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말러, ‘팜므 파탈’ 지치게 한 사랑

[홍성광의 독일 작가의 사랑이야기] 천재 작곡가와 어린 아내의 ‘독성’ 강한 사랑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
  • 세기말의 불안을 예언한 불협화음의 거장 말러는 아름다운 음율을 넘어 불협화음과 불안한 세계관으로 음악이 곧 거대한 세계를 품어야 함을 역설하며 우리의 포스트모더니즘적 미래를 먼저 예고했다.
  • 영감을 찾아 헤맨 방황과 파국적 사랑 평생토록 꺼지지 않는 내면의 불안과 모순을 안고 살았던 그는 가는 곳마다 강렬한 여성 편력을 거쳐, 당대의 ‘팜므 파탈’ 알마 쉰들러를 만나 치명적이고도 독성 강한 사랑의 늪에 빠져들었다.
  • 천재의 위대한 예술과 가부장적 가학성의 모순 세상을 향해 거대한 음악적 예언을 쏟아냈던 그는 역설적이게도 가정 안에서는 아내 알마에게 남성가부장적인 억압과 철저한 굴복을 강요하는 가학적 천재의 면모를 보이며 비극적 모순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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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운 음악의 영혼과 열정적인 사랑

현대 낭만주의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는 보헤미아 태생의 후기 낭만파 작곡가이자, 지휘자다. 구스타프 말러와 ‘팜므 파탈’ 알마 말러의 사랑은 단순히 ‘예술가 부부’를 넘어, 서로에게 깊은 영감과 동시에 씻을 수 없는 불안과 상처를 주었던 ‘독성 강한 사랑’의 전형으로 회자되곤 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뜨거운 열정으로 시작되었으나, 예술적 갈등과 개인적인 아픔이 얽히며 비극적인 결말을 짓게 된다. 그럼에도 말러가 남긴 위대한 교향곡들 속에 ‘알마’라는 여인이 영원한 ‘뮤즈’로 각인되어 있는 이 사랑 이야기가 오늘날까지도 음악 팬들의 심금을 울리는 이유일 것이다.

구스타프 말러와 아내 알마 말러. 1909년 당시 사진.
구스타프 말러와 아내 알마 말러. 1909년 당시 사진.

작곡가로서 말러는 19세기 오스트리아-독일 전통, 20세기 초의 현대주의 사이의 다리 역할을 했다. 지휘자로서의 그의 위치는 확립되었지만, 그의 음악은 나치 시대 동안 유럽에서 ‘공연 금지’를 포함한 무관심의 기간을 거친 후에야 폭넓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세계 2차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새로운 음악 세대는 그의 음악을 재발견했다. 그 후 말러는 20세기의 작곡가들 중 가장 자주 연주되고 녹음된 작곡가 중 한 명이 되었다. 특히 토마스 만의 중편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을 영화로 만든 작품에 말러의 교향곡 ‘아다지에토’가 배경 음악으로 쓰이면서, 그의 음악이 대중적으로 큰 각광을 받았다.

구스타프 말러는 1880년 ‘바트 할’(Bad Hall)의 여름 극장에서 ‘지휘자’로서의 생애를 시작했다. 말러의 지휘 경력 초창기에 작곡 작업은 그의 여가 활동에 그쳤다. 명성을 얻으며 차례로 큰 오페라 하우스의 지휘자 자리로 옮겨갔는데, 1881년에는 류블랴나, 1882년에는 올로뮈츠, 1883년에는 빈, 1884년에는 카셀, 1885년에는 프라하, 1886년에는 라이프치히, 1888년에는 부다페스트로 진출했다.

말러는 가는 곳마다 자신과 함께 일하는 여성 성악가에게 끌렸다. 강렬한 음악적 열정만큼이나 심한 여성 편력의 소유자였다. 평생토록 꺼지지 않는 불안과 모순을 안고 살았던 그의 내면은, 역설적이게도 이 위태로운 사랑들을 통해 음악적 자극과 영감으로 환원되곤 했다.

