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에 대한 폭력은 선일까?
[정신의학자 강웅구의 ‘마음의 길’]
-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라는 오만 폭력은 늘 부드러운 가면을 쓴다. 부모가 아이를 훈육하듯 “내가 너보다 너를 더 잘 안다”는 착각, 즉 ‘부권주의’가 그 시작이다. 하지만 내 뜻을 강요하기 위해 상대의 마음을 짓밟는 순간, 그것은 이미 선이 아니라 폭력이 된다.
- 뺏길 수 없는 권리, ‘자주권’ 철학자 칸트는 “인간은 결코 수단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아무리 결과가 좋더라도 누군가의 삶을 내 목적의 도구로 삼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가장 고귀한 권리인 ‘자주권’을 빼앗는 것이다.
- 중동 전쟁의 슬픈 데칼코마니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는 비극은 ‘민주주의’를 주겠다는 쪽과 ‘신의 뜻’을 행한다는 쪽. 양쪽 모두 거창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내를 들춰보면 자국 지지층을 결집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다. 결국 ‘악을 벌하는 폭력도 또 다른 악’일 뿐이다.
불법주차와 안중근, 그 사이의 경계선
일반적으로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필자는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제하의 칼럼에서 이 주제를 다룬 바 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악에 대한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다음의 예를 보자.
(1) 내 집 앞에 불법 주차하고 떠나려는 사람을 발견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 않는 그와 논쟁을 하던 중 나는 화가 나서 그를 한 방 쳤다. 경찰에게 나는 설명한다. 그가 불법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에게 저지른 내 폭력은 정당하다고.
(2) 재범할 우려가 있는 소아 성범죄자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해 자유로운 신분이 되었다. 그를 사적으로 처단하는 것은 정의를 구현하는 것일까, 아니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일까?
(3)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은 정의를 구현한 것일까, 아니면 테러리스트 범죄자에 불과할까?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대답이 명백해 보이지만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것 같다. 정의 또는 선을 구현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폭력이 정당한 경우도 있을지에 대한 판단은 쉽지 않다.
부권주의, “너를 위해 때리는 거야”라는 미화
폭력은 선을 구현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폭력자는, 자신의 폭력을 폭력이 아닌 것으로 미화하려 한다. 이때 흔히 동원되는 것이 ‘부권주의’(paternalism)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통제를 정당화하는 것이 부권주의다.
대상자(자녀)에게 선(善)인 것은 그 자신보다는 내(부모)가 더 잘 안다. 그래서 자녀 스스로 생각하는 선이 아닌, 부모가 생각하는 선을 자녀에게 시전하는 것이 더 낫다.
그렇게 하다 보면 대상자의 뜻을 거스를 수밖에 없다. 대상자는 내가 하려는 조치를 거부하고 싶다. 그러나 나에게 분명한 것은 내가 대상자를 위한 선을 시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권주의의 선은 나의 이익이 아니라 전적으로 대상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이 점이 부권주의를 정당화하는 주된 근거다.

자주권, 선한 결과보다 중요한 절대적 가치
하지만 부권주의의 정당성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먼저 내가 대상자에게 하려는 것이 그에게 선이라는 것을 어떻게 판단할지가 문제다.
선악에 대한 가치판단은 팩트에 대한 사실판단보다 훨씬 어려운 문제다. 시험 전날 공부 않고 게임만 하는 자녀를 부모가 제지하는 경우에는, 공부가 더 중요하다는 부모 주장의 정당성이 비교적 쉽게 인정받을 것이다.
그러나 가치판단이 필요한 대개의 상황은 이보다 복잡하고 생각할 점이 많다. 무엇이 선인지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더라도, 더 기본적인 문제점은 부권주의가 대상자의 자주권(sovereignty)을 침해한다는 사실이다.
부권주의를 반대하는 칸트(I. Kant, 1724-1804)의 입장은 인간의 자주권이 절대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부권주의적 선은 객관적으로 좋은 결과를 거두더라도, 사람을 선을 집행하는 대상 또는 도구로 삼는 것이기 때문에 자주권 침해가 되고 진정한 선일 수 없다.
폭력의 본질은 다른 사람의 자주권을 침해해서 내 뜻에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다.
중동 전쟁의 역설, 가해자가 악이면 피해자는 선인가?
미국-이스라엘 대(對) 이란 전쟁의 윤리적 측면을 보는 관점에는 몇가지가 있는 것 같다.
