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한번은 봄이 와요. 도전해보세요”

72살에 대학교 합격한 전말다씨 공부 못한 컴플렉스, 평생 마음에 쌓여서 남편 사별이 오히려 계기...2년반 만에 “배운 사람들, 공부못한 사람 무시하지 말길” “꿈은 가까이 있어요. 손뻗으면 닿을 곳에”

여고 교복을 입은 전말다씨. 2년동안 방학도 없이 토요일까지 등교해 수업일수를 채웠다.
여고 교복을 입은 전말다씨. 2년동안 방학도 없이 토요일까지 등교해 수업일수를 채웠다.

한국전쟁이 터지던 해 태어나서 젊은 시절을 온갖 고생으로 점철한 인생. 그 후반기에 각고의 도전 끝에 보람있는 성취를 이뤘을 때 기쁨은 어떨까.

“수능 시험때 받았던 샤프와 컴퓨터 사인펜을 달라는 손녀에게 왜 필요할까 궁금했는데, 그걸 학교에 가져가서 ‘우리 할머니, 수능 보셨다’며 친구들에게 자랑했다고 해요. 그 샤프, 컴퓨터 사인펜으로 공부하면 공부가 잘될 거 같다고 함께 좋아해주었어요.”

성취란 72살의 나이에 받아든 ‘대학교 합격증’이다. 대학교 입학이 뭐라고, 거기 나와도 일자리 잡기 어려운 시대다. 하지만 전말다 씨에겐 공부는 70년 평생동안 마음 속에 원망으로 남았고, 꿈으로 간직했고, 손으로 움켜쥘 간절함이었다. 그와 서면으로 인터뷰하고 합격발표 후엔 직접 만나 뒷얘기를 들었다. 나이에 비해 젊다고 했더니, “나, 이제 대학생이잖아”라며 소녀처럼 활짝 웃었다. 인터뷰 문체를 가급적 피하려, 육성과 자필을 그대로 소개한다.

늦게 공부를 하게 된 사연

저는 경기도 양평의 용문 산골마을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집이 워낙 가난해 진학 대신 동생들을 돌보고 어머니 집안 일을 도울 수 밖에 없었어요. 친구들이 중학교 등교하는 시간에 저는 집 앞에 있는 개울에서 동생들 기저귀와 옷가지들 빨래를 하러 가곤 했어요. 그게 그렇게 창피했고 나도 중학교에 가고 싶기도 해서 어머니에게 ‘중학교 보내 달라’고 몇날 며칠을 울면서 졸랐는지 모릅니다. 그때 실컷 두들겨 맞고 머리채까지 잡혀서. 공부에 대한 생각을 접게 되었어요. 그렇게 저는 국졸이었죠.

어린 나이에 서울로 혼자 상경해 남대문 시장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성실한 남편을 만나 집도 장만하고, 한동안은 나름 풍요로운 삶을 살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항상 ‘배우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이 가슴속 한켠에 자리잡고 있었고, 저는 애써 그 모습을 외면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않게 IMF위기가 오면서 삶이 일순간에 바뀌었어요. 남편이 운영하던 공장, 가게를 모두 접어야 했고, 비행기표 한장 달랑 들고 미국으로 떠난 둘째 아들은 멕시칸 시장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어려운 유학생활을 했죠. 저도 무엇이라도 했어야 했기에 칼국수집을 시작했어요. 그것도 잠시, 미안함과 걱정에 시달리던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졌죠.

남편이 세상을 떠나던 날, 남편은 임종을 지켜본 큰아들에게 “그동안 엄마가 정말 고생 많이 했으니, 이제부터는 엄마하고 싶은 것 하게 해드려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해요. 그 말을 전해들은 저는 70년 한스러운 인생을 모두 보상 받은 느낌이었고, 이 기회로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그래서 큰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엄마는 여고생이 되고 싶다”고.

공부를 시작하고서

지금부터 3년 전부터 시작했어요. 학교를 가기로 결정한 후 검정고시를 준비해 주는 양원주부학교, 일명 ‘아줌마 스쿨’에 다니면서 3개월 만에 중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했지요. 고교 공부는 지난해 3월 마포구에 있는 일성여고에 입학하면서부터였어요. 처음 학교에 등교하던 날, 찰랑찰랑한 단말머리를 하고 학교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70년을 상상하고 꿈꿔온 여고생이 된 순간이었으니까요.

시작하고 나서부터는 공부가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어요. 본업인 ‘성산동칼국수’집을 운영한 지 20년이 넘었어요. 장사 준비를 하려면 김치를 담궈야 하고, 칼국수면도 뽑아야 하고. 여름에는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기는 해요. 저희집은 여름에 콩국수 장사를 할 때 가장 바쁘답니다. 가족끼리 운영하는 조그만 식당이지만, 나, 큰아들, 며느리가 각각 해야 할 일들이 정해져 있어서 누구 하나가 빠지면 그 일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가족들이 고생하게 되거든요. 특히 한참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 아침시간에 학교에 가 있게 되면, 나 때문에 힘들어할 가족들이 걱정되어 어떻게 할까 고민이 되긴 했습니다.

