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옥희 교육감을 추모하며...’그때 그 신부’
[8일 별세한 노옥희 울산 교육감 이야기] 현대공고 수학선생님이었던 노옥희 교사 손목 잘린 학생 도우려다 노동법 공부시작 노동운동하던 예비신랑 각목폭행 당하기도
매해 3월 초 우리 동아리는 항상 바빴다. 호기심으로 문을 두드리든 작심하고 찾아오든 동아리방을 찾는 신입생들이 드글거렸고 그들에게 술과 밥 사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신입생 환영 공연을 연중행사로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으로 후배를 맞았던 1989년 3월도 다르지 않았다. 노래 연습하고 멘트 준비하고 대본 준비팀은 날밤을 몇 번이나 까면서 공연을 만들어 갔다.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순서가 슬라이드였다.
2022년에 이르러 ‘슬라이드’를 논하매 어언 박물관 품목에서나 찾을 듯한 물건이 돼 버렸지만 당시로서는 관객들에게 ‘시각 효과’를 싸게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매체였다. 필요한 사진을 슬라이드 필름으로 찍어 슬라이드를 만들고 노래 가사에 맞춰 그림만 바꾸는, 실로 원시적인 도구였지만 노래와 버무려지면 의외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1989년 봄 공연에서는 이 슬라이드로 약간의 논쟁이 있었다. 그 해 겨울과 봄 울산에서 있었던 무시무시한 사건들의 사진을 쓰느냐 마느냐 의견이 갈렸던 것이다.
1989년 1월 울산의 석남산장에서 MT를 즐기던 노조 관계자들이 괴한들의 습격을 받는다. 각목으로 무장한 괴한들은 한창 흐드러지게 술에 취하던 노조원들을 잔인하게 두들겨 팼다. 등짝에 피멍이 든 모습들이 선연했다. 같은 날 다른 곳에서도 습격이 있었다. 그 한 달 뒤 2월 21일에는 파업 중이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식칼 테러 공격을 받는다. 옆구리에 식칼 자국이 끔찍하게 난 사진 역시 우리 손에 들어왔다.
누군가 너무 끔찍하다고 슬라이드에서 빼자는 얘기를 했지만 압도적으로 밀렸다. 저 잔악한 놈들의 만행을 널리 알려야 한다! 백무산의 <만국의 노동자여>가 카랑카랑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온몸에 피멍이 든 노동자의 모습과 옆구리에 난 식칼 자국은 관객들의 눈길을 빼앗아 버렸다. 무대에서도 사람들이 흥분하는 게 보였다. 실로 야만의 시대였다. 노조 활동한다고 회사에서 깡패 사서 식칼로 옆구리에 바람 구멍을 낼 수 있었던, 수틀리면 경찰 비호 아래 매타작을 할 수 있었던 나라.
그 중 ‘석남산장 각목테러 사건’ 현장에 있었던 한 노동자는 각목으로 엄청나게 두들겨 맞아 운신을 못할 지경이 됐다. 사람은 몽둥이 앞에서는 정면을 보호하느라 새우처럼 몸을 굽히고 엎드리게 마련. 그 등과 허리를 향해 인정사정없는 각목들이 내리꽂혔다.
눈에서 별이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북망산 산줄기가 어른거리는 공포를 실감했을 것이다. 각목 찜질이 끝난 뒤 청년은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는 서울대 사범대 출신의 학출 노동자였다. 데모하다가 교사 임용 꿈을 접은 뒤 울산에 내려와 공장에 취업을 했다가 학력 위조가 드러나 해고된 상태였다. 어쩌면 우리가 썼던 슬라이드의 피멍든 등짝이 그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참으로 안된 것은 그가 결혼을 며칠 앞둔 예비 새신랑이었다는 것이다. 이즈음 남자에게 허리란 몸무게만큼의 황금보다도 소중한 것 아니겠는가. 괴한들도 그걸 알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는 그에게 이렇게 외치며 각목질을 퍼부었다고 한다. “결혼식에 나타나면 재미없어!” (한겨레신문 1989.1.17.)

아무리 나쁜 놈들에게 고용돼 더러운 짓을 한다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괴한들의 심술은 도를 넘었다. 결혼이고 뭐고 허리가 부러지지 않았으면 다행이었다.
괴한들은 나동그라진 사람들을 내버려 둔 채 산장의 전화선은 물론 공중전화선까지 끊어 놓았다. 사람들은 한참을 신음하고서야 병원에 갈 수 있었고, 예비 새신랑은 전치 4주 진단을 받는다. 연락을 받고 예비 새신부가 달려왔다. 참혹한 모습에 말문이 막힐 뿐이었지만 그들은 결혼식을 연기하지 않기로 한다. 사람들에게 다 알렸으니 휠체어를 타고라도 결혼식을 올리자는 결의였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신랑도 몸을 일으켜 대단한 신랑 입장을 해 낸다. 구식 결혼식의 식순인 ‘큰절’을 못한 건 결국 허리의 부상 탓이었지만.
