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쪽에서 본다는 것, 몸이 기억하는 시간

[의사 이호준의 심장, 진실 혹은 대담]

사진=구글 제미나이 이미지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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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분 핵심 요약]
  • “의사는 수치로 내려다보고, 환자는 증상으로 올려다봅니다.” 조니 미첼이 노래한 ‘Both Sides, Now(구름의 양면)’처럼, 질병 역시 단편적인 수치만으로는 그 본질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수치라는 ‘점’ 뒤에 숨겨진 삶의 ‘선’을 읽어내는 법. 이호준 원장이 제안하는 심혈관 5단계의 인문적 해석을 통해, 지금 당신의 몸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 [The Insight - 행간의 재구성]
  • 질병은 ‘축적의 서사’다 고혈압과 당뇨는 어느 날 갑자기 터진 사건이 아니라, 삶이 써 내려온 긴 문장의 결과입니다. 수치라는 단어 하나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전체 문맥(궤적)을 읽어야 합니다.
  • 신장, 침묵의 조율자 이번 글에서 주목할 ‘CKM’의 핵심은 신장입니다. 증상이 나타나기 전, 전신 혈관의 비명을 가장 먼저 듣고 조율하는 신장의 신호를 놓치지 마십시오.
  • ‘모름’에서 시작하는 치유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만하지 않고, 삶을 더 조심스럽게 관찰하겠다는 태도. 그것이 병을 이기는 가장 강력한 인문학적 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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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라는 ‘점’, 삶이라는 ‘선’

혈압이 140/90mmHg, 공복 혈당 126mg/dL.

현대 의학은 이 명료한 숫자의 경계선 위에서 진단을 내리고 치료를 시작한다. 이 효율적인 시스템 덕분에 우리는 ‘100세 시대’를 열게 되었다.

하지만 진료실에서는 종종 숫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질문들을 만난다. 혈액검사 결과는 정상 범위인데 이미 혈관이 많이 망가져 있거나, 모든 수치를 성실하게 관리했음에도 예기치 못한 합병증에 맞닥뜨리는 경우다. 반대로 여러 위험요인을 안고도 평온한 일상을 유지하는 분들이 있다. 진단명은 같은데, 왜 저마다 경과와 결과가 다른 것일까?

질병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최근 의학계에서 주목받는 심혈관–신장–대사증후군(Cardiovascular–Kidney–Metabolic Syndrome, CKM)은 질병을 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누적된 시간의 구조로 이해하자는 제안이다.

늘어난 체중과 내장 지방, 약을 먹을 정도는 아니라는 다소 높은 혈당. 따로 보면 아직 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하지만 이런 변화들이 한 사람의 몸 안에서, 같은 시간 축 위에 맞물리며, 소리 없는 부담과 손상을 쌓아간다.

2023년 미국심장협회(AHA)는 이 같은 관점을 5개 단계로 정리했다. 각 단계는 단절되지 않고 서로 이어졌으며 어느 지점에서 개입하느냐에 따라 이후의 궤적은 달라질 수 있다.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Stage 0: 관리가 시작되는 출발점

수치가 정상이라고 안심할 때가 아니라, 관찰을 시작할 때다. 미국심장협회(AHA)의 ‘Life’s Essential 8’이 지표가 된다. 식단(DASH), 운동(주 150분), 숙면, 금연 등 일상의 습관이 미래의 경로를 결정한다. 이 단계에서의 개입이 가장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전략이다.

Stage 1: 대사적 이상이 시작되는 단계

내장 지방 증가와 인슐린 저항성이 나타나는 시기다. “아직 병은 아니다”라는 안일함이 위험하다. 수치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약물 없이 오직 생활 리듬의 회복(체중 감량, 활동량 증가)만으로도 신체의 대사 환경을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가역적 구간이다.

Stage 2: 말초 장기 손상이 시작되는 단계

고혈압, 당뇨, 지방간 등 구체적 병명이 붙는다. 신장 기능 저하나 혈관 내피 이상 등 증상 없는 손상이 진행된다. 약물 치료는 필수이며, 수치를 목표 범위 내로 관리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때의 관리는 단순히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합병증으로 달려가는 속도를 늦추는 선택이다.

