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왜 ‘배신의 미국’을 못 버릴까
중동에서 영원한 동맹은 없었다 배신의 역사를 아는 걸프 국가들 왜 미국 의존을 줄이지 못하는가
- 미국의 지지가 거둬지자 무너진 지도자들 팔레비·무바라크·카다피의 몰락과 그 뒤에 이어진 혼란은 걸프 왕실에 미국의 지원도 영원하지 않다는 교훈을 남겼다.
- 실망할수록 의존은 깊어졌다 미국은 무기를 팔고 정보·작전을 지원하지만 직접 참전은 선택 사항으로 남겨둔다. 걸프 국가들은 미국의 배신 가능성을 알면서도 군사체계와 첨단 기술, 자본 때문에 의존을 줄이지 못한다.
- 대신해 줄 나라가 없다 중국과 러시아, 사우디·파키스탄·튀르키예의 방위협정도 미국을 대체하기 어렵다. 걸프가 미국 곁에 남는 이유는 신뢰가 아니라 대안의 부재다. 미국이란 동맹이 대신 싸워줄 것이라는 기대부터 버려야 한다.
“카다피 때가, 사담 때가, 무바라크 때가 차라리 나았다.” 리비아에서, 이라크에서, 이집트에서 이 말을 여러 번 들었다. 미국이 등을 돌리거나 무너뜨리는 데 가담한 정권의 자리에 무엇이 들어섰는지를 현지 사람들은 그렇게 요약했다.
걸프의 왕들도 같은 장면을 지켜봤다. 그리고 지금, 그들 자신이 비슷한 물음 앞에 서 있다.
올해 9월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두 차례 전화를 걸어 후티 공습을 요청했다. 보도에 따르면 답은 거절이었고, 미국이 내놓은 것은 정보와 표적 지원뿐이었다.
10월 리야드 공항 공격으로 미국인이 숨지자 트럼프는 참전을 “검토하겠다”고 했지만, 10월 말 현재까지 결정은 나오지 않았다.
미국은 올해 1월 패트리엇 요격미사일 730발과 관련 장비(약 90억 달러), 9월 F-35 전투기 48대(243억 달러)의 대사우디 판매 가능성을 승인했다. 최종 계약과 인도는 별개다. 사우디는 지난해 미국에 거의 1조 달러 규모의 투자 확대를 약속했다. 미국은 무기는 팔고 투자 약속은 받되, 싸움은 대신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우디는 미국과의 관계를 줄이지 않는다. 다른 걸프 국가도 마찬가지다. 올해 이란의 대규모 보복 공격을 받고도 미군 기지를 닫겠다는 나라는 없다. 오랫동안 중동 외교 현장을 지켜봐 온 필자의 눈에 이 장면은 낯설지 않다.
물어야 할 것은 ‘미국이 배신했는가’가 아니다. ‘배신당하고도 왜 의존을 줄이지 못하는가’다.
미국의 지지가 거둬지자 무너진 지도자들
중동에는 미국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지도자가 적지 않다.
이란의 팔레비 국왕은 1970년대 미국이 ‘걸프의 경찰’로 키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1979년 혁명이 일어나자 미국은 그를 지키지 않았다. 망명한 국왕의 입국을 두고도 미국은 오래 망설였고, 그는 여러 나라를 떠돌다 이듬해 이집트 카이로에서 숨졌다.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30년간 아랍 세계에서 미국의 핵심 우방이었다. 2011년 ‘아랍의 봄’ 시위가 일어나자 오바마 행정부는 정권 이양을 요구했고, 결국 그의 퇴진을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그는 18일 만에 물러났고, 병상에 누운 채 철창 안 피고인석에 선 모습이 전 세계에 중계됐다.
리비아의 카다피는 2003년 서방과 화해하려고 대량살상무기 개발계획을 포기했다. 8년 뒤 내전이 터지자 미국과 NATO는 민간인 보호를 명분으로 군사개입에 나섰고, 그 공습은 결과적으로 반군의 승리를 도왔다. 그는 고향 시르트에서 반군에게 살해됐다.
이집트, 이라크,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UAE, 알제리 등 중동과 북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근무하며 가장 자주 본 것은 ‘공백’이었다. 수십 년 동안 철권을 휘두르던 한 사람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그 자리를 대신할 제도도, 합의도 없었다.
리비아는 내전과 분열로, 2003년 미국의 침공으로 사담 정권이 무너진 이라크는 종파 갈등과 IS의 발흥으로, 이집트는 무슬림형제단 정부와 2013년 군부의 정권 장악으로 이어졌다. 이 글 첫머리의 말은 독재를 그리워하는 말이라기보다, 그 뒤에 온 혼란이 그만큼 깊었다는 뜻이다.
