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의 유엔 연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고수석의 통일수첩] 기시다, 두번째 ‘북일 정상회담’ 제안 냉각된 남북관계를 오히려 활용하려 해 북일 시계보다 한일 시계 먼저 돌려야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기시다 연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윤석열 대통령의 영국‧미국‧캐나다 순방이 끝났다. 윤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에 파묻혀 주목받지 못한 부분이 있다. 자유와 연대를 강조하는 등 다소 공허한 단어를 나열한 윤 대통령의 유엔 총회 기조연설과 달리 눈길을 끈 사람이 있었다. 바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연설이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21일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와 핵·미사일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해결한다는 방침에 변함이 없다”면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조건 없이 만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이 시점에서 북‧일 정상회담 제안이 다소 뜬금없는 얘기일 수 있다. 게다가 올해 북한의 잦은 탄도미사일 발사로 북한에 대한 일본 여론도 나쁘다.
그런데 기시다 총리가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김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지나칠 정도로 심혈을 기울이는 일본 정치 문화에 비춰보면 그냥 뜬금없는 얘기가 아니다. 이번 기시다 총리의 북‧일 정상회담 제안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10월 총리에 취임하면서 이미 제안했다. 전 세계 언론과 각국 정상들이 모인 유엔 총회에서 한 번 더 북일 정상회담을 언급한 것은 뭔가 치밀한 계산이 있어 보인다.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닷새 전으로 돌아가 보자.
북한 외무성은 지난 16일 송일호 대사의 명의로 ‘일본 정부는 북‧일 평양선언을 백지로 만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제목의 담화를 발표했다. 2002년 9월 17일 김정일-고이즈미의 북‧일 평양선언 20주년을 하루 앞두고서다. 송 대사는 “오늘의 북‧일 관계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번져지겠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일본 정부의 태도 여하에 달려있다”고 언급했다. 일본에 북‧일 평양선언의 약속을 지키라는 뜻이다.
북‧일 평양선언은 제1항에서 국교 정상화를 조기에 실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고 약속했다. 국교 정상화 회담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는 의미였다. 제2항은 일본이 과거의 식민지 지배에 따라 조선인에게 커다란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죄의 뜻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한국과 일본의 1965년 6월 한일기본조약에는 과거 역사에 대한 책임과 반성의 뜻이 충분히 표현되지 않았지만, 북‧일 평양선언은 이를 분명히 했다.
북한은 국교 정상화와 그에 따른 일본의 배상금을 기대하고 있다. 북한은 현재 장기화한 유엔 대북 제재와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죽을 맛이다. 특히 올해 가뭄‧수해로 식량난이 심각해져 해외 주재 대사관이 식량을 구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북한의 어려운 상황을 고려하면 북한의 ‘구세주’는 일본이 될 수 있다. 윤석열 정부에 대한 김 국무위원장과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의 막말을 보면 한국에 대한 기대는 없어 보인다. 이에 따라 북한과 일본 사이에 공간이 생긴 것이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이례적으로 송 대사가 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지금 북‧일 관계에 현안이 없어 그냥 넘어가거나 외무성 대변인이나 학자들이 담화를 발표할 뻔했다. 송 대사는 2004년 4월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2차 방북을 협상하는 북일 교섭에 외무성 부국장으로 참가하면서 북일 국교 정상화 담당 대사까지 올랐다. 북한이 북‧일 교섭에서 잔뼈가 굵은 그를 내세운 것은 북‧일 국교 정상화에 대한 의지로 읽힌다.
북일 수교는 일본 외교의 숙원 사업
따라서 기시다 총리는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한 듯하다. 역대 일본 총리들이 외교적 업적으로 삼고 싶어 하는 것은 쿠릴 열도 4개 섬 반환과 북일 국교 정상화다. 현재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상황을 고려하면 쿠릴 열도 4개 섬 반환은 아예 시도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북일 국교 정상화는 노려볼 만하다.
미국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국내 경제문제로 한반도 상황을 챙길 여유가 없는 것도 기시다 총리에게 기회다. 미국을 대신해 북한과 접촉할 수 있고 북미 대화를 끌어낼 수 있다. 안팎으로 답답한 상황에 놓여 있는 북한도 돌파구가 필요하다. 불편한 한국보다 많이 내키지는 않더라도 가려운 곳을 긁어 줄 수 있는 일본이 낫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 있다. 기시다 총리가 유엔 총회에서 언급한 일본인 납치 문제다. 일본이 파악하고 있는 납치자 숫자는 12명이다. 북한은 이 가운데 8명이 이미 사망했고 나머지 4명은 아예 북한에 입국한 적이 없다고 맞서고 있다. 기시다 총리로서는 일본인 납치 문제를 풀지 않고서 북일 국교 정상화에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북한이 지난 25일 탄도미사일을 동해로 발사하면서 찬물을 끼얹었다. 26일부터 실시된 한미 해상 연합훈련에 대한 무력 시위로 보인다. 기시다 총리는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에 대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위반되는 것으로 강력히 비난한다”고 말했다. 일본 내 여론을 의식한 듯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원론적인 입장이다.
기시다 총리가 던진 북일 정상회담 제안은 북한으로 넘어갔다. 김 국무위원장이 진정으로 고민할지는 알 수 없다. 추측건대 주판을 튕겨보고 이익이라고 판단하면 조심스럽게 나올 가능성은 있다.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한 사과는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년 전에 했기 때문에 부담은 없다. 다만 일본이 주장하는 12명에 대해 일본에서 설득할 만한 자료를 제시하는 것이 남았다.
이 문제는 김 국무위원장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언제까지 되돌이표를 반복할 수 없다. 인권 문제는 국제적인 이슈다. 북한이 걱정하는 것은 자료를 제시하더라도 일본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이다. 이는 북한과 일본이 신뢰하는 국제기구를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 현재 코로나 상황이 지속되고 있어 접촉이 어렵지만, 상황에 따라 과거처럼 송 대사와 일본 정부 관계자가 만나면 된다.
한국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이 현실화가 되면 한국 외교가 난감해진다. 한일 관계가 아직 답보상태이므로 북일 사이에 한국의 공간이 있을지 의문이다. 20년 전 고이즈미 방북은 김대중 대통령이 주선해 성사됐다. 2002년 3월에 열린 김대중-고이즈미 정상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고이즈미 총리에게 북한과의 정상회담을 제의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납치 문제 해결에 진전이 있으면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해 4월에 특사로 북한을 방문한 임동원이 일본 측의 입장을 전달하면서 성사됐다.
한일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윤 대통령이 뉴욕에서 약식회담으로 기시다 총리를 만났다. 정상회담이라고 하기에 너무 짧은 순간이었다. 대통령실의 설명대로 시작에 불과할 수 있다. 지금부터 여야를 불문하고 지일파(知日派)의 지혜를 모두 모아 한일 관계를 개선하려고 해야 한다. 그래야 북일 시계보다 한일 시계를 먼저 돌려 동북아에서 한국의 공간을 넓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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