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함의 서사...끝내 해소 안되는 걸까

구글 제미나이 AI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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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억울함의 정서와 현대적 해결 인격과 존재를 존중받지 못한 불공정에서 오는 강력한 정서인 ‘억울함’을 현대인들은 가슴에 묻는 대신 법과 언론, 시위를 통해 끝까지 해결하려 한다.
  • 해소되지 않는 상처와 진료실 하지만 강자의 힘과 정밀하지 못한 법·제도 탓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억울함은 더 커지며, 결국 해소되지 않은 서사가 마음을 태워 우울증 등으로 진료실을 찾게 만든다.
  • 공론화의 역설과 당사자의 소외 개인의 억울함이 위안부나 세월호처럼 사회적으로 공론화되면 제도적 해결엔 도움이 되나, 거대 명분 속에서 정작 당사자의 내밀한 마음의 상처는 끝내 치유되지 못하고 왜곡되기도 하기에 조심해야 한다.

억울함이라는 미묘한 정서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는 ‘억울하다’라는 말을 “아무 잘못 없이 꾸중을 듣거나 벌을 받거나 하여 분하고 답답하다.”로 풀이하고 있다. 영한사전에서는 “wrongly accused”, 잘못을 뒤집어씀으로 정의하고 있다. 프랑스어로는 “un traitement injuste”라 하였으니 공정치 못함이고, 독일어로도 “ungerecht”가 되어 또한 공정치 못함과 관계된다.

그런데 ‘공정치 못함’과 ‘억울함’은 감이 제법 다르다. 공정치 못함은 어느 정도 비개인적인 ‘판단’과 관계되는 반면, 억울함에는 그 불공정이 나에게 적용되었다는 ‘정서’가 담겨있다. 억울함은 ‘공정치 못함 + 내가 그것을 당함’이라는 두 요소로 이루어진 것이다.

영어의 lamentable, regrettable 등의 단어는 ‘안타까움’이라는 정서를 강조하는 의미를 갖지만 ‘내가 당했다’는 의미는 없다. 결과가 안 좋은 사건을 관찰했을 때의 심정일 뿐이다. 그러나 억울함은 내가 당한 것이기 때문에, 강력한 힘을 갖는다.

나를 억울하게 만드는 상황 중 특히 중요한 것은 나의 의견 또는 나의 존재가 존중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 억울함이 물질적 불이익이나 불공정 때문에 생긴 억울함 보다 더 큰 힘을 갖기도 한다. 나의 인격 자체에 가해진 불공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분명히 옳은데 사람들이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을 때의 답답하고 화나는 느낌을 누구나 겪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억울함과 한

억울함이라는 단어에는 이렇게 미묘한 정서가 담겨있다. 이와 비슷하게 ‘한’이라는 정서가 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 의하면, ‘한’은 가장 한국적인 슬픔의 정서로서 우리 고유의 것이다(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0943). 많은 우리의 민담들에 흐르는 공통적 주제는 ‘한’이다.

한은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네이버 사전-필자주)”으로 풀이되고 있으니 억울함과 한은 비슷해 보이지만, 필자가 느끼는 어감은 제법 다르다. 억울함은 당한 것을 회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클레임하고 나설 것 같은 분위기지만 ‘한’에는 투쟁적 요소가 없다.

대백과사전은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 종교나 민간신앙 활동을 통하거나 의지적 행동으로 (한을) 풀어왔는데, 익살과 해학도 한을 푸는 한 방법이었다”라 기술한다.

공정함을 추구하는 사람들

공정함 또는 정의를 강력하게 추구하는 몇가지 타입의 사람들이 있다. 모든 경우를 포함하지는 못하겠지만 필자의 관찰에 의한다.

첫번째는 대개의 사람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사소한 불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불의의 피해를 본 당사자는 아니지만,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나와 관계됨이 아니라 “정의가 구현되는가” 여부다. 정의가 구현되어야 한다는 신념은 그의 존재감의 핵심을 구성하므로 강력한 힘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골목에서 담배 피우는 청소년들에게 훈계하거나, 횡단보도 정지선을 잘 못 지키는 차량을 교통위반으로 신고한다. 이기심이 전혀 없는 사람, 나쁘게 보면 지나치게 고지식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소한 불의들이 대충 넘어가고마는 현실 세계를 납득하지 못한다.

두번째는 인권이나 환경 문제 등 활동가들도 공정함이나 정의를 내세운다. 이 활동 역시 나의 이익이 목표가 아니다. 활동을 통해 정계에 진출하게 되는 사람도 있지만, 진정한 활동가라면 정치적 힘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 목표가 아니다.

사소한 불의를 못 참는 사람들에서 정의는 개인 특유적 관심을 반영하는 반면, 활동가들이 추구하는 정의는 많은 시민들이 공감하는 공적 영역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관심을 갖는 불공정 문제 중에는 억울한 사람들이 당한 불공정도 있다.