게다가 학교를 다니기로 결정했던 해, 공교롭게도 암치료를 받았던 며느리의 병이 재발해 가게 준비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시 한번 심각히 고민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힘들게 남편이 세상을 떠나며 준 기회를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큰아들과 며느리에게 ‘나는 공부를 멈출 수 없다. 너는 열심히 치료 받고, 나는 열심히 공부하고. 우리 각자 자리에서 충실히 견뎌보자’고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내가 좀더 일찍 일어나서 움직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김치 담그고 식재료 손질하고...육체적으로는 힘들었을 지 몰라도, 학교에 갈 준비를 한다는 생각에 즐겁기도 했고, 새벽잠이 없는 요즘, 소일거리가 생긴 기분이기도 해서 기쁜 마음으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새벽, 주방에서 영어회화 테이프를 틀어 놓고 공부하면서 가게 일을 준비하는 시간이 저에게는 힘들고 피곤한 시간이기 보다, ‘기쁨’이고 ‘행복’의 순간이었습니다.

자신과 큰아들 내외가 운영하고 있는 '성산동 칼국수'집 주방에서 김치를 담그고 있는 전말다씨.
자신과 큰아들 내외가 운영하고 있는 ‘성산동 칼국수’집 주방에서 김치를 담그고 있는 전말다씨.

72살의 공부는 어땠을까?

공부가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실제로 공부 같은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어떻게 보면 미국에 있는 둘째 아들네 손자, 손녀들 때문이었습니다. 손자, 손녀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인으로 자라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한국어 보다는 영어를 사용하게 됐고 한국어를 불편해 하는 것을 보면서, 손주들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려면 내가 먼저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새벽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영어회화 테이프를 듣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정말 아무 것도 들리지 않던 것이 10년여 지나니 그래도 기초적인 생활회화 수준이긴 하지만 ‘아 저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중이구나’ 정도의 느낌은 맞출 수 있겠다 싶어 공부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죠. 영어 자신감 덕에 검정고시도 쉽게 통과할 수 있었고, 고등학교 수업을 받으면서도 영어가 부담스럽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 다른 학우들보다 훨씬 편하게 수능을 준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대학 수능시험 준비는 선생님께서 도와주신 입시요강을 따랐어요. 이선재 교장선생님, 강길화 담임선생님이 많이 격려해주고 도와주셨습니다. 저는 이번 수능에서 국어, 영어, 사회 이렇게 3과목 시험을 보았는데, 고등학교때 배운 모든 과목들을 시험치는 게 아니고 지원하는 학교, 학과마다 치르는 시험이 다르더군요. 준비과정이 복잡했고, 시험보는 날 매우 초조할 것 같았지만, 정작 수능날이 되니 기분이 더 좋았습니다. ‘시험을 보러 온 것’ 그 자체가 저로선 너무나도 행복한 경험이었어요. 이렇게 시험장에 앉아 있고, 나를 아는 주변사람들이 관심 갖고 응원해주는 모습은, 70년을 뛰어온 마라토너가 결승선에 들어오며 박수를 받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시험이 시작되니 쉬운지 어려운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간이 흘러가 버려서 아쉽기는 했어요. 국어는 지문 몇번 안 읽어 본 것 같은데 ‘10분 남았다’는 방송이 나오고, 나름 자신있다고 생각했던 영어도 잘 모르겠고,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만학도가 준비한 수능 실력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생한 젊은 수험생들과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하겠죠. 싱싱한 우리 젊은 친구들이 훨씬 잘할 수 밖에 없어요.

‘젊었을 때 공부는 쌓이는데, 나이 먹어서 공부는 흔적만 남긴다’고 하잖아요. 금방 들었던 것들도 ‘본 적 있다’는 것만 생각나고 무슨 내용인지는 생각 날듯말듯 애간장을 태우게 하죠. 그래도 영어 듣기평가를 하면서 대충이라도 알아듣고 답을 적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나도 뿌듯하기만 했습니다.

저는 수학과목을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학시험 시간 100분 동안 문제지 없이 앉아 있었어야 했는데, 그시간조차도 지루하거나 피곤하지 않고 즐겁게만 느껴졌습니다. 그자리에 젊은 수험생들과 같이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습니다.

공부의 계기를 제공해준 둘째 아들내외와 순자, 손녀들. 오른쪽에 생전의 전말다씨 남편 함께.
공부의 계기를 제공해준 둘째 아들내외와 순자, 손녀들. 오른쪽에 생전의 전말다씨 남편 함께.

자식들과 손주들 반응은?

아무리 저를 위해주고 편하게 대화하는 아들들이지만, 예전에는 나누는 대화가 ‘밥은 먹었니? 별일 없니? 애들은 잘지내니?’ 같은 똑같은 대화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학교를 다니면서부터는 달라졌죠. 수업 때 이해가 잘 안되던 부분들을 아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하니, 매일매일 새로운 이야기거리가 생겨서 좋았죠. 때로는 수업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아들에게 해주면, “오…어머니께서 이런 것도 배우셨어요? 젊은 친구들도 어려워서 포기하는데...대단하세요”라고 격려해주기도 했어요.

