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영혼의 안식처”...횔덜린의 비극
[홍성광의 독일 작가의 사랑 이야기] 사후에 유명해진 독일 현대시인 횔덜린 가정교사로 주인집 부인과 금지된 사랑 고대 그리스 현자 ‘디오티마’에 연인 비유 사랑의 상실=영혼의 안식처 상실로 노래 실연후 정신질환 이어 36년 어둠 속에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 1770~1843)은 생전에는 무명에 가까운 불운한 시인이었지만, 사후에는 독일 현대시의 선구자 중 선구자로 꼽히는 시인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스토리는 시인 횔덜린의 비극적 생에 안타까움을 더한다.
그는 독일 낭만주의의 핵심 시인이자 철학자로 평가받는다. 신들이 떠나고 새로운 신들은 오지 않은 ‘궁핍한 시대’를 노래한 영성의 시인이기도 하다. 횔덜린은 당대에는 잊혔다가 사후 80여 년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독일 최고의 시인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특히 헤겔, 셸링과의 초기 교류와 그들로부터의 철학적 영향 덕에 독일 관념론의 발전에 일조한 중요한 사상가라는 평가에 오르기도 했다.
괴테와 실러의 그늘에 가려졌던 그는 20세기 초 그의 시들이 발굴된 후 헤르만 헤세, 마리아 릴케, 발터 벤야민, 모리스 블랑쇼 등 후대 지식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다. 횔덜린에게 큰 영향을 받은 마르틴 하이데거는 “횔덜린은 우리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사상가 중 한 사람”라고 평하기도 했다.

예민하고 불안정한 성격의 소년 횔덜린
횔덜린의 삶은 사랑과 광기, 그리고 예술적 천재성이 뒤섞인 비극적 드라마 같다. 특히,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이었던 주제테 공타르 부인과의 비극적 사랑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둘의 사랑은 끝내 결합으로 완성되지 못한, 그 때문에 더 순수하고 더 비극적인 사랑으로 남았다. 그 사랑은 시인에게 영감을 주었고, 동시에 파멸을 불러오기도 한 동력이었다.
횔덜린은 1770년 3월 독일 슈바벤 지방 네카 강변의 라우펜에서 교회 재단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두 살 때 아버지가 36세의 나이에 뇌일혈로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2년 뒤 뉘르팅겐 시의 시장과 재혼했다. 횔덜린은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새 아버지가 홍수를 막는 일에 나섰다가 독감으로 인한 폐렴으로 사망하는 불운을 겪는다.
소년 시절 그는 별것 아닌 일로 격분에 휩싸이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때때로 이유도 없이 울고 싶은 우울증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는 어떤 막연한 고뇌에 사로잡혔는데 그 고뇌가 어디서 찾아오는지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곤 했다.
열 네살이 되던 1784년 10월 횔덜린은 뉘르팅겐 근처의 덴켄도르프 초급 수도원 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고, 2년 후에는 헤르만 헤세가 다니다가 중퇴한 명문 마울브론의 수도원 학교에 진학한다. 4년뒤 마울브론 수도원 학교를 졸업하고 개신교 기숙사 장학생으로 튀빙겐 신학교에 진학했다.목회자가 되기 위한 길을 걸었지만 헤겔, 셸링과 교류하며 신학교에서 금지된 칸트의 비판철학과 고대 그리스 고전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안정된 노예 상태보다 ‘위험한 자유’를 선호했고 특히 횔덜린은 프랑스 혁명을 열렬히 지지했다. 그는 공포정치의 폭력은 거부했지만, 1789년 혁명의 원칙들에 대한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공화주의적 성향은 『히페리온』과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같은 대표작들에 그대로 묻어났다.
비극적 연인 공타르 부인과의 만남
1793년 횔덜린은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목회자의 길 대신 은행가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지적이고 교양 있는 안주인 주제테 공타르(Susette Gontard, 1769∼1802) 부인과 운명적 사랑에 빠져버린다. 23살, 24살 젊은 두 사람은 한 살 차. 두 사람은 문학과 음악, 철학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영혼이 닮았음을 느끼며 점점 가까워진다. 횔덜린은 연인의 모습 속에서 이상적인 존재의 상징인 영원한 여성 ‘디오티마’를 만들어낸다. 디오티마는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에게 사랑의 철학을 가르쳤던 현자였다. 횔덜린은 자신의 시 「디오티마」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매 시간 울리는 종소리마다
내 어린 시절의 고요한 날들을
나는 놀랍도록 다시 떠올립니다.
