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미·일, 한국 양해없이 북한과 대화 안된다”

[고수석의 통일수첩] 노태우 전대통령 북방외교 철학은“눈치보지 말라” 남북문제는 남북한이 해결해야 김대중도 북방외교에 “아주 평가받을 일” 칭찬 북미,북일 수교 미완성은 아쉬움 남아

1990년 5월 제1차 남북총리회담에 참석한 북한 연형묵 총리를 청와대에서 접견하는 노태우 전 대통령. 사진= 연합뉴스 자료
1990년 5월 제1차 남북총리회담에 참석한 북한 연형묵 총리를 청와대에서 접견하는 노태우 전 대통령. 사진= 연합뉴스 자료

[고수석 북한학 박사]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한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들에 의해 꼭 이뤄지기를 바란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유언 가운데 한 대목이다. 행여나 의례적인 말이겠거니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다. ‘노태우’이름 석자에 12·12, 5·18, 6·29가 워낙 강하게 각인돼서다.

고인은 남북한 평화통일에 남다른 인식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를 회고록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자유진영에 속한 나라들이 공산진영의 나라들과 마음대로 교류하고 수교하고 다하는데 우리는 왜 못하는가? 남의 눈치 보고, 추종하고, 이게 무슨 자주 외교권을 가진 나라인가. 그러고도 민족의 자존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북방외교에 내재된 나의 기본 철학은 바로 이것이다”고 밝혔다.

그는 남북한 문제를 남북한이 해결한다는 ‘당사자 해결’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실천 방안으로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7·7 선언이다. 북한을 ‘적’이 아닌 ‘동반자’로 포용하고 북한과의 교류와 왕래, 그리고 교역의 길을 트자는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제시했다. 뒤이어 그해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남북정상회담’도 제안했다. 북한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고인은 미국과 일본이 한국의 양해 없이 북한과 상대하는 것을 꺼려했다. 그 사례는 다음과 같다.

먼저 미국이다. 북미는 1992년 1월 워싱턴에서 북미 고위급 회담을 열었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처음 열리는 고위급 회담이었다. 아놀드 캔터 미국 국무부 차관과 김용순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만났다. 미국은 회담에 앞서 한국의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에게 캔터 차관과 강석주 북한 외교부 부부장의 회담을 갖고 싶다고 연락했다.

고인은 미국에게 “좋다. 단 한번이다. 그러나 상대는 강석주 부부장이 아닌 김용순 비서로 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양해했다. 이유는 강석주 부부장보다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김용순이 낫다고 판단했다. 또한 김용순은 김정일의 측근으로 그의 파티 친구이기도 했다.

미국은 한국의 조언에 따라 북한에 요구해 워싱턴에 김용순 비서를 초청했다. 고인은 미국에게 한국을 제쳐놓고 북한과 대화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또한 북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고인은 북핵문제에도 북미 직접대화를 반대했다. 그는 미국에 “핵에 관한 문제라도 북한과의 직접적인 대화는 안 된다. 우리를 통해야 한다”고 밝혔다. 북한의 핵개발은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한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도 이끌어냈다.

다음은 일본이다. 1990년 9월 가네마루 신(金丸信)자민당 부총재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다. 일본 정계의 실력자였다. 가네마루 부총재가 방북하기 사흘 전 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 일본 총리가 고인에게 전화했다. 가이후 총리는 “일본과 북한 관계는 한중, 한소, 북미 등 주변국 간의 관계와 밸런스를 맞춰 가면서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1990년 9월 방북 당시 가네마루 신 전 일본 부총리(왼쪽부터)와 김일성 북한 주석, 다나베 마코토 일본 사회당 부위원장.
1990년 9월 방북 당시 가네마루 신 전 일본 부총리(왼쪽부터)와 김일성 북한 주석, 다나베 마코토 일본 사회당 부위원장.

가네마루 부총재는 방북 이후 보름쯤 지난 뒤 한국을 방문해 고인을 만났다. 그는 “한국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으며 한국과 충분히 상의하겠다. 북한과 대화함에 있어 7·7선언의 정신에 부응하고 남북한의 분단 상황을 항상 염두하겠다”고 말했다. 고인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가네마루를 심문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기록했다.

고인은 이런 생각으로 냉전에서 탈냉전으로 바뀌는 세기적 변화에 주도적으로 대처했다. 시기별로 구체적으로 나열하면 한소 수교(1990년 9월 30일), 남북한 UN 동시 가입(1991년 9월 18일), 남북한 기본합의서 체결(1991년 12월 13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1991년 12월 31일), 한중 수교(1992년 8월 24일) 등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0년 12월 14일 옛 소련 크렘린궁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0년 12월 14일 옛 소련 크렘린궁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지금에서 돌이켜보면 한국 외교사에 이렇게 화려한 적이 없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2007년 노태우 정부의 통일·외교 정책에 대해 “통일 문제에 대해서 그런 자세를 취한 거나, 또 소련이나 중국하고 수교한 것은 아주 평가받을 일”이라고 칭찬했다.

고인은 남북정상회담을 할 뻔했다. 윤기복 북한 노동당 대남비서가 1992년 4월 초 김일성의 특사로 친서와 초청장을 갖고 서울에 왔다. 윤기복은 남한에서 올라간 남로당 사람들이 숙청되는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그가 가져온 초청장은 공교롭게도 초청 시기가 김일성의 80회 생일(4월 15일)과 맞물렸다.

고인은 1985년부터 대북 창구를 담당해 온 박철언 체육청년부 장관의 조언을 듣고 거절했다. 박 장관은 김일성의 초청이 ‘돈’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했다. 고인은 정상회담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모양새가 너무 나쁘다고 판단했다. 김일성 생일축하행사의 일환으로 정상회담을 이용하려는 북한의 계산된 의도에 말려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노태우 회고록).

화려한 북방정책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대목도 있다. 한소 수교, 한중 수교처럼 북핵 문제가 터지기 이전에 북미 수교, 북일 수교로 연결시키지 못한 부분이다. 특히 독일 통일에 코를 박고 있던 미국을 한반도로 더 끌어들이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고인이 생각한 북방정책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 그는 회고록에서 북방정책을 1단계, 소련·중국·동구권과의 수교→2단계, 남북한 통일→3단계, 우리의 생활·문화권을 연변·연해주 등으로 확대라고 기록했다. 이를 위해 KTX를 부산~서울이 아니라 평양~신의주~시베리아~유럽까지 구상했다.

고인의 장지는 그의 북방정책 또는 남북한 평화통일 의지를 담아 파주 통일동산 인근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의 유언에 담긴 뜻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단계, 3단계는 후손들의 몫이니 영면하시길.

글쓴이

고수석 북한학 박사

고수석 박사는 중앙일보 기자로 20여년 동안 통일이 한국의 성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통일․북한 분야를 취재했으며 고려대에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중앙일보에 ‘고수석의 대동강 생생 토크’, 중앙SUNDAY에 ‘평양탐구생활’을 기획연재했다. 저서로는『북한을 움직인 30인』, 『김정일과 IT혁명』등이 있다. 지금은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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