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명 조민제 변호사
  • 문화
  • 입력 2022.08.28 08:26
  • 수정 2022.08.29 10:49

무궁화② : ‘무궁화 삼천리 강산’에 숨은 뜻이?

[조민제의 식물 이름 이야기]
애국가 가사 내용, 1777년에 지어져
'친일 가사'라는 주장, 위험한 생각
무궁화 '상징성'과 실제를 분별해야

경기도 분당 소재 아파트단지에 식재된 무궁화. 사진=조민제
경기도 분당 소재 아파트단지에 식재된 무궁화. 사진=조민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이 노래 가사를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없을 것이다. 애국가의 후렴구다. 지금까지 알려지기로는 1896년에 독립협회에서 독립문을 세우는 정초식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멜로디로 부른 노래가 최초의 애국가라고 여겨지고 있다. 그때의 후렴구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죠션 사람 죠션으로 길이 보죤하세"였다. '죠선'이 '대한'으로 바뀌고 약간의 표기법이 차이가 있는 것 외에는 현재의 가사와 매우 유사하다.

여기에는 몇가지 논란이 있는데, 후렴구를 포함한 애국가의 작사자가 누구인지 문제와 '무궁화 삼천리(화려)강산'이 무슨 의미인지 문제가 그것이다.

애국가 가사 후렴구의 원형에 대해

애국가의 작사자와 관련하여 윤치호설, 안창호설, 민영환설, 공동작사설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주장됐지만, 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을 보지 못한 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옛 문헌을 살피면 1896년으로부터 100여년 이전에 애국가 가사의 후렴구와 매우 유사한 시의 문구가 발견된다.

檀木槿花三千里(단목근화삼천리) 박달나무와 무궁화는 삼천리에

不階尺土奄有之(불계척토엄유지) 거친 땅도 가리지 않고 오래 자라고 있구나

長白山高靑海濶(장백산고청해활) 백두산은 높고 동해는 넓나니

緜緜瓜瓞無窮期(면면과질무궁기) 자손들 번창은 무궁하리라

위 시의 문구는 조선 정조 시대에 백두산 부근의 함경도 경흥부사를 지낸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1777년에 태조 이성계의 왕업의 터전을 일구었던 장소를 고증하고 지은 삭방풍요(朔方風謠; 북쪽에서는 부는 바람의 노래)의 연작시 중 '토우기(土宇基; 흙집터)'에 나오는 내용이다. 무궁화가 삼천리에 자라는 강토에 대대로 자손들이 번창하라는 내용은 표현이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현재 애국가의 후렴구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또한 백두산의 높음과 동해의 넓음은 애국가 1절의 시작부와 이어져 있다.

홍양호는 경흥부사를 마치고 서울에 복귀한 후 자신의 저술 내용을 정조에게 진상했고 그 핵심적 내용은 1799년(정조 23년)에 편찬된 『흥왕조승(興王肇乘)』에 반영됐다. 즉, 홍양호의 '토우기'라는 시는 최소한 당시의 식자들에게는 꽤나 알려져 있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애국가의 작사자가 누군인지와 무관하게 애국가의 가사는 새로운 창작물이 아니라 오랜 세월 전승되는 내용이 반영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애국가 작곡가에 대한 친일 논란을 넘어 애국가 가사조차 친일이라는 주장이 담긴 책이 나오고, 이 책에 추천글을 올린 김삼웅 (전)독립기념관장과 김원웅 (전)광복회장의 논지에 따르자면, 일제의 마수가 1777년에 이미 조선을 덮쳤고 이를 정조가 반영함으로써 우리는 이미 그 때부터 식민지이었거나 친일국가가 만들어진 꼴이 된다. 일제 강점을 미화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친일적 사고라면 과장이 될 것인가?

'무궁화 삼천리 강산'의 깊은 의미

일제강점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우리는 국가 주도하에 온 나라를 무궁화 강산으로 만들겠다고 장소와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무렇게나 무궁화 심는 것을 운동으로 벌인 적이 있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을 문구 그대로 해석한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홍양호의 삭방풍요의 시에서 등장하는 무궁화 삼천리(槿花三千里)는 온 나라에 저절로 무궁화가 자란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무궁화 ‘칠보’(경기도 분당 식재). 사진=조민제
무궁화 ‘칠보’(경기도 분당 식재). 사진=조민제

18세기 중엽의 시기는 청나라의 침입을 받아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오랫동안 북벌론이 득세했으나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판명되고 북학파가 등장하는 등 청나라와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때였다. 그때 청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에서 조선을 표현하는 또 다른 이름이 ‘槿域’(근역: 무궁화강산 또는 무궁화나라)이었다. 무궁화처럼 겸손하지만 굽히지 않고 끊임없이 피어나는 나라가 조선이라는 뜻이었고, 무궁화와 동일시되는 한민족이 사는 나라라는 상징적 표현이기도 했다. 1765년의 일이었고 홍양호의 '토우기'라는 시는 그 직후에 적혀진 것이다. 이처럼 무궁화 삼천리는 근역과 그 뜻이 잇닿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옥(李鈺, 1760~1815)은 이와 유사한 시기인 1803년에 『백운필(白雲筆)』을 저술하여 키가 큰 나무인 오동나무 아래 메마른 땅에 무궁화를 심으니 죽지는 않지만 꽃이 제대로 피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국가와 공동체를 표현하는 상징성과 실제 꽃(화훼)식물로서 무궁화를 기르고 키우는 일이 서로 같지 않다는 사실을 선조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옛사람들의 지혜를 찬찬히 되새겨 볼 필요가 더욱 절실한 때이다.

※ 조민제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사법연수원을 29기로 수료한 후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야생 식물 탐사와 옛 식물에 대한 기록을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 ‘조선식물향명집 사정요지를 통해 본 식물명의 유래’와 책으로 ‘한국 식물이름의 유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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