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남자 브레히트를 위대하게 만든 여인들

[홍성광의 독일 작가의 사랑이야기]

연극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브레히트(왼쪽 두번째)와 억척어멈 역의 헬레네 바이겔(오른쪽 끝).
연극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브레히트(왼쪽 두번째)와 억척어멈 역의 헬레네 바이겔(오른쪽 끝).
  • 지적 매력과 다중 연애의 삶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독창적인 서사극 이론과 기타 연주를 통한 지적 매력으로 당대 수많은 여성과 복잡하고 자유로운 다중 연애를 즐겼다.
  • 창작의 동반자였던 여인들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 공식 아내 헬레네 바이겔 등 그의 연인들은 단순한 관계를 넘어 작품의 공동 집필과 예술적 성취를 이끈 핵심 동반자였다.
  • ‘나쁜 남자’와 위대한 천재성의 공존 자기중심적인 성격과 방탕한 사생활로 주변 여성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으나, 이들로부터 얻은 영감은 그를 현대 연극의 혁신가로 만들었습니다.

독창적인 서사극 이론

현대 연극의 문법을 바꾼 ‘혁신가’라는 평가와 함께 천재적인 평가와 함께 “지적으로는 자극적이지만 정서적으로는 차가운 이론가”라는 평가를 받은 특별한 인물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 그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독일 극작가, 시인 중 한 명이다.

그는 ‘서사극(Episches Theater, 관객이 극을 보면서 계속 생각하고 판단하게 만드는 연극-편집자주)’이론을 발전시키고 ‘낯설기 효과’ 기법을 통해 관객이 수동적인 감상자가 아니라, 연극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능동적인 참여자’로 변화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는 연극을 본 관객에서 “얼마나 감동했는가?”만 묻는 것이 아니라, “왜 세상은 이렇게 되어 있는가?”, “다르게 만들 수 있는가?”라고 묻도록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내려온 기존 극작 기법에 반기를 들고 나온 그의 서사극은 연극계를 넘어 다른 학문 분야에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오랜 금기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라는 평가.

브레히트는 천재적 연극 이론과 마르크스적 정치적 메시지로 유명하지만, 그의 삶에는 다채로운 사랑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마치 현대극처럼 동시적인 다중연애, 지적 오만이 범람하는 연애 이야기다.

그는 평생 여러 여성과 사귀며 다중 연애를 즐겼고 여성들과 예술적·지적 영향을 주고 받았다. 연애를 한 몇몇 여성은 그의 창작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전형적인 ‘여성 편력가’였으며, 동시에 이들 여성들을 자신의 창작 활동에 적극 참여시킴으로써 그의 서사극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는 매우 감성적인 매력의 소유자였다. 노래와 특유의 삐딱한 폼의 기타 연주로 여성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으며, 종종 자신의 시를 직접 낭송하며 구애했다. 그의 연극 이론에서처럼 그는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들었으며, 이러한 지적 우위와 자신감은 그가 가진 외적인 결함을 덮을 만큼, 오늘날 식으로 표현하면 ‘지적 섹시함’에 가까운 매력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 여성에게 헌신한 적이 없었다. 여러 여성과 다중 연애 관계를 유지하는 속에 결혼한 배우자와 예술적 협업을 지속했다. 그는 연인들에게서 많은 창작적 영감을 얻었는데,브레히트의 여성들은 단순한 연인이 아니었다. 배우였고, 번역가였으며, 비평가였고, 때로는 그의 작품을 함께 만들어낸 공동 창작자였다. 이에 반해 그 자기중심적인 연애로 ‘차가운 연인’ 또는 ‘나쁜 남자’라는 소릴 들어야 했다.

브레히트의 지적 매력과 기타 연주

브레히트는 당대의 기준에서 볼 때 잘생긴 외모는 아니었다. 오히려 투박하고 억센 인상의 소유자였고 왼쪽뺨에 흉터가 있었는데 젊은시절 결투하다 생겼다는 얘기가 있지만 분명치는 않다.

그가 헬레네 바이겔을 비롯한 당대 지성인들과 여성들의 마음을 깊이 사로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만의 독보적인 지적 매력과 카리스마 덕분이었다.