걸프 왕실에 가장 큰 충격은 무바라크로부터 왔다. 30년 우방이 며칠 만에 미국의 공개적인 퇴진 요구에 직면하는 것을 보며 그들은 두 가지를 배웠다.
국내 정치적 위기까지 미국이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뒤에 오는 질서가 더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는 것이다.
‘다음은 우리일 수 있다’는 의문은 2015년 이란 핵합의, 2019년 석유시설 피격 뒤의 미국의 직접 군사보복 부재, 올해의 공습 요청 거절을 거치며 커졌다. 버려진 쪽에는 생존이 걸려 있었지만, 미국에는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였다.
실망할수록 의존은 깊어졌다
상식대로라면 배신당한 쪽은 멀어져야 한다. 그러나 걸프 국가들은 정반대로 움직였다.
2019년 석유시설 피격 이후에도 사우디는 미국산 사드(THAAD) 도입을 추진해 2025년 첫 포대의 배치를 시작했고, 2025년 11월에는 전략방위협력을 강화했으며 2026년 1월 주요 비NATO 동맹국으로 공식 지정됐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은 사우디가 원한 상호방위조약에 못 미쳤고, 비NATO 동맹국 지위에는 방위 의무가 없었다. 올해 공습 요청이 거절된 뒤에도 사우디는 미국산 패트리엇과 F-35 도입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
가장 강한 약속을 받은 카타르도 다르지 않았다. 트럼프는 2025년 9월 행정명령으로 카타르에 대한 공격을 미국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보겠다고 했지만, 이 보장은 이란의 미사일을 막지 못했다. 카타르는 미군 알우데이드 기지 때문에 표적이 됐다.
카타르 외무부 대변인은 이번 전쟁으로 걸프 안보가 ‘취약한 억지’에 기대고 있었음이 드러났다고 했다. 이란의 대규모 미사일과 무인기 공격을 받은 UAE는 미국산 사드와 패트리엇 미사일로 견뎠다.
미군 기지 때문에 맞았고, 미국 무기 덕분에 견뎠다. 미군 주둔이 공격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미국의 군사적 존재가 공격 위험과 방어능력을 동시에 가져온다는 역설은 분명하다. 걸프가 미국을 탓하면서도 더 깊이 기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국의 안보 지원에는 세 층위가 있다. 1. 무기를 파는 것, 2. 정보와 작전을 지원하는 것, 3. 그리고 직접 싸우는 것이다.
걸프 국가들은 앞의 두 가지를 막대한 비용을 들여 확보해 왔다. 세 번째는 언제나 워싱턴의 선택으로 남아 있다. 올해 사우디가 확인한 것은 바로 그 경계다.
걸프국가들이 사는(buy) 것은 보장이 아니라 확률이다
사우디와 UAE에서 만난 걸프 인사들은 사석에서조차도 미국에 대한 농담이나 푸념을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란에 대해서는 가끔 비난이나 불만을 드러내면서도 미국에게는 그랬다. 이란은 드러내 놓고 비난할 수 있는 상대였지만, 미국은 가볍게 입에 올릴 수 없는 상대였다. 그 침묵은 신뢰의 표시라기보다 ‘의존’의 무게에 가깝다.
걸프 지도자들은 무기와 투자로 미국의 참전 약속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들이 사는(buy) 것은 미국이 움직일 확률이다. 물론 그 확률을 정확히 계산할 수는 없다. 무기체계가 깊이 엮이고 미국 자본이 많이 들어올수록 미국은 손을 떼기 어려워진다고 믿는다.
미군 기지도 같은 논리다. 미국인이 피해를 입는 순간 걸프의 전쟁은 미국의 전쟁이 될 수 있다. 왕세자의 두 차례 요청에도 움직이지 않던 트럼프가, 리야드 공항에서 미국인이 숨지자 비로소 참전을 언급했다. 후티도 이를 알기에 미국과는 싸울 뜻이 없다는 신호를 보냈다고 트럼프는 전했다.
물론 사우디에도 책임이 있다. 2015년부터 이어진 예멘 개입과 봉쇄가 후티의 적의를 키웠다. 워싱턴의 눈에는 사우디가 오래 끌어온 전쟁에 끌려들어갈 이유가 그만큼 적다.
대신해 줄 나라가 없다
미국을 믿을 수 없다면 걸프 국가들은 다른 보호자를 찾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나라가 없다는 것이다.
중국은 걸프 석유의 주요 구매국이자 2023년 사우디와 이란의 국교 정상화를 중재한 나라다. 그러나 현지에서 만난 걸프 인사들이 중국에 거는 기대는 주로 경제에 머물렀다.
