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라 승리! 세계의 우경화·미국화에 제동 걸었다
1차 투표 열세 뒤집어…트럼프식 중남미 질서에 균열 통산 네 번째 집권…분열된 민심·우파 주도 의회는 과제
브라질 좌파의 상징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Luiz Inácio Lula da Silva, 81) 대통령이 대선 결선투표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통산 네 번째 집권에 성공했다. 세계 곳곳에서 보수·우파 정치세력이 세력을 넓히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영향력이 중남미로 확산하는 가운데 나온 결과다.
중남미 최대 국가인 브라질이 우파의 연쇄 집권 흐름에 제동을 걸면서, 세계 정치의 우경화와 미국 중심 질서의 확산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줬다.
브라질 고등선거재판소에 따르면 룰라 대통령은 25일(현지시간) 치러진 대선 결선투표에서 개표율 99.93% 기준 51.77%를 득표해 우파 성향의 플라비우 보우소나루 상원의원(48.23%)을 약 440만 표 차이로 따돌렸다. 1차 투표에서 뒤지고 여론조사에서도 열세를 면치 못했던 상황을 뒤집은 승리다.
이로써 룰라 대통령은 브라질 현대 정치사상 최초의 4선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됐다. 1989년 첫 대선 출마 이후 일곱 차례 도전해 네 차례 당선되고 세 차례 낙선한 끝에 다시 정상에 올랐다. 새 임기는 2027년 1월 시작되며, 임기를 마치는 2030년에는 85세가 된다.
트럼프식 중남미 질서에 균열
이번 선거가 주목받는 이유는 브라질의 정권 향방을 넘어 중남미 정치의 흐름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중남미에서는 우파 정치세력이 연이어 집권하거나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강경한 치안 정책과 보수적 가치관을 내세우는 지도자들이 부상하면서, 이 지역에서도 우파 중심의 정치 질서가 굳어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보우소나루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이번 선거에서 플라비우 후보가 승리했다면 미국과 정치적 지향을 공유하는 지도자들이 중남미에서 세력을 넓히는 흐름에도 힘이 실릴 수 있었다. 그러나 브라질 유권자들은 그 기대와 다른 선택을 했다.
룰라 대통령의 승리는 트럼프 행정부가 선호하는 정치적 방향이 중남미 전체의 선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력하더라도 각국 유권자의 판단과 국내 정치의 역학을 완전히 좌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특히 브라질은 인구와 경제 규모에서 중남미를 대표하는 국가다. 이곳에서 좌파 대통령이 다시 선택받았다는 사실은 지역의 정치적 균형에 적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우경화와 미국 중심의 질서에 맞서는 정치적 선택지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확인한 셈이다.
다만 이번 결과만으로 세계적인 보수화가 끝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남미 국가마다 정치·경제적 조건이 다르고, 브라질 내부에서도 우파의 지지 기반은 여전히 견고하다. 룰라의 승리는 보수화의 종착점이라기보다 그 흐름에 균열을 낸 사건에 가깝다.
1차 투표 열세 뒤집은 역전극
승리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지난 4일 치러진 1차 투표에서 룰라 대통령은 플라비우 후보에게 약 220만 표 차이로 뒤졌다. 1989년 민주화 이후 브라질 대선에서 1차 투표 2위 후보가 결선에서 역전승한 전례가 없었다는 점에서 룰라의 재집권 가능성은 한층 불투명해졌다.
그러나 룰라 대통령은 선거 막판 지지층 결집에 집중했다. 저소득층 복지정책의 성과를 강조하는 한편, 투표 참여를 독려하며 열세를 만회했다. 결선투표 기권율은 1차 투표의 21.08%에서 19.21%로 낮아졌다. 지지층의 투표 참여 확대가 승리를 뒷받침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개표 초반에는 플라비우 후보가 앞서기도 했다. 하지만 개표율이 약 48%에 이르렀을 무렵 룰라 대통령이 역전에 성공했고, 이후 격차를 벌려 당선을 확정했다. 결과가 발표되자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 등 주요 도시에서는 지지자들이 거리로 나와 환호했다.
이번 선거는 보우소나루 가문에도 타격을 안겼다. 플라비우 후보는 부친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집권을 노렸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자이르 전 대통령 역시 2022년 대선에서 룰라에게 패했다. 쿠데타 모의 혐의로 징역 27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된 자이르 전 대통령은 아들의 승리를 통해 정치적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브라질의 주권’ 내세워 미국 압박에 맞서
룰라 대통령은 선거운동에서 브라질의 주권과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강조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외교적 압박에 맞서 브라질이 스스로 국가의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세웠다. 그는 플라비우 후보가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브라질 국기와 국가적 자존심을 지키는 선택을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러한 주권론은 이번 선거의 국제적 의미를 설명하는 중요한 열쇠다. 룰라의 승리는 좌파와 우파 사이의 국내 정치적 경쟁인 동시에,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자국의 이해관계를 추구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기도 했다.
룰라 대통령은 노동조합 지도자 출신으로 2003년 처음 집권한 뒤 2010년까지 두 차례 임기를 수행했다. 이후 2022년 대선에서 당시 현직이던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을 꺾고 복귀했다. 빈곤층 지원과 사회복지 확대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아 온 그는 이번에도 저소득층과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승리를 거뒀다.
네번째 임기는 난항 예고
하지만 네 번째 임기가 순탄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유권자의 거의 절반이 그에게 반대표를 던졌을 만큼 브라질 사회의 분열은 깊다. 우파가 주도하는 의회와 협력해야 하고, 경제성장 둔화와 물가 부담, 치안 불안도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빈곤층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면서 재정 부담과 경제적 불안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집권 후반의 성패를 좌우할 전망이다.
룰라의 승리가 세계 정치의 방향을 단숨에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 곳곳에서 우파 민족주의와 강경한 국가주의가 힘을 얻고,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이 국제질서를 좌우하는 상황에서 브라질 유권자들은 다른 선택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번 선거는 세계적인 우경화와 미국화가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흐름이 아니라, 각국의 정치적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도전받을 수 있는 과정임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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