아들들 뿐만 아니라 손녀와 나누는 대화도 많이 바뀌었어요.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첫째 아들네 손녀도 함께 고등학교 1학년에 올라갔는데, 손녀는 “시험은 언제 보냐, 이번 시험범위는 뭐냐. 이 수학문제 어떻게 푸는거냐” 등등 같은 여고생들만이 나눌 수 있는 대화를 나눴고, 그래서 더 가까이 친하게 지내게 되었지요.

특히, 이번 수능이 끝나고는 손녀가 ‘수능 시험때 받았던 샤프와 컴퓨터 사인펜을 주시면 안되겠냐’고 해 내주었더니, 그걸 학교에 가져가서 ‘우리 할머니, 수능 보셨다’며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받은 샤프, 컴퓨터 사인펜으로 공부하면 공부가 잘될 거 같다고 함께 좋아해주었습니다. (전말다씨는 2년제 수업을 받았고, 손녀는 3년제여서 내년에 3학년에 오른다)

남편과 사별후 둘째 아들이 있는 미국을 방문한 전말다씨와 첫째 아들 가족들.
남편과 사별후 둘째 아들이 있는 미국을 방문한 전말다씨와 첫째 아들 가족들.

대학 입시 결과는 원하던 곳 ‘합격’

필요한 만큼 점수가 나오길 기대합니다. 11월초 명지대 심리치료학과 면접전형을 치렀고,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추가 인터뷰 당시에 이미 합격한 상태였다). 조금만 기다리면 결과를 알 수 있겠네요. 심리치료학과에 입학해서 마음이 아파 몸까지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삶의 경험과 내가 아는 상식을 나누면서 살고 싶은 생각입니다.

대학 진학 이후 어디까지 공부를 할 지,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지 아직 분명히 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해보고 싶어요. 학교에 가서는 영어공부를 깊이있게 하고 싶어요.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전문성 있는 영어를 배우고 싶어요.

대학 수능 고시장에 들어가며 밝은 표정을 취한 전말다씨.
대학 수능 고시장에 들어가며 밝은 표정을 취한 전말다씨.

합격한 소감 한마디

70년 인생을 살면서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항상 감추고 살았고 ‘배우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항상 움츠려 있었어요. 배우지 못함이 내 탓이 아니었음에도 한없이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공부를 시켜준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마음이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고, 누구도 나에게 그 길을 보여주는 사람도 없어서 저에게 ‘공부’는 그저 저 멀리 있는 꿈 같은 것이었죠.

그런데, 용기내서 첫 발을 딛고 보니 가족들을 포함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응원하고, 우리 일성여고 선생님들처럼 제 꿈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난에 힘들어 했던 소학교 시절, 용문 산골짜기에서 함께 지내던 60년지기 고향친구들에게도 제2의 인생에 도전하라고 당당하게 권유했고, 4명 모두 새롭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친구들이 저에게 ‘공부를 시작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하는데, 저는 단지 “모른 체 하고 있었던, 이미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것을 풀어낸 거야”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모두는 마음속 한켠에 늘 하고 싶은 것을 품고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표현을 안하고, 가끔은 잊었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꿈’ 말이죠. 용기를 내서 첫발을 내딛으세요. 그리고 고집을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주위를 바라보면 길이 보입니다. 고집을 버리고 남의 이야기를 들으면 공부도, 그리고 다른 모든 것도 답이 열린다고 믿습니다.

꿈은 각자의 손이 닿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잡으려 손을 내밀기만 하면 잡히는 곳인데, 단지 우리는 손을 내밀어 보지 않았을 뿐이에요.

마포구청 앞 '성산동 칼국수'집에서 합격자 발표후 인터뷰하는 전말다씨.
마포구청 앞 ‘성산동 칼국수’집에서 합격자 발표후 인터뷰하는 전말다씨.

젊은이들에게도 한마디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은 모릅니다. 공부 못한 사람들의 한을. 공부 못한 사람들은 학벌이 노출될 만한 자리는 절대 안갑니다. 컴플렉스 때문이죠. 저도 그랬고 제 남편도 그랬습니다. 배운 사람들은 배웠다고 사람 무시하면 절대 안됩니다.

저에겐 이제 봄이 다시 왔습니다. 싱그럽고 왕성한 봄 같고, 여름 같은 삶이 다시 왔습니다. 인생의 계절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게 아닐까 싶어요. 내년 3월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면, 저는 다시 봄을 맡을 겁니다.

누구나 인생에 한번은 꽃이 핍니다. 그게 무엇이든 도전하면 됩니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그리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에요. 저는 여기까지 왔으니 더 가보는 거다 하는 마음을 먹어요. 천재들만 공부하는 게 아니니까요.

글쓴이

문주용 기자

문주용 대표이사 겸 기자는 31년간 언론인 생활을 바탕으로 새로운 언론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힘든 세상에서 위로받고 지혜를 얻고 싶어하는 소비자들이 바라는 미디어를 만들려 합니다. 우공이산의 마음으로 집단지성의 지혜를 쌓을 것입니다. 전문가그룹과 소비자들이 함께 하는 미디어를 꿈꿉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