Stage 3: 증상 없는 구체적 질병 단계

환자는 건강하다고 느끼지만, 몸속 혈관은 이미 구조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관상동맥 석회화(CAC), 심부전 지표(NT-proBNP), 신장 손상 신호들이 심장의 비명을 대신 전한다. 사고가 터지지 않았을 뿐, 이미 사건이 발생한 환자만큼 위험한 상태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Stage 4: 누구나 그 위중함을 느낄 수 있는 단계

뇌졸중, 심근경색, 심부전 등 구체적 사건이 터진 단계다. 앞선 단계들이 쌓여온 필연적 결과다. 이제 목표는 예방이 아닌 ‘생존’과 ‘재활’이다. 무너진 기능을 복구하고 남아있는 생명력을 보존하기 위해 의사와 환자가 한 팀이 되어 질병의 진행을 필사적으로 막는 단계다.

조니 미첼의 노래처럼, 양쪽에서 본다는 것

20세기 후반 가장 중요한 포크 싱어송라이터로 꼽히는 조니 미첼은 그의 대표곡 〈Both Sides, Now〉에서 노래했다. 구름을 위에서, 또 아래에서 보았다고. 사랑도, 인생도, 양쪽에서 모두 봤었다고.

의학도 구름과 마찬가지다. 의사는 수치와 영상으로 환자의 몸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환자는 증상과 불편함으로 자신의 몸을 아래에서 올려다본다. 어느 한쪽에서만 봐서는 전체를 파악할 수 없는 법이지만, 양쪽 모두에서 봤다는 미첼은 결국 전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CKM적 관점의 시작이 바로 이 지점이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바로 알지 못함을 한계나 실패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출발점으로 삼는다. 기존의 의학이 “당신은 지금 어디(병의 단계, stage)에 있는가?”를 물었다면, CKM은 “당신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라는 더 깊은 질문을 추가한다.

질병은 ‘구조’이며, 치료는 ‘해석’이다

같은 당뇨, 비슷한 고혈압이라도 삶의 궤적과 동반 질환에 따라 처방이 달라져야 한다. 질병은 순간의 이상소견이 아닌, 생활과 환경이 만들어낸 축적의 결과이다. 위험도 점수와 알고리즘은 유용하지만, 그것들은 나이와 혈압, 혈당, 콜레스테롤의 수치들을 조합해 계산한 위험의 평균치일 뿐, 한 사람의 몸이 어떤 시간을 거쳤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 삶은 평균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CKM관점에 필요한 것은 보다 깊은 해석이다. 수치를 보되, 그 수치가 만들어진 조건을 함께 읽어 삶을 재현하는 것. 숫자로 드러나지 않은 변화를 미리 꿰뚫어 보는 것. 삶이 곧 의학의 텍스트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Le vent se lève, Il faut tenter de vivre)

모든 것을 보고도 “모르겠다”는 조니 미첼의 고백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더 조심스럽게, 더 오래 바라보겠다는 태도다.

건강은 “지키느냐, 잃느냐”의 이분법이 아니다. 얼마나 빨리 알아차리고, 어느 방향으로 궤도를 수정하느냐의 문제다.

병은 시간 속에 형성되고, 역설적으로 시간 속에 방향을 바꾸어 간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 서 있는 지점에서 더 나은 방향을 선택하는 것이다.

바람이 분다. 바로 지금이다.

글쓴이

이호준 더베스트내과 대표원장

이호준은 심장학을 전공한 내과전문의로, 심장대사의학(cardiometabolic medicine)을 연구하고 진료하는 임상의사다. 안산 더베스트내과 대표원장으로서 동료 소화기내과 전문의들과 함께 일상 진료에 충실하며, 질병을 사건이 아닌 시간과 구조의 문제로 해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메디칼업저버에 「역사 속의 심장」을 연재하며, 의학과 역사, 사회를 잇는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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