그는 사회적 규범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인간이었다. 그가 주변 여성들과 맺었던 복잡하고도 자유로운 관계들은, ‘자기중심적이면서도 권위주의적이지 않은’ 독특한 매력에서 비롯됐다.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그의 현실 비판적 태도와 기득권에 대한 조롱을 공유하면서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는 듯했다.

브레히트가 낡은 기타를 들고 삐딱한 자세로 앉아 냉소적이면서도 서정적인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당시 지식인 여성들에게 매우 이색적이고 강렬한 예술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단순히 잘생긴 남자가 연주하는 세레나데가 아니라, 철학적이고 사회적 메시지가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의 기타 반주에 맞춰 시를 읽거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여성들에게 단순한 연애를 넘어선 ‘지적 교감’의 체험을 의미했다.

현대 서사극의 창시자라 불리는 베르톨트 브레히트(1954)
현대 서사극의 창시자라 불리는 베르톨트 브레히트(1954)

첫 번째 아내 마리안네 초프

브레히트는 생애 전반에 걸쳐 매우 복잡하고 중첩적인 연애사를 갖고 있는 인물인데, 1929년 헬레네 바이겔(Helene Weigel, 1900∼1971)과 정식으로 결혼하기 전 이미 여러 여성과 연애 관계를 맺었다.

청소년 시절인 1916년 초여름, 18세였던 브레히트는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아우크스부르크의 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로자 아만(Rosa Maria Amann, 1901~1988)을 만나 처음 연애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1920년경까지 4년간 교제했으며, 이 시기에 만났던 또 다른 연인 파울라 반홀처(Paula Banholzer, 1901~1989)와 함께 브레히트의 초기 연애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브레히트의 첫 번째 아내 마리안네 초프.
브레히트의 첫 번째 아내 마리안네 초프.

브레히트의 첫 번째 아내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오페라 가수였던 마리안네 초프(Marianne Zoff, 1893~1984)다. 1922년 조프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자, 아이가 사생아로 태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같은 해 11월 3일 뮌헨에서 그녀와 결혼했다.

1923년 아내인 초프는 딸 한네(Hanne Hiob, 1923~2009)도 낳았으나 부부 관계는 나빠져 갔다. 첫 아내와의 결혼 이후에도 브레히트는 여러 여성과 관계를 맺었는데, 가정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신의 예술 활동과 자유분방한 연애에 더 집중했다.

결국 결혼 직후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해 별거에 들어갔다가 1927년에 공식적으로 이혼했다.

창작의 동반자, 하우프트만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Elisabeth Hauptmann, 1897~1973)은 브레히트의 가장 오래된 문학적 동지이자 사실상의 공동 집필자다.

브레히트는 1924년경 그녀와 깊은 관계에 빠졌다. 당시 하우프트만은 문학적 소양을 갖춘 여성이었으며, 브레히트의 재능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그녀는 브레히트의 거의 모든 초기 및 중기 대표작들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는데, 단순히 보조적인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대본의 구성, 대사 작성, 그리고 원작의 번역 및 각색을 주도적으로 담당했다.

단순한 연인 관계를 넘어 비서이자 공동 집필자로서 『서푼짜리 오페라』를 비롯한 브레히트의 수많은 걸작을 탄생시켰는데, 『서푼짜리 오페라』(1928)의 성공 뒤에는 그녀의 노력이 특히 컸다. 그녀는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를 브레히트에게 소개하며, 극의 초기 대본 작업에도 깊이 관여했다.

두 사람은 급속히 연인 관계에 빠져들었지만 브레히트에겐 아내 헬레네 바이겔이 있었다. 그의 여성 편력이 워낙 복잡했기 때문에 연인 관계도 늘 불안정했지만 두 사람의 협력 관계는 이어졌다.

브레히트가 나치독일의 탄압을 피해 망명길에 올랐을 때나 전쟁 중에도 하우프트만은 그의 작품을 정리하고 보존하는 데 헌신했다. 브레히트 역시 그녀의 지적 능력을 높이 존중했으며, 그녀가 없었다면 자신의 많은 희곡이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인정할 정도였다.

하우프트만은 나치 시절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심문을 받던 중 친구들과 변호사, 미국에 살던 여동생의 도움으로 독일을 탈출할 수 있었다. 하우프트만은 첫 번째 피난지 파리에서 브레히트에게 끝내 이별편지를 썼다.