미국이 절대선이거나 절대악이라는 퇴행적 견해를 제외하면, “악을 응징하는 폭력은 선인가(정당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견해가 핵심이다. 다른 측면에서 “가해자가 악이면 피해자는 선인가?“라는 질문도 있다.
이란 정권은 자국민을 학살했다. 그런데 이 학살은 악이 아니라 ‘알라의 뜻’이라는 국가적 선을 시행하는 것이라 주장된다.
무엇이 선인지는 신의 대리자인 정권이 결정하고 국민에게 그것을 집행하는 것이 이란의 신정 정치다. 그 과정에서 반정부세력을 탄압하더라도 정당하다.
집권세력의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신과 신을 받드는 국민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집권세력이 권력을 유지하려는 이기적 동기는 철저히 숨겨야 한다.
미국-이스라엘은 폭격으로 이란 국민들을 죽게 했다. 이 공격 역시 악이 아니라 악한 정권 퇴출이라는 선을 시행하기 위해 한 것이라 주장된다. 이란 국민에게 선을 집행하기 위해서라면 일부 선량한 개인들이 희생되더라도 정당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동기가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 추구라는 이야기는 여러군데서 들리지만, 그들은 이란 국민에게 민주주의를 선사하는 것이 자신들의 목적이라 주장한다.
가면 벗긴 동기, 국제사회가 아닌 ‘자국민’을 향한 호소
양측의 주장은 구조가 같다.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선과 이타성을 강조하는 부권주의를 동원한다.
다만 두가지는 평행하기 보다는 서열이 있어서, 미-이의 폭력은 이란의 폭력을 대상으로 삼는 ‘상위 구조’가 된다. 따라서 그 정당성이 하위 구조의 정당성에 의존한다. 이란 정권이 악이라는 전제가 없다면 미-이의 폭력은 정당화할 근거가 전무해진다.
부권주의를 승인한다면, 결국 어느 쪽이 악인가를 놓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됐다. [이란이 악이므로 미-이는 선이다] 또는 [미-이가 악인 것은 이란이 악이 아니기 때문이다]의 두 극단적 견해만 남는다(논리적으로는 다른 결론들도 가능하겠지만 직관적으로는 이렇게 된다).
이란 국민 사이에는 미국이 폭정 해방자 또는 주권 침해자라는 두가지 반대되는 시각이 공존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이 양쪽 모두로부터 정의와 선의 미명하에 학살당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정당화를 위한 그들의 호소가 국제사회보다는 자국민을 주된 표적으로 하는 것 같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 점은 그들의 진짜 동기가 대상자를 위한 선이 아닌 자신의 정치적 이익 추구라 의심케 한다. 정치세력의 집권을 좌우하는 것은 자국민들이기 때문이다.
이란이 신정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아닌 이란 국민들만 정당성을 인정해주면 된다. 신정체제만 유지된다면 국제 여론에 신경쓸 필요가 없다.
미-이의 이란 침공 배경에 두 나라 집권세력의 정치적 위기가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자국민으로부터 전쟁의 정당성을 인정받는다면 그들의 정치적 위기는 타개될 것이다.
정당화가 국내용이기 때문에, 전쟁이 전 세계를 심각한 혼란에 빠뜨렸다는 문제에 대해 국제사회 앞에서 정당화할 필요는 없다.
부권주의를 동원해도 폭력은 정당화하기 어렵지만, 이렇게 부권주의 가면마저 벗겨내면 어느 쪽이 악인지를 선택하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음을 알게 된다. 악에게 폭력을 가하는 자도 악이다. 악에게 폭력을 당하는 자가 선인 것도 아니다.
자주권을 지키는 정당방위는 폭력이 아니다
안중근 의사는 재판에서 의거를 정당방위라 주장했다. 일본 법정에서는 그 주장이 인정되지 않았지만, 안 의사의 의거는 나(조국)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로서의 의미가 분명하다. 우리나라 가톨릭 교회는 당시 안 의사의 의거를 살인 범죄로 보고 그를 배척했다. 교회가 일제와 타협한 결과라 한다.
이 입장은 해방 후에도 유지되다가 1993년 김수환 추기경은 “안 의사의 당시 행위는 살인이 아니라 독립운동이자 정당방위로 봐야 마땅하다” 라는 입장을 밝히고 안 의사의 가톨릭 신도 신분을 복권시켰다. 한참 늦었지만, 자주권을 지키는 행위는 다른 사람을 침해하는 폭력과 다름을 인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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