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르 파티’ 니체와 ‘팜므 파탈’ 루 살로메
[홍성광의 독일 철학자들의 사랑 이야기] 두 번의 청혼에 실패한 니체 ‘팜므 파탈’ 루 살로메와의 3각 애증 살로메, 청혼 거절하며 ‘3인 동거’도
여성과 결혼에 대한 양가적 감정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1900)는 사랑에 관해 많은 글을 쓴 ‘사랑의 철학자’이자 ‘심층 심리학자’다. 그는 여성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쓴 탓으로 지금 시각으로 볼 때 부정적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는 여성뿐 아니라 ‘대지에 생긴 질병’이라며 인간이라는 종(種) 자체에도 비판적이었다. 나아가 독일인과 기독교, 유대교에 대해서도 매서운 비판을 가했다. 그러나 니체는 기독교와 유대교와 같은 종교, 교회와 사제들을 비판했지, 예수 그리스도나 개개의 유대인을 비난한 것은 아니었다.
니체는 여성에 대해서도 ‘여성성이 진리’라는 긍정적 시각을 피력했다. 그는 여성성이 파괴되지 않는 양성평등을 지지했다. 당대 페미니즘의 선봉장이었던 남작부인 마이젠부크(Malwida von Meysenbug)와 친교를 나누고, 여성에게 동등한 기회를 요구한 페미니스트와도 친교를 나눈 것으로 볼 때 항간의 주장과는 달리 그는 여성 혐오주의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니체는 동료들 대다수가 반대하는 데도 바젤대학 박사학위 과정의 여성 입학을 허용하는 결정에 찬성표를 던지기도 했던 것으로 보아 여성의 사회적 인권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결혼생활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의 결핍이 아니라 ‘우정의 결핍’이라고 말한다. 결혼에 대한 그의 입장은 양가적이다. 결혼을 권유하면서도 결혼을 성가시게 생각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두 가지 견해 모두 그에게는 진심이었다. “만약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면, 그녀는 내게 얼마나 성가시겠는가! 그리고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그때부터 내게 얼마나 성가시겠는가! - 결국 두 가지 종류의 상이한 성가심이 있을 뿐이다. - 그러니 결혼하라!”
실패로 끝난 두 번의 청혼
니체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나 독신주의자는 아니었고 두 번 청혼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1876년 그는 제네바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여류음악가 마틸레 트람페다흐(Mathilde Trampedach)에게 청혼했다. 그녀를 알게 된 지 며칠 되지 않은 때였다. 니체는 그녀의 남자친구이자 훗날 남편이 된 지휘자 젱거(Hugo von Senger)가 전달한 편지로 청혼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로부터 6년 뒤 니체는 독일계 러시아 출신의 작가 루 살로메(Lou Andreas-Salomé, 1861~1937)에게 다시 한 번 청혼했으나 역시 거절당하고 말았다.
1861년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루 살로메는 당시 지적·예술적 활동의 중심지였던 고향에서 부족함 없이 성장했다. 아버지는 러시아 장성으로 위그노의 후예였다. 루는 18세 때 스승이었던 43세의 목사 길로트(Hendrik Gillot)로부터 청혼을 받는다. 그는 루에게 형이상학, 논리학, 문학, 종교학, 예술학, 철학 등 서구 문화의 지식을 심어준 사람이었다. 루는 길로트를 깊이 존경했지만, 그가 자신에게 육체적 욕망을 느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루 살로메와 파울 레의 만남
1880년 길로트와 헤어진 루는 당시 여성에게 드물게 입학을 허용한 취리히 대학에 입학한다. 그런데 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이 보기 드문 재원이 원인불명의 질병으로 폐에 이상이 생겼다. 기침을 심하게 하다가 피를 토하고 만 것이다. 1882년 2월, 루의 어머니는 건강 회복을 위해 죽어가는 딸을 데리고 날씨가 따뜻한 로마에 도착했다.
루는 로마에서 철학자 파울 레(Paul Rée)를 만나 사귀기 시작하고 철학과 신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교감했다. 부유한 기업가의 아들인 레는 도박중독자였다. 몬테카를로에서 돈을 몽땅 털린 그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문필가이자 여성 인권 운동가인 남작부인 마이젠부크를 찾아왔다가 그녀가 보살피던 루 살로메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32세였던 파울 레는 처음 만나는 순간 루 살로메에게 빠져들었다. 루는 레에게 이성에 대한 사랑은 자신에게 완전히 닫혀 있다고 말했으나 레는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괴로워했다. 루는 남녀 관계보다는 ‘학문 공동체’로 지내자고 그에게 제안했다. 파울 레는 어떻게든 그녀와의 관계를 지속하고 싶었다. 레는 루의 지적인 용모, 학문에 대한 열정에 빠져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거절당했다. 루는 당시 러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가상 결혼’이라는 독특한 제안을 한다. 그것도 남자 한 명을 더한 세 사람의 동거를 말이다.
니체와 루 살로메의 만남
그러자 파울 레는 친구 니체를 떠올리고 그에게 오라고 부탁했고, 1882년 4월 니체가 로마에 도착한다. 이때 니체는 38세, 루는 21세, 레는 32세였다. 이때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미적 염세주의’의 그늘에서 막 벗어나 고유한 철학 체계를 구축하던 시기였다.