“당신은 행복한 것 같고, 나도 당신과의 완전한 단절을 통해 사람과 일에서 더 깊고 자연스러우며 애정 어린 관계를 새로 찾을 것이라고 믿어요”라고.

그동안 문학계는 브레히트의 천재성에만 초점을 맞췄을 뿐 엘리자베트의 기여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 문학 연구에서는 그녀를 ‘브레히트의 숨은 공동 저자’로 명확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브레히트 사후에도 그녀는 그의 유산을 관리하고 정리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현대 독일 문학에서 그녀의 독자적인 문학적 역량 또한 재조명받고 있다.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

공식적인 아내 헬레네 바이겔

헬레네 바이겔과 브레히트의 사랑 이야기는, 예술적 협력과 복잡한 감정적 관계가 얽힌 독특한 서사다. 1923년, 당시 25세이던 신예 극작가 브레히트는 재능 있는 배우를 찾던 중 배우 헬레네 바이겔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당시 문단에서 주목받고 있던 브레히트가 자신의 친구였던 다른 여성을 매정하게 대하다가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를 따지기 위해 브레히트의 거처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브레히트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그의 세계를 접하게 됐다.

그녀는 곧 그의 지적인 카리스마와 예술에 대한 독특한 태도에 완전히 압도당하고 만다. 항의하러 갔던 바이겔이 오히려 그에게 매료되어 그대로 눌러앉게 된 이 일화는, 브레히트라는 인물이 가진 ‘사람을 끌어당기는 기묘한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바이겔이 브레히트의 곁에 있기로 한 결정은 단순히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당시에 매우 똑똑하고 주관이 뚜렷한 배우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는 브레히트가 추구하던 ‘사유하는 연극’의 가치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봤다.

그녀에게 브레히트는 버릇없는 ‘나쁜 남자’였을지 몰라도, 동시에 자신이 가진 배우로서의 역량을 온전히 발휘하게 해줄 유일한 ‘창조적 파트너’였던 것이다. 그녀는 브레히트의 천재성을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그가 일상이나 인간관계에서 저지르는 파괴적인 행동들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브레히트의 평생 반려자 헬레네 바이겔.
브레히트의 평생 반려자 헬레네 바이겔.

그녀는 브레히트의 작업실과 가정의 질서를 지키는 ‘실질적인 운영자’로 군림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예술적 비전을 브레히트의 세계 안에서 확고하게 구축해나갔다. 브레히트의 수많은 여성 편력과 복잡한 사생활을 참고 지켜보면서도, 그의 작품을 무대 위에서 형상화하는 데 평생을 바친 또 다른 여인이었다. 이는 예술적 가치관의 일치와 깊은 동료애가 그들 관계의 본질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브레히트는 결혼 후에도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 카롤라 네어 등 여러 여성과 연애 관계를 맺으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다. 그는 결혼 생활 중에도 자신과 자신의 예술 활동을 위해 다른 여성들이 필요함을 분명히 했고, 바이겔은 이러한 브레히트의 문란한 사생활을 암묵적으로 수용했다.

후일 그녀는 배우가 된 이유를 연극 자체가 아니라 한 번의 낭독에서 받은 ‘깊은 인상’ 때문이라고 했다. 1923년 브레히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첫 번째 아내와 결혼한 상태였음에도 여러 여성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바이겔은 브레히트의 노래와 기타 연주, 작가적 재능에 매료되었고, 두 사람은 곧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

브레히트는 남녀 관계에 대해 ‘남자는 엄청난 것을 요구할 수 있고, 여자는 엄청난 것을 양보해야 하는’ 계약이라고 보았다. 바이겔은 이러한 불평등한 관계를 이해하며 감수할 수 있었기에 수많은 위기에도 불구하고 평생 그의 아내로 남을 수 있었다.

망명 생활과 예술적 협력

브레히트의 삶은 ‘개인적인 방종’과 ‘정치적 엄격함’이 공존하는, 매우 모순적인 형태의 삶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곁의 사람들과 협업하며 예술을 생산했지만, 동시에 ‘고독한 망명객’으로서 시대의 증인이 되기도 했다.

나치의 권력 장악후 브레히트와 유대계 혈통이었던 바이겔은 1933년 독일을 떠나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를 거쳐 미국에 정착했지만, ‘매카시 광풍’이 불자 브레히트는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미국에서 추방당했다.

