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선생님을 추모함
[미술 평론가 황인의 추모사] 백남준 선생과의 ‘입답 경쟁’ 재밌는 일화도 번뜩이는 아이디어, ‘호기심과 호학’ 빛나
나는 이어령 선생님을 몇번 만났다.
첫 만남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74년이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학교 도서관에서 그 책을 빌려다 하숙집에서 보았다. 퍼덕이는 문체에 가슴이 마구 뛰었다.
백남준- 이어령의 의기투합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개회 몇 달 전에 ‘백남준 이어령’의 대담이 서울 강남의 한식집에서 있었다. 백남준 선생님이 그 해 9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중앙로비에 설치할 비디오 작품 다다익선 제작을 위해 서울을 방문했을 때다. 현대화랑 발행의 계간지 ‘현대미술’에 실을 두 분의 대담을 위해 현대화랑이 자리를 마련했다. 잡지의 편집장이었던 나는 두 분의 대담을 녹음하기 위해 말석에 앉았다. 8명쯤 되는 문화계 수장들이 함께 있어 대담 자체가 불가능했다. 나는 녹음을 포기하고 그냥 듣기로 했다.
술잔이 한 차례 돌고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이어령 선생님이 포문을 열었다. 해외의 유명한 사상가의 전집이 차례대로 발행되고 있는데 자신은 그걸 한국에서 실시간으로 구해다 다 읽고 있다고 1권부터 하나하나씩 15권까지 설명하고 있었다. 그건 너무나 긴 설명이어서 주변 사람들이 모두 짜증을 내었다.
계속 침묵을 지키시던 백 선생님께서 드디어 입을 여셨다. “근데 이 선생 혹시 이번에 새로 나온 16권은 읽어보셨소?” 그 책이 나온 줄도 모르는 이어령 선생님이 당황을 했다. “내가 뉴욕을 떠나기 전에 마침 16권이 나왔길래 공항에서 사서 급히 읽고 왔소.” 백남준선생님의 표정은 천연덕스러웠다. “근데 말이오. 16권에 이렇게 써놓았습디다. 1권부터 15권까지 한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정말로 책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너무나 강력한 펀치였다. 침묵이 찾아왔다. 그러나 백남준 선생님은 이어령 선생님을 존중했다. 이어령 선생님 역시 백남준 선생님을 존경했다. 두 사람은 금방 어색함을 풀고 다정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백남준 선생님은 자신과 생각의 속도가 비슷한 당대의 석학 이어령 앞에서 마음 속의 아이디어를 기분 좋게 풀어내셨다. 화면의 사이즈가 다르고 컨텐츠도 다른 여러 화면이 한꺼번에 영사되는 극장을 만들면 좋겠다고 하셨다.
이어령 선생님은 보자기론을 펼치셨다. 당시는 동서냉전의 끝 무렵이었다. 한국인이 보자기로 무엇이건 싸듯이 용서, 화해, 관용, 이해, 융통의 보자기로 지구를 싸자(랩) 하셨다. 서울올림픽의 부대행사인 위성 아트 ‘랩 어라운드 더 월드’의 실행방안도 그 자리에서 나왔다.
잘 생긴 한 어린아이가 굴렁쇠로 운동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달리는 퍼포먼스의 아이디어도 공개하셨다. 원래는 하얀 학 무리가 잠실운동장 상공을 유유히 날아가는 장면도 연출하고 싶었던 것. 요즘 같으면 드론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겠지만 아직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이어령 선생님은 퍼포먼스의 구현 가능성에 전혀 개의치 않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는대로 막 내지르는 스타일이셨다. 아이디어의 구체적인 구현 가능성은 항상 우선순위의 맨 뒷전이셨다.
백남준 선생님이 투덜거리셨다. “우리 미술가들은 몇 년에 새로운 아이디어 하나가 겨우 나올까 말까 한데, 이어령 선생은 오늘 이 자리에서도 수십 개의 아이디어가 나오니 탄복할 일이오.” 비디오 설치 작품, 위성 아트에는 공학적 구현이라는 조건이 항상 수반된다. 그러니 아이디어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던 백남준 선생님의 당연한 푸념이었다. 서로 칭찬도 하고 푸념도 하면서 의기투합의 밤이 깊어갔다.

