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명 조민제 변호사
  • 문화
  • 입력 2022.09.26 11:44
  • 수정 2022.09.26 22:59

금강초롱꽃 보며 보편성을 상념하다

[조민제의 식물 이름 이야기]
1902년 일본학자가 금강산에서 채집
'하나부사' 일본공사 이름 딴 학명
보편기준 대신 우리 이름 찾자는 게 옳을까

금강초롱꽃/경기도 화악산
금강초롱꽃/경기도 화악산

금강초롱꽃은?

초롱꽃과(Campanulaceae)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경기, 강원, 평북, 함남의 높은 산지에서 분포한다.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특산종이다. 봄에 새싹이 나서 8~9월에 보라색 또는 흰색의 꽃이 피고, 통 모양의 꽃잎을 받치고 있는 꽃받침은 5개로 갈라진다. 꽃받침 갈래의 폭이 보다 넓다는 특징으로 검산초롱꽃(H. latisepala)을 별도의 종으로 취급하기도 하지만 금강초롱꽃에 통합하여 분류하는 것이 세계적 추세이다. 금강초롱꽃속(Hanabusaya)은 다른 나라에는 분포하지 않으므로 한반도 특산속이기도 하다.

학명을 둘러싼 논란

학문적 연구를 위해 전 세계가 통일적으로 사용하는 식물에 대한 명칭을 학명(scientific name)이라 한다. 종의 학명은 라틴어로 된 속명과 종소명으로 구성되며, 끝에 명명자가 추가된다. 금강초롱꽃의 학명은 Hanabusaya asiatica (Nakai) Nakai이다. 1911년에 동경제국대학의 박사과정에 있었던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 1882~1952, “나카이”)이 1902년에 금강산에서 채집된 표본으로 연구하여 명명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 특산속이자 특산종이기도 한 금강초롱꽃에 대한 명명자가 일본인이라는 점과 속명인 Hanabusaya가 1871년에 조선의 대리공사로 부임한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1842~1917, “하나부사”)를 기리기 위한 이름이기 때문에 ‘일제에 빼앗긴 이름’이라는 논란이 끝없이 제기되고 있다.

북한에서는 1976년에 학명을 Keumkangsania asiatica (Nakai) H.S.Kim으로 고쳐서 속명과 명명자에서 일본인의 이름을 제거해 버리기도 하였다. 북한의 이러한 행위는 민족적 감정에 근거하여 종종 ‘부러움의 대상’ 또는 ‘민족적 쾌거’로 칭송되기도 한다. 그러나 학명을 규율하기 위해 제정된 국제식물명명규약(ICN)은 동의할 수 없다(disagreeable)는 이유로 적법한 명칭의 임의적 폐기를 금지하고 있으므로 이를 위반한 것어서 적법하지 않은 학명(서명; illegitimate name)이 될 뿐이다(ICN 제51.1조 참조).

역사적 사실을 말하자면, 나카이가 속명을 Hanabusaya로 한 것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일제의 침략적 행위를 미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부사가 조선에 체류할 때 식물 표본을 채집하여 동경제국대학에 기부하였고 나카이의 조선 식물연구에 도움이 되었던 개인적 이유 때문이었다. 즉, 우리의 불쾌한(?) 감정에도 불구하고, 학명에 사람 이름이 들어가는 다른 여러 일반적 사례와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1902년의 표본 채집과 1911년의 학명 발표가 일본인에 의해 이루진 것은 일본이 외국에 대한 개방을 유지하면서 1775년에 이미 근대 식물분류학을 접할 수 있었던 반면에 우리는 식민지가 될 때까지 완고하게 거부하거나 무관심했던 것이 주요한 원인 중에 하나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민족적 분노(?)에 근거하여 또 다시 고립의 길로 나아가는 옛 역사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한편 국제식물명명규약(ICN)에 따르더라도 분류학적 견해를 달리하면 속명을 바꿀 수 있으므로 학명을 적법하게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가정하여 예를 들자면-실제로 금강초롱꽃속이 독자적 속인지는 학문적으로도 논란이 있다-금강초롱꽃은 모시대(Adenophora remotiflora)라는 식물과 매우 유사하므로, 잔대속(Adenophora)으로 함께 통합하여 분류하면 금강초롱꽃의 학명은 Adenophora asiatica (Nakai) H.S.Kim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북한이 이러한 학문적 방법을 취하지 않는 이유는 ‘주체적 입장’이라고 쓰고 실제로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특산속을 유지하고 싶은 욕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의 흔적을 지우겠다는 주의와 이념은 일본인이 행한 분류방법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두 얼굴의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 기준으로부터 멀어지면서까지 학문을 주의와 이념으로 대체하는 사고는 비단 북한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로부터 자유스러운가라는 질문에 쉽게 답하기 어려운 현실은 상념을 깊게 한다.

국명을 둘러싼 논란

정태현·도봉섭·이덕봉·이휘재, 『조선식물향명집』, 조선박물연구회(1937), 158쪽
정태현·도봉섭·이덕봉·이휘재, 『조선식물향명집』, 조선박물연구회(1937), 158쪽

1937년에 조선인 식물연구가들이 모여 우리 식물명을 찾고자 했던 노력의 결과물로 발간된 『조선식물향명집』에는 ‘금강초롱’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괄호에 ‘화방초’라는 이름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 이름이 일본명 하나부사사우(ハナブササウ)를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이 역시 ‘일제에 빼앗긴 이름’이고 『조선식물향명집』은 친일적인 문헌인 것처럼 비난받기도 한다.

금강초롱꽃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1911년에 나카이가 이 종에 학명을 부여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1922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편찬된 『조선식물명휘』에는 조선명 없이 일본명으로 ‘ハナブササウ’(화방초)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1937년에 우리말 명칭 ‘금강초롱’이 등장한다.

그러면 1937년 이전에 금강초롱꽃을 부르는 우리 명칭은 없었을까? 현재 확인되는 문헌과 방언 조사 기록 어디에도 금강초롱꽃을 지칭하는 이름은 발견되지 않는다. 자급자족의 폐쇄된 농경사회에서 식용과 약용 등으로 사용하지 않았고 높은 산악지대에 분포했던 식물에 대해 별도의 이름을 붙일 마땅한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강초롱’이라는 이름은 조선인 식물연구가들에 의해 전통적 명칭 ‘초롱꽃’을 기본으로 하고 최초 발견지인 ‘금강산’을 형용격로 하여 그 때 비로소 만들어진 이름이고 그것이 『조선식물향명집』에 최초로 기록된 것이었다(이에 대해서는 『조선식물향명집』 범례와 색인 33쪽 참조).

따라서 ‘화방초’라는 명칭은 우리말 이름이 없었던 1922~1937년 사이의 사실 자체를 기록한 것이다. 학문에 따라 한반도 식물을 인식하고 우리말 이름을 붙인 것이 친일이고 비난의 대상이라면 그러한 비난을 가하는 이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부사사우라는 이름으로 계속 부르는 것? 아니면 다시 세계와 담을 쌓고 폐쇄적 농경사회로 돌아가는 것? 학문을 학문으로 보지 않음으로써 보편성을 버리고 미래가 아닌 과거로 끊임없이 회귀하는 이 논란은 다시금 상념을 깊게 한다.

※ 조민제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사법연수원을 29기로 수료한 후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야생 식물 탐사와 옛 식물에 대한 기록을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 ‘조선식물향명집 사정요지를 통해 본 식물명의 유래’와 책으로 ‘한국 식물이름의 유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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