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의도와 나쁜 결과, 왜 이렇게 됐을까?
[정신의학자 강웅구의 ‘마음의 길’] 선한 의도에도 왜 나쁜 결과 나올까 복잡계 세상에서 쉽게 기대해선 안돼 PC주의, 선(善) 독점하는 건 아닐까? 선의의 나비효과, 괴물 윤석열 탄생시켜 나의 선의가 ‘지옥길’ 밟지 않으려면?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
비선형, 복잡계 세상
세상 일이 이렇게 진행되는 이유는 행동하는 사람의 신중함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 자체가 선형(線形)적이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다. 비선형 세상(복잡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더라도, 중간단계의 미세한 변화들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한 결과를 제대로 예측할 수 없다. 잘 다듬어진 계획도 실행하는 중에 사소하지만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 생기고, 그것들이 거듭될수록 결과는 원래 의도했던 목표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간다. 흔히 ‘나비효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연현상도 복잡계 행동을 하고, 사람의 마음도 그렇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인 사회도 그렇다. 아무리 신중하게 계획을 세워도 결과는 의도와는 달라지기 쉽다. 하물며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문제점조차 고려하지 않으면서 나의 선한 의도를 밀어붙이면 선한 결과가 나오리라 기대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PC 주의의 예
선한 의도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는 예를 PC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은 인종, 성별, 장애, 종교, 직업 등에 관한 편견이나 차별이 섞인 언어 또는 정책을 지양하려는 신념, 혹은 그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추진되는 사회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주-나무위키).
“Correctness”를 우리말로 “올바름”이라 번역하는 것에는 다소 미묘한 함의가 있다. 올바름은 도덕적 선(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PC주의자들이 “자기들끼리 선을 독점하고 다른 견해를 악으로 매도한다”는 과도한 비난을 받는 것은 이런 미묘한 함의와도 관계된다. 확신에 차서 PC운동을 하는 사람들로서는, 수구(守舊)가 아니면서도 이런 비난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Correctness의 더 정확한(correct) 의미는 “사실적으로 옳음”이다. 예컨대 학교 시험문제의 정답이 correct인 것이다. 나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분명하고 나의 정치적 견해는 정답이므로, 도덕적으로 옳은 것과 사실적으로 옳은 것은 같다고 취급되는 모양이다. 두가지 옳음이 구분 없이 사용되는 것은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나 사실에는 한 가지 정답이 있더라도, 도덕(가치관)에는 한 가지 올바름이 있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일부 PC주의자의 “답정너(정답은 내가 정했으니 너는 따르기만 하면 돼)” 태도로 나타나고, 이것이 PC가 공감을 얻는데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태도와 관계된 미묘한 문제를 간과함으로써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PC주의자가 주장을 다소 극단적으로 끌고 나가다 보면 현실감이 부족해지는 상황도 생긴다. 내 의도가 행동으로 집행되고 그것을 상대방이 받아들이는 과정이 선형적이 아니라는 현실을 생각하지 못한 채, 내가 옳기 때문에 상대방은 당연히 내 주장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행동하다가 깜빡 자기모순의 덫에 걸리기까지 하면 PC주의는 선의를 퍼뜨리려는 원래의 의도를 달성하는데 실패하게 된다.
예컨대 PC관점에서, 장애인을 비유에 동원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면서 비판 받은 표현들이 “눈먼 돈”, “벙어리 냉가슴” 등이다. 신문윤리위는 신문기사를 심의하면서 이런 표현들이 장애인 비하라 판정했다(https://www.pn.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140). “절름발이 정책”, “외눈박이 대통령” 등의 표현도 장애인 비하라고 비판적으로 보도된 바 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49929).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배제를 없애야 한다는 좋은 뜻으로 그런 견해가 표명된 것이겠지만, 너무 “근시안(近視眼)”적 관점일 수 있다. 우리 속담에는 벙어리 냉가슴 말고도 장애인에 대한 언급이 종종 등장한다. 예컨대 “귀머거리 삼년, 벙어리 삼년” 이라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은 여성이 결혼하면서 자아를 박탈당하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 약자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속담에서 청력장애가 있는 사람을 비하한다는 의미를 찾아낸다면, 장애인을 비유에 동원하면 나쁜 것이라는 “맹목(盲目)”적인 시각을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문화는 장애인이 등장하는 속담이나 비유적 표현을 많이 가지고 있다. 나는 나쁜 행동을 한다는 의식이 전혀 없이 문화적 관습에 따라 이런 비유를 사용한 것인데, PC주의자가 지적하면 돌연 나는 나쁜 짓을 한 사람이 된다. 아니면 문제성 있는 것은 장애인 비하 표현들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우리 문화일 수도 있다. 발언을 한 당사자는 이런 주장들에 동의하기 어렵다.