1884년, 독일의 카셀에서는 난생처음 한 여인과 불꽃 같은 연애에 빠졌다. 그녀는 소프라노 가수 요한나 리히터(Johanna Richter, 1858~1943). 그녀는 카셀의 왕립극장을 찾는 오페라 청중과 평론가들이 모두 좋아하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다. 모짜르트의 《마술피리》에 나오는 「밤의 여왕」에서 2막 아리아를 부르는 것과 같은,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는 초고음역대(하이 F)를 가진 오페라 가수였다.

연상, 유부녀 가리지 않는 여성편력

그녀는 말러의 절친인 나탈리 바우어의 여동생이었지만, 나이는 말러보다 10세 연상이었고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애교 넘치는 그녀의 교태 앞에서 숫총각 말러는 속수무책이었다.

소프라노 요한나는 말러의 음악에 깊이 감명했지만, 결혼 생활을 위해 말러의 구애를 거절했다. 그렇지만 말러는 그녀를 위해 자주 연애시를 날렸고, 그중 네 편의 시를 활용해 「어느 떠돌이 직공의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좌절하는 이 고통스러운 방황은 훗날 그의 음악을 지탱할 정서적 토양이 되었다.

이어 지휘자 말러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역시 소프라노 가수인 베티 프랑크(Betty Frank)와도 사귀었다. 도도한 눈빛을 지닌 작고 다소 통통한 여자였는데, 두 사람의 만남도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왼쪽은 소프라노 가수 요한나 리히터, 오른쪽은 베트 프랑크.
왼쪽은 소프라노 가수 요한나 리히터, 오른쪽은 베트 프랑크.

1886년 독일 라이프치히로 간 말러는 ‘위대한 작곡가’ 카를 폰 베버의 미완성 오페라를 마무리하기 위해 그의 손자 폰 베버 대위의 집을 방문하는 일이 있었다. 그곳에서 세 아이의 엄마이자 대위의 아내인 30세의 마리온 폰 베버(Marion von Weber, 1856∼1931)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말러는 유부녀인 마리온에게 청혼을 했고, 답변을 기다리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자정에도 그녀 집으로 달려갔다. 베버 대위 집안은 말러를 가족처럼 대주었던 것이 개인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엄청난 파문을 몰고 왔다.

결혼한 마리온이 불륜을 저지른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당시 상당한 스캔들로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런 따가운 눈총에도 말러는 마리온과의 사랑에서 영감을 얻어 ‘교향곡 제1번’의 작곡을 시작했다.

자신의 천재성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할까 두려워하던 그의 불안정한 내면이 파국적인 사랑과 결합하며 비로소 거대한 악음으로 터져 나왔던 것이다.

말러가 ‘팜므 파탈’ 알마 신들러를 만나 결혼하기 전까지 오페라 가수 안나 폰 밀덴부르크(Anna von Mildenburg, 1872~1947)와 젤마 쿠르츠(Selma Kurz, 1874~1933)와도 사랑을 나눴다.

함부르크 국립 오페라의 음악 감독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는 안나 폰 밀덴부르크를 발탁해 가르치면서 연인 관계로까지 발전했다. 밀덴부르크와의 연애를 어렵게 극복한 뒤에 그는 여성 단원과 엄격하게 거리를 두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왼쪽은 안나 폰 밀덴부르크, 오른쪽은 젤마 쿠르츠.
왼쪽은 안나 폰 밀덴부르크, 오른쪽은 젤마 쿠르츠.

말러는 1898년 말 프랑크푸르트에서 젤마 쿠르츠의 노래를 듣고 빈 궁정 오페라로 영입한 후 인연을 맺었다. 그는 즉시 계약을 제안했고, 1899년 9월 그녀는 자신의 예술적·정신적 고향이 될 극장에서 ‘미뇽’ 역으로 데뷔했다.

빈에서 그녀는 빠르게 성공했고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30년 후 그녀의 음악 경력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전성기는 길었지만, 젤마 쿠르츠와 말러의 연애 기간이 짧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은 격렬하고 강렬했다.