이 신랑 신부는 결혼식 후 바로 노동자 대회에 달려가 사람들의 축하를 받는다. 그때 노동자들이 부른 노래는 <동지가>였다.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도 부딪쳐 오는 거센 억압에도 우리는 반드시 모이었다. 마주보았다...” 허리 부여잡고 얼굴 찡그린 신랑만큼이나 신부에게도 사무치는 노래였을 것이다.
원래 그녀는 이른바 운동권도 아니었다. 얌전히 부산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하고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조신한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부임한 게 울산의 현대공고였던 게 탈이었다.
학생 중 하나가 실습을 나갔다가 손목이 잘려나가는 산업재해를 당한다. 수학 선생님은 부모도 없이 불우하게 살다가 사고를 당한 이 학생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평생 장애를 안고 살게 된 학생에게 제대로 된 보상도 이뤄지지 않는 현실에 분노한다. 이게 말이 되는가! 현대공고 수학선생님은 ‘해법 수학’과 ‘수학의 정석’ 대신 노동법과 산업재해법, 그리고 근로기준법 등 평소에는 근처도 가지 않았던 책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증언.
“어느 추운 겨울 밤늦은 시각에, 그 졸업생이 비에 흠뻑 젖은 채로 당시 학교 사택에서 자취하고 있던 나를 찾아왔다. 술이 많이 취해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태라 도저히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학교 사택에서 결혼도 안 한 여교사가 졸업한 제자를 재워 주다 무슨 소문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잠시 망설였지만 방에 들어오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 윗목에다 이불을 깔아 재웠지만, 어린 나이에 부모도 없고 손목까지 잘렸으니 그 절망이 얼마나 클까 생각하면서 정작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오마이뉴스 2017.1.22.)

이후 그녀는 ‘의식화된 교사’가 돼 학교에서 잘리고, 노동운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 와중에 연인을 만났는데 그가 서울대학교 출신의 학출이라는 것도 몰랐다고 한다. 그저 믿음직하고 동지로서 함께 할만한 남자라는 것 뿐. 그렇게 맺어진 두 사람이 결혼식 올리기 1주일 전 남편은 사정을 뻔히 아는 누군가에게 찍혀서 두들겨 맞아 곤죽이 됐던 것이다.
하지만 둘은 힘겹게 서로를 맞잡고 일어서서 결혼을 선포하고 자신의 ‘동지’들에게 축하를 받는다. 1989년 1월 15일 새신부가 된 전직 교사의 이름은 노옥희. 오늘 여러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하며 세상을 떠나신 울산 교육감이다.
어떻게든 결혼식을 올리자며 강단을 세웠던, 신혼여행 대신 병실로 돌아간 남편을 부축하며 창문 밖으로 동지들의 집회를 지켜보게 했던 교육노동자 노옥희는 술에 취한 채 자신의 사택을 찾아 울다가 잠든 소년의 얼굴을 평생 잊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끔찍한 폭력과 재해의 희생자가 된 이들을 위해, 그리고 교육 현장에서 상처받고 소외된 학생들을 위해, 그리고 행복한 학교를 위해 그 일생을 벽돌처럼 쌓아올린다.
한 번도 보수 세력이 놓친 적이 없는 울산 교육감에 당선된 것은 평생 오른쪽 후보만 찍어온 사람들도 인정했던 그녀의 성실함과 노력 덕이었다고 들었다. 갑자기 이 분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온 담벼락이 조용하지 않고 그 이름을 부르며 애도하는 걸 보며 그 명성이 헛되지 않았음을 절감한다.
1989년 봄, 나는 노동자 각목 테러 사건 때 엄청나게 두들겨 맞은 노동자가 결혼식을 올렸고 그들이 집회에 참석해 축하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었고 한겨레 신문 한 귀퉁이에서도 기사를 읽고 혀를 찼던 기억이 난다. 인생 최고의 순간을 최악으로 만든 나쁜 놈들, ‘정주영이 악질 자본가’를 잘근잘근 씹기도 했었다.
그날의 새신부가 세상을 떠난 오늘, 새삼 처연한 마음으로 그녀의 살아온 삶을 그려 본다. 힘겨웠지만 보람 넘쳤으리라. 안타깝지만 그래서 아름다웠으리라. 자신의 행복에 앞서 남의 아픔을 챙긴 이들에게 복이 있으라. 천국이 그대들의 터전이리라.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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