또 다른 측면도 있다. “눈먼” 돈은 시각장애인 비하라 비판받지만, “맹목적”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아무도 시각장애인 비하라는 비판을 제기하지 않는다. 임기 말 대통령을 레임 덕(lame duck)이라 하는 것도 지체장애인 비하라는 비판에서 자유롭다. 절름발이(lame)라는 용어가 “절름발이 정책”이라 할 때는 장애인 비하고 “lame duck”이라 할 때는 비하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예들을 보면 우리말과 외래어 사이에 차별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PC에서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 차별이다. 결국 자기모순에 빠지는 셈인데, 이런 사안들은 사소해 보이지만 한번의 나비 날갯짓이 되고,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의도했던 “소수자를 존중하는 따뜻한 기후”가 아니라 “난데없는 혐오의 폭풍우”를 불러올 수도 있다. 상황의 복잡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채로 나의 주장만 펼친 결과다.
과거 청산과 나비효과
자신의 좋은 의도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다가 일이 꼬여서 결국 예상치 못했던 엉뚱한 결과가 나타나고 실패하는 경우는 새 정치세력이 “구악(舊惡)”을 청산하는 상황에서도 꾸준히 있어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후 검찰 개혁을 통해 자신이 믿는 바의 선을 구현하려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선택한 도구는 법학자 법무장관과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 막강 전투력 검찰총장이었다. 겉보기로는 이론가와 실천가의 좋은 조합이었다. 하지만 그 검찰총장은 대통령(대통령의 정책)에조차 충성하지 않으면서 검찰을 지키려 하였고, 실전 경험이 전혀 없었던 서생(書生) 법무장관은 검찰총장과의 일전에서 참패하여 범죄자로 전락해 버렸다. 개혁의 모든 시도는 무너졌다.
선의의 나비효과는 더 나아가 검사 대통령 윤석열이라는 괴물을 만들어 내어 듣도보도 못했던 검사 천하, 의도와 정반대의 세상이 펼쳐지게 했다. 개혁을 실행하기 전에 사용할 도구들의 품질과 성능을 조금 더 신중하게 점검했더라면 검찰총장이 법무장관을 잡는 쿠데타는 일어나지 않았고 이후의 혼란으로 이어지는 나비효과도 없었을 지 모른다.
그렇게 권력을 잡은 검사 대통령은 자신이 생각하는 선한 이념(그가 초등학생이었던 1960년대 식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언저리일 듯…)을 구현하려 하였다. 하지만 집권후 그가 벌인 “사소한” 행동들은 어렵게 쌓아 올린 우리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것으로 시민들에게 인식되었고, 그 나비효과로 그의 정당은 총선에서 참패했다.
윤 전 대통령이 자신의 행동을 모니터링 할 능력이 있었다면 이 단계에서 일은 수습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난국 타개를 위해 선택한 도구는 반성이 아닌 친위 쿠데타, 계엄 선포였다. 그러나 계엄의 나비효과는 그 자신을 내란 피의자로 구속되게 했고, 자신의 지지자들을 정치적으로 파산시켰다. 윤석열 파산의 나비효과는 아스팔트 극우 세력과 한 제도권 정당이 연합하는 현상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이 그들의 의도처럼 생존을 보장할지, 아니면 다음 단계의 나비효과로 그들을 공멸에 이르게 할지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내란세력의 자멸에 힘입어 집권한 이재명 대통령은 이제 자신의 선한 의도를 구현하려 여러가지 정책을 구상하고 있다. 하지만 새 정부가 구상한 선의의 정책들도 “원칙대로 밀어붙임으로써”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이 벌어지는 공간은 선형 공간이 아닌 복잡계이기 때문이다.
지옥으로 가지 않으려면
나의 의도는 선이기 때문에 당연히 결과가 좋을 것이라는 생각은 근거가 없다. 선의로 포장된 길의 목적지가 지옥일 수도 있다. 지옥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의도를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먼저 두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봐야 할 것이다. (1) 내 의도가 선에 해당하는 유일한 가치인가? (2) 내 의도를 집행하기 위한 방법은 지금 하려는 것 밖에는 없는가?
의도가 집행되기 시작했다면, 가장 필요한 것은 순간순간의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방법을 그에 맞추어 수정하는 것이다. 복잡계도 짧은 기간 동안은 예측가능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짧은 간격의 모니터링은 충분히 유용하다. 이 당연한 과정을 방해하는 것은 ‘이념의 경직성’이다. 특히 지향하는 바가 서로 반대되는 두 집단이 경쟁하는 판에서는, 나의 의도가 ‘선’이면 상대방의 의도는 ‘악’이라는 이분법적 생각을 하게 되므로 경직성이 심해진다.
세상을 “나의 정의(선의)”와 “상대의 불의(악의)”의 한판 싸움이라고 보게 되면 서로간 대화나 이해하려는 시도가 불가능해진다. 그렇게 되면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하는 것을 모니터링할 기회도 없어진다. 모니터링 되지 않는 행동은 나비효과를 겪으면서 결국 길을 잃고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선의가 천국으로 이르게 하기 위해서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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