나비 수집하던 천재를 수집한 알마 쉰들러

1899년 7월의 어느 날, 말러는 빈에서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그는 더이상 숫총각도 젊은 청년도 아니었다. 그는 마주 오는 알마 쉰들러(Alma Schindler, 1879∼1964)를 스치면서 ‘운명의 연인’임을 바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20세의 알마는 말러와 달랐다. 그녀는 유명 지휘자 말러를 예술가로서 숭배했지만 사적으로 자세히 알고 싶은 열망은 없었다. 그녀는 빈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동시에 가장 똑똑한 여성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화가 쉰들러의 딸인 그녀는 누구든 보는 순간 그녀의 마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에게 사랑과 고통을, 동시에 영감을 불어넣은 여인이었다.

알마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쳤고 9세 무렵에 작곡을 시작하면서 뛰어난 음악 재능을 보였다. 또한 14세 무렵에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줄줄 외우고 다닐 정도로 총명했다.

당돌했던 그녀는 첫사랑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였다. 새아버지의 동료였기에 격분한 새아버지의 반대로 사랑은 이어지지 않았다. 13세에 아버지를 여읜 알마는 아버지처럼 나이가 많은 남자들에게 끌렸다.

말러와 만나기 전에 사귀었던 테너 요제프 올브리히, 테너 에릭 슈메데스, 부르크테아터의 임시 감독 막스 부르크하르트, 작곡가 겸 지휘자 알렉산더 쳄린스키는 모두 알마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이들 말고도 가볍게 바람을 피운 상대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번데기 단계에 있는 애교 넘치는 요부였고, 나비를 수집하듯 천재를 수집했다.

“작곡가는 한 명이면 충분해!” 말러의 폭탄선언

1901년 빈의 한 살롱에서 정식으로 만난 말러와 알마 쉰들러는 19세라는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금방 사랑에 빠졌다. 당시 말러는 41세의 저명한 지휘자이자 작곡가였고, 알마는 22세의 재능 있는 예술가 지망생이었다. 알마는 “재능 있는 남자가 좋다”며 “위대한 업적을 이룰수록 더 끌리곤 한다”고 말러의 성취욕을 자극했다. 그러자 말러는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 마음을 푹 놓아도 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완벽한 커플일 것 같던 두 사람은 그러나 결혼계획이 구체화되자 이견으로 갈등한다. 말러는 “우리 집에 작곡가는 한 명이면 충분하다”며 알마에게 음악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는 심지어 알마에게 “함께 행복하려면 오직 나의 필요에 의해 존재해야 한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자존심이 크게 상하는 일이긴 하지만, 알마는 결국 자신이 예술에 필요한 진지함과 노력이 부족하다고 고백하며 백기를 들었다.

결국 알마는 자신의 야심을 포기하기로 결정하지만, 이 결정은 훗날 두 사람에게 결혼 생활 내내 혹독한 고통을 안겨준 응어리였다. 말러는 자신의 예술적 세계관 속에 알마를 편입시키려 억지를 부렸다.

타인에게는 그토록 지독한 사랑을 갈구하던 그가, 정작 가장 가까운 아내에게는 자신의 음악적 왕국이 흔들릴까 두려워 독선적인 복종을 요구한 셈이었다. 이로 인해 알마는 작곡가로서의 창작 활동을 중단해야 하는 심리적 고통을 겪기도 했다.

결혼계획을 세우는 동안, 알마는 그를 남편으로 선택하는 데에 주저하며 확신하지 못했다. 말러 역시 알마에 대한 욕구와 의구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그는 알마가 ‘미성숙하고 인격적 미발달 상태에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작곡가의 역할, 노동의 역할을 맡고,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배우자의 역할, 이해심 많은 동반자의 역할만을 요구할 뿐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그의 행복을 위해 그에게 완전히 헌신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1902년 3월 9일 말러는 알마 쉰들러와 카를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알마와 딸 마리아와 안나.
알마와 딸 마리아와 안나.

순탄치 않은 결혼 생활, 알마의 좌절

곱게 자란 알마 쉰들러는 신혼여행에서부터 자신의 까다로운 감각 탓에 불만이 쌓였다. 게다가 업무상의 연주 여행을 겸한 신혼여행이었기 때문이었다. 말러는 말러대로 기차를 탈 때부터 고질병인 편두통에 시달렸다.