이 기간 동안 바이겔은 브레히트의 작품 공연과 창작을 지원하며 ‘아내’이자 ‘어머니’의 역할에 전념했고, 예술적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헬레네는 1948년 유럽으로 돌아온 뒤 스위스 취리히의 시립극장에서 브레히트의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초연에서 주인공인 안티고네 역할을 맡았다. 다음해인 1949년에 두 사람은 동독 지역에서 ‘베를린 앙상블(Berliner Ensemble)’을 설립해 브레히트의 연극 이론을 실현하는 데 힘썼다.

브레히트가 극작과 연출을 맡았다면, 바이겔은 극단의 행정적 수장이자 주연 배우로서 그 유명한 ‘베를린 앙상블’ 극단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 외의 여성들 – 카롤라 네어, 마르가레테 슈테핀, 루트 베를라우

당대 최고의 여배우 중 브레히트가 깊이 매료되었던 인물로 카롤라 네어(Carola Neher, 1900~1942)가 있다. 카롤라는 브레히트가 특히 아꼈던 배우이자 연인이었다. 『서푼짜리 오페라』의 폴리 피첨 역은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브레히트의 작품을 무대 위에서 완벽하게 해석해내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때문에 브레히트와 바이겔 사이에서 긴장감을 유발시키기도 했다. 1931년에는 마르가레테 슈테핀이, 1933년에는 루트 베를라우가 브레히트의 여성 클럽에 새로이 합류했다.

브레히트에게, 여성들은 단순히 ‘연인’이라는 범주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연극 이론과 작품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춘 여성들에게 끌렸다. 브레히트는 한 사람의 여성에게 정착하는 것이 아닌, 여러 여성과의 관계를 병행하면서 얻는 자극을 자신의 창작 에너지로 삼았다.

헬레네 바이겔 역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브레히트를 만났다. 바이겔은 브레히트의 이런 복잡한 여성 편력과 자유로운 성향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와의 예술적 결합이 가진 가치를 더 높게 평가했던 여인이었다. 브레히트가 주변의 수많은 여성을 곁에 두고 있는 동안 그녀는 끝내 무대 위에서 자신과 가장 완벽한 호흡을 맞추며 예술적 영혼을 나눌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데 성공했다.

방탕한 생활 끝에 심장마비로?

브레히트와 관계를 맺은 여성들은 그의 예술적 성과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동시에 그의 ‘자기중심적인 성격’으로 인해 그녀들은 많은 고통을 겪었다.

바이겔은 이러한 브레히트의 외도를 어느 정도 용인했지만, 때로는 심한 질투를 느끼며 갈등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여배우 루트 베를라우와의 관계로 인해 아내인 바이겔은 브레히트와 심하게 다퉜다.

이처럼 브레히트는 평생 여러 여성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자신의 연애사를 숨기지도 않았다. 그는 질투와 같은 감정을 구시대적인 것으로 치부하거나 자신의 복잡한 사생활을 ‘즉물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등 독특하고도 냉정한 연애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56년 8월 14일 동베를린에서 58세의 나이로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오랫동안 심장 문제를 앓아왔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를 그의 복잡한 사생활과 연결할 근거는 없다. 당시 “여자를 많이 만나고 방탕하게 살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라는 풍문도 퍼졌다.

브레히트는 분명 위대한 예술가였다. 그러나 그 위대함이 그의 인간적 결함까지 지워주는 것은 아니다. 그는 수많은 여성에게 사랑과 영감을 받았고, 그들의 노동과 재능을 자신의 작품 속에 흡수했다. ‘나쁜 남자’ 브레히트는 그렇게 예술이라는 아름다운 천에 싸여 오늘까지 ‘위대한 천재’로 남아 있다.

글쓴이

홍성광 번역가

홍성광은 서울대 독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독문학박사로, 독일 문학 및 철학 관련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독일 명작 기행』, 『글 읽기와 길 잃기』, 역서로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 니체의 『비극의 탄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토마스 만의 정치 에세이 『예술과 정치』, 『마의 산』(상·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상·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젊은 베르터의 고뇌』, 실러의 『도적들』,『간계와 사랑·빌헬름 텔』, 헤세의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 『싯다르타』, 카프카의 『성』,『소송』,『변신 외』,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총론』(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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