. 만일 대통령의 은사가 아니었다면 총재가 경질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2조 9천억원이 간절했던 집권 여당은 한은 총재의 ‘몽니’에 굴복했다. 국회의 지급보증 이후 한은은 정부에 협조했지만, 한은 직원들은 기분이 좋았다. 최종대부자 역할을 그토록 큰소리 치면서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기쁨을 조순 총재가 직원들에게 선물했다.

정치가로서 조순은 좌절과 굴곡이 많았지만 학자와 행정가로서 조순은 소신이 강했고 복도 많은 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타계를 애도하며 뜻을 기린다. 그분이 아쉬운 것이 있다면 노벨경제학상을 타는 후학을 보지 못한 것일까?

고인이 필자에게 주신 가르침 중에서 “잘난 척 하는 실무가들도 사실은 이미 죽은 어느 경제학자의 노예다”라는 케인즈의 말이 생각난다. 무작정 옛날 이론과 사상을 답습하지 말고,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다. 오늘 다시 펴든 『J.M. 케인즈』 라는 책에서 유난히 혁명과 혁신이라는 단어가 많음을 발견한다. 고인은 케인즈 정도의 사상혁명까지는 몰라도, ‘고비용 저효율’을 극복하는 행정가이자 창조적 파괴자를 꿈꾸었음을 느낀다. 이제 비용도 없고 효율도 없는 세계로 가셨으니 경제학자의 짐을 덜고 그분의 호 소천(小泉)처럼 작은 샘에서 편히 쉬시기를 기도한다.

글쓴이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은 한국은행에서 36년째 근무하고 있는 금융전문가다. 한국은행 조사부, 자금부, 금융시장국 등 정책관련 부서를 거쳤고 워싱턴사무소장, 인재개발원장, 금융결제국장, 부산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대통령비서실과 미주개발은행(IDB) 등에서도 근무했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 '숫자 없는 경제학', '금융오디세이', '중앙은행 별곡', '법으로 본 한국은행'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한 금융 에세이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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