알마 말러는 그러나 그가 고난을 겪거나 아플 때 더 깊이 사랑했고, 깊은 모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자신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남편의 앞길에 놓인 모든 부정적인 것을 치워주고 그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충실히 받아들였다.

불안을 먹고 자란 천재의 숙명처럼, 말러는 알마를 향한 자신의 복합적인 감정을 서서히 위대한 음악에 녹여내기 시작했다. 특히 교향곡 제8번은 알마에게 헌정된 곡이다.

또 교향곡 제10번은 알마의 외도로 고통받던 시기에 작곡된 유작이다. 악보 곳곳에 “그대를 위해 살다! 그대를 위해 죽다!”와 같은 절절한 고백이 적혀 있었다. 뤼케르트 가곡집 중 「그대가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면」은 말러가 알마에게 바친 가장 사적인 사랑의 편지로 알려져 있다.

결혼 생활 중 알마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가정주부로만 머무는 것에 깊은 우울감을 느꼈다. 결혼한 지 8년 만인 1910년 무렵, 알마는 우울증 치료를 하던 중 우연히 만난 젊은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알마에게 남편인 말러는 오를 수 없는, 한없이 두렵고 멀게 느껴지는 벽 같은 존재였다. 알마는 말러의 정신을 사랑했지만, 그의 육체는 감각적 욕망이 분명한 그녀에게 허깨비 같았다.

발터 그리피우스. 재혼한 알마와 그리피우스, 딸 마농.
발터 그리피우스. 재혼한 알마와 그리피우스, 딸 마농.

불안, 사랑의 독성, 음울한 음악의 세계

말러의 인생에서 끝내 가장 힘들었던 위기가 찾아왔다. 알마와 그로피우스의 불륜 사실을 알고 말러는 폭발해 버렸다. 그로피우스가 말러에게 알마를 포기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알마는 그동안 마음속에 맺혀 있던 응어리를 쏟아냈고, 그에 대한 사랑도 완전히 식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이와 책임감 때문에 남편을 떠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 후 말러는 알마의 작곡을 격려하고 작품 출판을 위해 그녀의 작곡 중 일부를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1911년 화해를 이룬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심장 질환으로 ‘위대한 작곡가’ 말러는 짧은 생을 끝내고 만다. 그의 나이 51세. 19살이나 어린 알마는 32세였다.

삶의 불안과 사랑의 독성을 고스란히 음악으로 태워 올린 그의 생애가 마침내 막을 내린 것이다.

말러 사후 알마는 남편의 재산을 물려받고 연금도 받으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알마의 집은 늘 빈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이제 성숙한 여인의 매력까지 더해져 그녀는 모든 모임의 주인공이자 꽃이 되었다. 알마는 발터 그로피우스와 재혼했다가 얼마 후 이혼했다. 그녀는 그 후에도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 작가 프란츠 베르펠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파란만장한 연애와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

그렇다 해서 말러를 지나치게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거나 음울한 인물로만 평가할 순 없다. 지휘봉을 잡은 그는 빈 궁정 오페라의 황금기를 이끌며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린 주체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거장이었다.

그의 음악 역시 단순히 절망과 어둠에 침전되지 않았다. 그의 교향곡들이 품은 세계는 어둠을 뚫고 나아가려는 ‘처절한 생명력’과 ‘자연을 향한 경외’, 그리고 ‘인간을 향한 눈물겨운 찬가’로 가득하다.

다만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만큼은, 시대의 거장도 자신의 내면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 채 완벽주의적 오만과 가부장적 모순이라는 인간적 한계를 드러냈다.

이 칼럼을 영상으로 · 1:36 아내의 작곡을 금지한 구스타프 말러의 이기적인 강요, 왜 그랬을까?
글쓴이

홍성광 번역가

홍성광은 서울대 독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독문학박사로, 독일 문학 및 철학 관련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독일 명작 기행』, 『글 읽기와 길 잃기』, 역서로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 니체의 『비극의 탄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토마스 만의 정치 에세이 『예술과 정치』, 『마의 산』(상·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상·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젊은 베르터의 고뇌』, 실러의 『도적들』,『간계와 사랑·빌헬름 텔』, 헤세의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 『싯다르타』, 카프카의 『성』,『소송』,『변신 외』,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총론』(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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