내가 그대, 그 하나뿐인 존재를 만난 뒤로.
[...]
내 마음은 그대의 하늘빛 음에 익숙하지 않으나,
그대의 노랫가락이 내 마음을 맑게 씻어주어
내 어둡고 흐린 꿈들은 달아나고
나 자신은 다른 사람이 되었노라.”
당시 24살이던 주제테 공타르 부인은 유부녀였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애초부터 이루어질 수 없었다. ‘금지된 사랑’은 두 사람에게 깊은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횔덜린에겐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횔덜린은 그녀를 단순한 연인이 아닌, 시적 영감의 ‘뮤즈’로 받아들였다.

횔덜린은 자신의 소설 『휘페리온』에서 공타르 부인을 이상화해 ‘디오티마’라는 이름으로 등장시켰고, 그녀를 향한 깊은 사랑을 노래했다. 플라톤의 『향연』에 소크라테스에게 사랑의 철학을 가르쳤던 현자로 나온 「디오티마」의 이름을 빌려 그녀를 영원한 이상적 사랑, 순수한 정신적 결합의 화신으로 노래한 것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인 철학자 히페리온은 디오티마를 처음 만났을 때, 마치 ‘영혼이 오랫동안 잃었던 본향을 되찾은 듯한 환희’를 느낀다. 디오티마는 히페리온에게 ‘인간이 어떻게 신성에 이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매개자였다. 디오티마가 결국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히페리온은 고독 속에서 상실과 절망을 견디며 존재의 의미를 되물었다. 이는 실제로 공타르 부인이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은 현실과 겹친다.
금지된 사랑, 이별과 밀회
횔덜린과 주제테의 밀회가 결국 은행가 공타르에게 발각됐다. 1793년에 가정교사로 들어갔으니 5년만이었다. 1798년 9월 25일 횔덜린은 쫓겨나듯 그의 집을 떠나게 된다. 다음해 6월 4일, 그는 편지에서 공타르 부인에게 이렇게 썼다.
“당신은 내가 지금껏 생각한 가장 숭고한 존재입니다. 당신의 눈빛 속에는 무한이 깃들어 있고, 당신의 침묵 속에서 내 마음은 안식을 찾습니다.”
횔덜린은 주제테를 단순히 ‘사랑하는 여인’이 아니라, 초월적·무한한 존재로 느꼈다. 1800년 1월 10일의 편지에는 이런 표현도 나온다. “디오티마여! 나의 영혼은 오직 당신 안에서만 집을 찾습니다. 세상은 내게 낯선 나라일 뿐이지만, 당신의 마음은 나의 고향입니다.” 이 구절은 『히페리온』 속 ‘디오티마와의 사랑이 곧 조국이며 자유’라는 사유와 그대로 이어진다. 주제테는 곧 ‘영혼의 조국’이자 그가 속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였다. 1800년 경에 쓴 시 「이별」은 공타르 부인과의 이별을 예감하는 모습이었다.
“우리는 헤어지려 했던가? 그것이 좋고 현명하다고 생각했는가?
우리가 그렇게 했을 때, 왜 그 행위가 살인처럼 두려웠던가?
아, 우리는 서로를 잘 알지 못한다,
우리 안에는 신이 다스리고 있으니까.
[...]
가리라.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나면
디오티마, 너를 여기서 볼지도 모르리라.
그러나 그때는 욕망이 이미 피 흘린 뒤일지니,
축복받은 이들처럼, 평화롭게
우리는 서로를 떠돌고, 대화는 오르내리며,”
횔덜린에게 이별은 단순한 감정의 상실이 아니었다. 사랑을 통해 우리 안에서 깨어난 신성을 죽이는 행위, 즉 영혼에 대한 살인인 것이다. 공타르 부인 없이는 이제 머물 곳이 없다. 횔덜린에게 사랑은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신이 인간 안에서 거주하는 방식이다. 디오티마와의 사랑은 존재의 근원적 안식처로 형상화된다. 따라서 이별은 한 존재의 죽음, 곧 ‘살인’으로 인식된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횔덜린의 시와 본질』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거주하기 위함이고, 거주하는 방식은 시적으로 사는 것이다. 횔덜린에게 사랑은 존재 속으로 거주하는 방식이었다”라고 말한다. 그에게 횔덜린의 사랑은 단순한 연애적 사건이 아니라, 존재(Sein)와 현존재(Dasein)의 관계를 드러내는 실존적 사건이다. 시 「이별」은 단순한 사랑의 헤어짐이 아니라, 존재론적 이별, 신성과 인간성의 분리, 그리고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벌어지는 영혼의 비극적 긴장을 다루고 있다.