개인적 이익 추구와 공정함 추구가 애매하게 섞여 있는 경우도 있다. 노동조합은 자신의 권익을 추구하는 조직이지만, 공공의 정의를 추구하는 집단으로 인식되면 대중의 지지를 얻기 쉽기 때문에, 비정부단체처럼 공공의 정의를 내세운다. 과거의 노동운동은 이런 정서에 기반했었다.

마지막으로 강력한 공정함 추구자는 억울한 사람들이다. 억울함은 나와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힘이 세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 “공정함”이라는 명분도 중요하다.

억울함을 구성하는 두 요소 간에 괴리가 생기기도 한다. 나는 억울해서 속을 끓이면서 불공정함에 대해 강력하게 주장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공감하지 못한다. 그 주장이 공정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잘 공감하는 사람은 그의 억울함에 잘 공감할 것이고, 객관적 사실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은 공감을 잘 못할 것이다.

억울함 때문에 병드는 사람들

‘씻김굿’은 죽은 이의 한을 풀어서 저승으로 천도(遷度)시키는 의식이다. 억울함이 한으로 남는 것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한은 부당함에 대한 클레임을 걸어서 풀리는 것이 아니라 생전에 풀릴 수 없어서 저승까지 가지고 가는 것이다. 우리의 민담은 통쾌한 복수극이나 반전으로 끝나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 한은 끝까지 품고 가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분위기는 한을 품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억울함을 끝까지 해결하려 한다. 법에 호소하고, 정부 기관에 민원을 넣고, 언론에 알리고, 시위를 한다. 특히 갑질에 의해 발생한 억울함은 자존감 침해가 주된 요소인데, 을이 대다수인 사회에서 공감을 얻기 좋은 주제가 된다.

여론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문제 해결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억울함을 일으킨 가해자의 힘이 더 세고, 법과 제도는 정밀하지 않고,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현상유지를 더 원하기 때문에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억울함은 더 커진다. 내 존재가 또 한번 존중받지 못하게 된 것이므로.

해소되지 않은 억울함은 마음을 까맣게 태운다. 그런 사람들이 가끔 필자의 진료실을 찾아온다. 공식적 진단은 ‘적응장애’나 ‘우울증’이 되는데, 그를 진료실까지 오게 한 병력은 억울함의 서사다.

이 억울함은 손해가 보상됨으로써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옳다”는 지지를 받아 존재감을 회복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정신과의사의 직업 수행에서 제일의 덕목은 공감인데, 억울한 사연을 공감적으로 들어주는 가장 기본적인 진료만으로도 이런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어떤 환자는 수개월 치료받으면서도 억울함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꼼짝할 수 없는데, 이들을 보면 억울함에 공감해 주는 것이 때로는 집착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억울함에 대한 다른 해결책으로, 억울한 것은 삶의 한 부분으로 접어두고 나머지 부분을 살아나가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한을 품고 사는 과거의 방식이라 볼 수도 있지만, 현대적 관점으로는 억울함을 보상받지 못하더라도 나의 자존감은 지키면서 사는 것이다.

환자들은 “억울함이 내 바람대로 해소되지 않으면 나의 존재는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데, 여기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나의 자존감은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새로운 믿음이 필요하다. 이것이 잘 안되어 필자의 진료실로 찾아온 사람에게 “이제 접어두고 일상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라 조언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다.

억울함의 공론화

세상은 강자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기 때문에, 억울하게 당했다는 것은 약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약자를 응원하는 우리의 정서는 억울한 이들에게 잘 공감한다. 억울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활동가들이 나선다. 법률 지원을 해주는 전문가들도 있고, 시위에 같이 나서는 사람도 있다. 억울함을 해결하려 해도 어떻게 할지 잘 모르는 약자들에게 이들은 의지할 곳을 제공한다.

이런 과정에서 개인의 문제였던 억울함은 사회적 주제로 공론화된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나 세월호 유족들의 문제는 개인의 억울함을 넘어서 공공의 문제가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억울함이 공론화되는 것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공론화는 공정함 문제를 법적-제도적으로 해결할 때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억울함의 또다른 핵심인 자존감, 마음의 문제는 공론화에 의해 오히려 드러나기 어려워지거나 왜곡될 수도 있다. 공론의 장에서는 개인의 정서보다는 객관적인 공정함 구현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활동과들과 당사자들 간의 입장이 미묘하게 어긋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당사자의 마음에 대한 활동가들의 이해가 부족한 탓일 수도 있다. 심지어 당사자들이 “활동가들이 선을 구현하는 대상”으로 보이는 경우마저 있다면 지나친 우려일까?

글쓴이

강웅구 서울대 의대 교수

강웅구는 1988년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정신건강의학과 수련을 받았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뇌의 유전자 발현 이상 보다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이라는 관점에서 정신질환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 대표저서로 <정신병리학 – 정신병리의 개념적 접근>(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1)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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