중국은 이란과도, 걸프와도 거래한다. 누구와도 척지지 않으려는 나라는 위기 때 누구의 편도 쉽게 들어주지 않는다. 러시아는 OPEC+에서 산유량을 맞추는 파트너지만, 이란과 군사 협력을 이어가는 나라이기도 하다.
걸프가 보기에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을 상대로 협상력을 높이는 지렛대로는 쓸모가 있다. 하지만 안보를 맡길 상대로는 미국보다 더 믿기 어렵다. 미국에 대한 실망이 중·러에 대한 신뢰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다.
걸프와 대조적인 곳이 알제리다. 미국과 거리를 두어 온 알제리에서는 오히려 중국과 러시아가 자주 화제에 올랐다. 알제리는 오랫동안 러시아 무기를 써 온 나라다. 어떤 무기체계에 기대어 왔느냐가 그 나라가 누구를 대안으로 떠올리는지를 정한다. 걸프에게 그 자리는 처음부터 미국이었다.
미국산 무기체계에 대한 의존은 단순한 구매관계를 넘어선다. 정비와 부품, 훈련, 조기경보와 지휘통제까지 연결돼 있어 다른 나라의 무기로 단기간에 대체하기 어렵다. 사우디는 요격미사일 부족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프랑스·영국·파키스탄·이집트에 방공 지원을 요청했지만, 미국의 정보·지휘통제 체계를 대신할 나라는 없었다.
8월에 맺은 사우디·파키스탄·튀르키예의 메카 방위협정도 마찬가지다. NATO 제5조를 본뜬 집단방위 원칙을 내세웠지만, 서명 뒤에도 후티의 미사일은 계속 날아왔고 튀르키예는 아직 비준도 하지 않았다.
파키스탄이나 튀르키예가 사우디를 위해 예멘이나 이란을 공격하는 장면은 상상하기 어렵다. 10월 26일 세 나라 대표가 함께 테헤란을 찾았듯, 이 협정은 전장보다 협상 테이블에서 무게를 싣는 카드에 가깝다.
비전 2030도 사우디를 미국에 묶는다. 첨단 반도체, 자본, 방산 기술이 모두 미국과 연결돼 있다. 후티는 영토를 한 치도 빼앗지 않고 리야드 공항 운항에 2주 넘게 큰 차질을 초래했고, ‘사막의 다보스’로 불리는 미래투자이니셔티브(FII)를 연기하게 만들었다.
리야드 세계석유회의에는 글로벌 에너지 기업 CEO들이 대거 불참했다. 이런 나라에 필요한 것은 응징보다 안정이고, 안정에 필요한 핵심 군사·기술 역량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은 걸프가 떠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동맹에서 힘을 가진 쪽 은 떠날 수 있는 쪽이다. 미국에는 걸프 말고도 선택지가 있고, 걸프에는 미국 말고 선택지가 없다. 그래서 미국은 무기를 팔고 투자를 받으면서도 싸움은 고른다. 트럼프 행정부의 우선순위는 홍해 항로였고, 사우디 보호는 그 다음이었다.
이스라엘과 비교하면 더 분명하다. 미국은 이스라엘과도 방위조약이 없지만, 2024년 이란의 미사일을 직접 요격했고 2025년에는 이란 핵시설을 공격했다. 차이는 문서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미국 국내 정치와 전략적 이해관계, 군사개입에 대한 판단에서 나온다.
다만 이 구조가 영원하지는 않다. 미국은 이번 전쟁에 들어갈지를 따지지만, 사우디는 앞으로 수십 년간 누구에게 안보를 맡길지를 따진다.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시간표로 보고 있는 것이다.
실망이 쌓일수록 걸프는 가장자리에서부터 다변화를 시도할 것이다. 미국은 오늘의 참전 비용을 아끼는 대신 내일의 신뢰를 쓰고 있다.
영원한 동맹은 없다
19세기 영국 외상 파머스턴은 “영국에는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이익만 있다”고 했다.
중동은 지난 한 세기 동안 그 말의 대가를 반복해서 치른 지역이다. 걸프가 지금 미국 곁에 남아 있는 것도 그 말대로 계산한 결과다. 이 관계를 지탱하는 것은 신뢰보다 수십 년간 쌓인 군사적 의존과 대안의 부재다.
중동의 역사가 가르치는 교훈은 동맹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동맹이 대신 싸워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라는 것이다. 중동에서 영원한 동맹은 없었다. 그래도 걸프는 미국을 붙잡는다. 영원하지 않은 동맹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이 글은 문병준 전 사우디대사대리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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