1801년 2월 2일의 편지는 심각한 어조를 담고 있다. “오, 나의 사랑이여, 만약 더 이상 당신을 볼 수 없다면, 모든 것이 내겐 무덤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나의 아침이자 저녁이며, 내 노래의 숨결이기 때문입니다.” 이 절규는 곧 그녀의 죽음 이후 현실이 되어, 횔덜린을 무너뜨렸다. 이처럼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횔덜린의 정신에 큰 상처를 남겼고, 결국 그는 정신질환에 시달리게 된다.
사랑의 안식처를 상실한 실향민
그는 1801년 12월에는 프랑스의 보르도에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무려 50일 동안 여행한다. 이때부터 횔덜린은 정신착란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주제테의 병환 소식에 횔덜린은 1802년 5월 가정교사 직을 그만둔 것으로 보인다. 1802년 6월 22일, 횔덜린이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타르 부인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풍진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 소식을 듣고 그의 정신착란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횔덜린은 공타르 부인과의 사랑을 ‘영혼의 고향’으로 불렀다. 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연인의 상실이 아니라, 게오르규 루카치가 말하는 근대인의 ‘고향 상실’처럼 횔덜린에게 고향 상실은 정서적·정신적 공동체 상실이었다. 내면에서 기대고 의지하던 정서적 ‘안식처’의 상실, 곧 자신이 거할 세계 전체의 상실이 그를 ‘실향 상태’로 몰아넣었고, 결국 평생 지속된 광기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실향」은 연인 공타르 부인의 죽음 이후 정신적 몰락기에 나왔다.
“슬프구나! 겨울이 오면
나는 어디서 꽃을 얻을 것이며,
어디서 햇빛을 찾으랴,
또 대지의 그림자를?
성벽은 서 있고
말없이 차갑게, 바람 속에서
깃발은 부서지듯 울린다.”
여기서 꽃, 햇빛, 대지의 그림자는 모두 디오티마(주제테)가 상징했던 생명과 사랑, 고향을 가리킨다. 그녀가 죽은 뒤 횔덜린은 자연조차 더 이상 자신에게 따뜻한 고향을 제공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대신 남는 것은 차갑고 언어 없는 성벽,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 소리뿐이다. 이로써 그는 곧 세계와 단절 상태가 되고, 삶의 황폐화를 겪는다. 그러나 횔덜린은 주제테의 사랑이 썩지 않고 자연의 영혼처럼 신들의 빛 속에서 영원히 피어난다고 노래했다. 이는 사랑이 죽음을 넘어, 신적인 차원에서 영속한다고 믿으려는 절실한 고백이다.

찬란하게, 자유롭게 미지의 세계로
디오티마를 잃고 그 자신도 잃어버린 횔덜린. 그는 길고 무의미한 여생을 생각하며 탄식하며 지냈다. 친구 징클레어의 도움으로 그는 1804년 도서관 사서직을 얻었는데, 이때가 그의 생애 마지막 안정기였다.
1806년, 횔덜린은 튀빙겐의 정신 요양 병원에 수용되었으나 병이 회복되지 않아, 1807년부터 튀빙겐의 목수 침머(Zimmer)의 탑 방으로 옮겨졌다. 탑 속에 갇힌 상태에서도 횔덜린의 시 정신은 시들지 않고 계속 타올랐다.
시인 횔덜린은 침머 집안의 살뜰한 보살핌 덕에 횔덜린은 탑 2층 방에서 36년 세월을 보낸다. 그는 더 이상 디오티마의 죽음에 절규하지 않고, 신적 조화 속에서 부족한 삶이 보상될 것이라 담담하게 노래한다. 정신적으로 붕괴된 이후의 작품은 초기의 장엄하고 철학적인 시와는 달리 짧고 단순하며,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을 띠고 있다.

1843년 6월 7일, 횔덜린은 73세의 나이로 평온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비에는, 그의 삶을 응축해 보여주는 시 「운명」이 새겨져 있다.
“폭풍 중 가장 성스러운 폭풍 가운데
나의 감옥 벽 무너져 내리기를,
또한 내 영혼 한층 찬란하게
그리고 한층 자유롭게 미지의 세계로 물결쳐 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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