장르를 넘나드는 예술가적 혜안
1996년 문학의 해가 선포되었다. 나는 한화그룹의 아단문화재단(현 한화문화재단)이 진행하던 근대문학의 조형화 전시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이어령 선생님은 근대문학 아카이브 구축에도 힘쓰던 이 재단의 고문이셨다. 그 아카이브를 예술의 전당 전체를 빌어 시각적으로 전시하고자 했다. 기존에 해왔던 문학 아카이브의 전시방법이 진부하니 관객의 몸과 오감이 다 동원되는 새로운 방법의 전시가 제시되었다. 그러자면 현대미술이 동원되어야 했다. 이어령 선생님께서 전시의 총감독을 맡으셨다. 나는 미술감독이었다. 화가, 조각가, 비디오 아티스트 등을 선발하고 전시의 조형적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게 나의 역할이었다.
이어령 선생님은 김동리의 황토기 등을 예로 들어 이 이야기를 조형화할 경우 어떤 미술작업으로 풀어나갈지 자신이 떠올린 아이디어를 비디오 아트, 사운드 아트 등 최첨단 테크놀러지 아트와 접목시켜가며 설명하셨다. 문학평론가의 입에서 저런 전문적인 지식과 최첨단의 감각이 마구 쏟아짐에 깜짝 놀랐다.
젊은 미술작가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였다. 자신이 20대였을 때, 군복 바지를 잘못 염색하여 한쪽 가랑이는 파란색, 한쪽 가랑이는 빨간색이 되어 버렸던 것. 망설임 없이 그 바지를 입고선 서울시내를 활보했다고 하셨다. 패션으로 일찍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을 실천하셨다고 기염을 토하셨다. 우리는 우리대로 기괴한 짝짝이 바지를 상상하며 크게 웃었다.
이 전시는 중간에 진행을 멈추었다. 만일 성사되었더라면 한국 테크놀러지 아트의 역사를 몇 년 더 앞당길 전시였다. 전시는 불발로 끝났으나 몇 달 동안 매우 유쾌한 만남의 시간을 보내었다.
다음 만남은 영인문학관이 신축 이전한 2008년을 전후해서다. 이어령 선생님이 주간을 맡으셨던 ‘문학사상’ 속의 삽화를 전시하는 데에 뭔가 새로운 전시방법이 없을까 하시길래 나는 책상 위나 진열장 안에 책을 펼치는 게 아니고 미술작품을 미술 전시장 벽에다 걸듯 잡지라는 오브제를 입체적으로 벽에 걸어 전시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홍익대 앞의 목공소에 가서 미니멀한 십자가 형태의 독서대 수십개를 만들어 거기에 잡지를 펼쳐 놓고 영인문학관의 벽에다 하나하나씩 고정시켰다. 이어령 선생님은 이에 매우 흡족하셨는지 나에게 전국에 산재한 시비(詩碑)를 새로운 현대미술 감각의 시비로 바꿀 아이디어를 내어줄 것을 원하셨다. 나는 사절하였다. 나는 영인문학관의 전시에 관한 글을 2편 정도 썼다. 몇 년 후 이어령 선생님은 기어코 통영 남망산의 초정 김상옥 시비 건립 감독으로 나를 추천하셨다. 그 일은 흔쾌히 맡아서 했다.
그 이후로 선생님을 뵙질 못했다. 암으로 투병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칠줄 모르는 호기심의 호학
최근 출판사 파람북에서 연락이 와서 내가 연재하는 중앙일보의 ‘예술가의 한끼’의 글 일부를 이어령 선생님 집필의 ‘한국인 이야기’에 싣고 싶다고 했다. ‘도널드 저드’의 안동 기행에 관한 내용으로 저드가 체험한 콩잎짱아지에 주목하셨다. 책은 2020년 2월에 나왔다. 3페이지에 걸쳐 나의 글이 인용되었다. 워낙에 지식의 폭이 넓으신 분이긴 하지만, 미니멀 아트의 도널드 저드에까지 관심이 있으실 줄은 몰랐다. 미니멀 아트와 도널드 저드와 콩잎짱아지를 자신의 스타일로 다채롭게 풀어나가셨다. 말년에도 지칠줄 모르는 호기심의 호학이셨다.
그저께 선생님의 부음을 들었다.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한 사람의 목소리도 함께 세상을 떠나간다. 가까이에서 그 목소리를 들었던 자들은 성문(聲聞)으로 남는다.
남겨진 성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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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으로 남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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