루를 보고 첫눈에 반한 니체는 자신의 철학을 이해하고 함께 논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며 바그너를 소개하는 등 루를 각별히 생각했다. 니체는 루를 처음 보고 “우리가 어느 별에서 내려와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은 운명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윽고 니체는 살로메에게 청혼하지만, 그녀는 니체의 청혼을 거절하고 세 사람이 서로 철학만을 논의하면서 동거 생활을 하자는 의견을 낸다. 이리하여 한 여자를 둘러싼 두 남자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루는 이 관계를 두고 ‘지적 삼위일체’라고 불렀다. 레와 니체는 이 제안을 결국 받아들인다.
니체의 “여자를 보려 하는가? 회초리를 잊지 말아라”라는 말은 니체와 레, 루 살로메가 ‘지적 삼위일체’를 만들기로 하고 찍은 사진을 두고 한 말이 분명하다. 레는 살로메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녀의 주장을 미련 없이 받아들였고, 니체는 루의 주장에 크게 화를 냈으나 “루와 같은 집에 살 수만 있다면 괜찮아”하면서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친구 파울 레를 통한 니체의 청혼
1882년 여름, 루가 자신의 별장에서 머물 때 그녀에게 큰 매력과 깊은 사랑을 느낀 니체는 다시 청혼한다. 그런데 직접 청혼하지 않고 파울 레에게 대신 부탁한다. 그러나 또 실패로 끝난다. 이처럼 니체는 사랑에 대한 해박을 지식을 지녔지만 현실에서의 사랑은 이루지 못했다. 루는 니체와 철학적 대화를 나눈 후 말도 없이 레와 함께 몰래 도망쳤다.
여러 달 동안 세 사람이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한 후 겨울을 함께 나기로 했지만 루는 니체를 따돌리고 파울 레와 동거에 들어간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질투와 배신감에 사로잡힌 니체는 루에게 수십 통의 편지를 쓰고, “작고 나약하고 더럽고 교활한 여자, 가짜 가슴을 달고 다니는 구역질 나는 운명”이라며 루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후일 유방암에 걸려 유방 절제 수술을 받고 나서 그녀는 “지금 이렇게 가짜 가슴을 달고 있으니 니체의 견해가 옳았다”라고 재치 있고 담담하게 말했다.
1883년 1월, 니체는 급박한 위기를 극복하고 “내 영혼에서 무거운 돌을 굴러 털어냈다”라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1부를 썼다. 루 살로메와의 경험의 흔적은 여성의 본질과 관련된 장에서 읽을 수 있지만, 동시에 그는 자신의 삶에서 이 에피소드를 결말짓고 극복하게 되었다.
철학자로서 니체를 높이 평가하는 루 살로메
여기에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트가 두 사람 사이에 개입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했다. 그녀는 루를 병적으로 증오했으며, 루 역시 그녀에게 지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툭하면 심한 언쟁을 벌이곤 했다. 니체가 여동생과 사랑을 나눴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에 대해, 철학적으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는 식으로 악평을 썼을 정도다. 거기다가 니체는 반유대주의자를 싫어했는데, 바로 니체의 여동생과 그녀의 남편이 반유대주의자였다.
니체와 루의 관계를 파탄에 이르게 한 데는 파울 레도 한몫했다. 니체는 루가 결별을 선언한 이후에도 계속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 화해를 시도했으나 레가 그 편지들을 대부분 가로챘다. 그 때문에 루는 내막도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절망에 빠진 니체로부터 끔찍한 저주의 말을 듣기도 했다.
니체의 과도한 집착에도 불구하고, 당시 루 살로메가 철학자로서의 니체에게 내린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었고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니체와 결별할 무렵 “우리는 니체가 새로운 종교의 예언자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그는 많은 영웅들을 제자로 두게 될 것”이라고 일기장에 썼다.
동양학자와 결혼, 동거생활 파탄내다
루와 파울 레의 동거는 여러 해 동안 지속되었지만, 루가 동양학자 안드레아스(Friedrich Carl Andreas)와 ‘독신 결혼’이라는 조건으로 결혼하자 레와 루의 동거는 막을 내렸다. 루의 결혼 소식을 들은 니체는 슬픔에 빠져 유명한 말을 남긴다. “당신이 나에게 거짓말을 해서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당신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납니다.”
니체는 루의 결혼 소식에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니체는 끝내 정신착란으로 사망했고, 파울 레도 다음 해인 1901년 스위스 남동부의 어느 산 위에서 깊은 골짜기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곳은 그가 루와 함께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장소가 바라보이는 지점이었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
사랑에 실패한 니체는 고통스러운 운명에 스스로 기쁨의 축복을 내리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것으로 아픔과 우울증을 극복한다. 그것은 가장 낯설고 가혹한 삶의 문제들과 직면해 있으면서도 삶을 긍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의 몰락마저 사랑할 줄 알았다. 그에게 사랑이란 삶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핵심은 노래 부르고 춤추고 웃을 줄 아는 것이다. 니체는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살겠노라고 다짐했다. 그에게 운명이란 동일한 것, 자신의 삶에 영원히 회귀하는 것, 그것으로부터 탈주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는 말한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 이것이 지금부터 나의 사랑이 될 것이다! 나는 추한 것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련다. 나는 비난하지 않으련다. 나를 비난하는 자도 비난하지 않으련다. 무엇보다 나는 언젠가 긍정하는 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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