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하는 자, 복종하는 자, 반항하는 자

[정신의학자 강웅구의 ‘마음의 길’] 자발적 복종자, ‘자아의 힘’이 약한 사람 “반항자는 돌연변이”...시대를 바꾸기도 젊은이들, 전체주의 덫에 걸린 반항자들 ‘자율적 반항자의 힘’ 찾으면 전체주의 버릴 것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는 종교인들이 삭발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는 종교인들이 삭발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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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려 하고, 다른 사람은 그렇게 조종당하는 것을 허용하거나 심지어 스스로 지배당함을 원한다. 또 다른 사람은 남을 지배하려 하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은 거부한다. 이런 사람들이 섞여서 우리 사회가 돌아간다.

지배하는 자

동물 세계에서 지배자 ‘알파 수컷’(alpha male)은 다수의 암컷을 포함한 집단을 지배함으로써 자신의 유전자를 많이 남기는 개체다. 진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지배자의 형질은 유전자 보존에 유리하므로 생존적 가치가 높다. 즉 본능적으로 동물은 다른 개체들을 지배하는 것을 추구한다.

인간 세계에서도 마찬가질 터이다. 인간에서도 힘 있는 자(전통적으로 남자)는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면서 후손을 번성시켰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지배 본능은 번식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표현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자신의 뜻이 그들을 통해 펼쳐지게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정치적 권력추구다.

성리학의 정치철학은 “평천하(平天下)”로 귀결된다. 필자의 짧은 견해인지 모르겠지만, 지배력을 전 세계 범위로 펼치는 것이 성리학이 추구하는 목표다. 당시는 왕정이 인류가 알고 있는 가장 진보된 정치체계였으므로, 철인(哲人)이 추구하는 이상은 내가 선한 왕이 되어 전 세계를 내 아래 두고 지배하는 것이었으리라. 민주주의가 더 좋은 정치체계로 받아들여지는 오늘도 정치를 군주-백성, 지배-복종의 관계로 이해하는 정치인들은 멸종되지 않았다. 손바닥에 왕(王)자를 쓰고 자신의 편협한 이념을 국가 정체성으로 만들어 국민을 지배하려 했던 자를 예로 들 수 있다.

종교 역시 지배 욕구를 펼치려는 자들이 흔히 선택하는 수단이다. 예수님은 지배가 아닌 희생을 보여주셨지만, 본질적으로 종교는 절대자에 대한 복종을 제1의 가치로 삼는 시스템이다. 한 종교인이 자신을 절대자의 대리인으로 꾸밀 수 있다면 그는 추종자들을 손쉽게 지배할 수 있다. 종교인의 지배 욕구는 그것과 짝을 이루는 대중의 복종 욕구에 직접 어필하기 때문이다.

착취적 공동체 생활을 하는 종교집단을 이끄는 것이 이런 자들인데, 이들은 수많은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켜 왔지만 복종자는 여전히 공급되고 집단도 멸종되지 않는다. 요사이 새로 생긴 종교 관련 지배 현상은 광장에서 막말하는 목사들이 자행한다. 이들의 활동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진행되었던 과거의 부흥회(復興會) 류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 같다. 절대자의 권위를 보여주는 수단이 하느님 말씀이 아닌 혐오와 파괴를 선동하는 ‘막말’이기 때문이다. 활동하는 영역도 신앙이 아닌 정치판이다. 상식적인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메시지가 이런 식으로 표현될 수 없음이 너무 당연하지만, 복종 본능이 활성화된 사람들에게는 사회 체계를 파괴하라는 극언이 복종해야 하는 성스러운 계시로 들린다.

지배자는 당당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서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이들은 복종자에 의존한다. 혹시라도 복종자가 복종을 거부하는 순간 지배자의 존재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지배자와 복종자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면서 공생하는 관계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배자는 복종자에게 보상을 제공해서 계속 자신의 지배하에 있도록 한다. 지배자가 흔히 제공하는 보상은 “보호”라는 명목으로 복종자의 존재를 안전하게 지속시켜 준다는 약속이다.

착취(지배)와 보호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보호는 착취자들이 항상 내세우는 변명이기도 하다. 상인들을 착취하는 조직 폭력배가 상인들을 보호한다고 주장하는 것, 사이비 종교집단이 신도들에게 천국을 보장하는 것, 독재자가 폭력이 국민을 보호하려는 선의라 주장하는 것 등은 이 선상에서 볼 수 있다.

복종하는 자

어떤 사람은 스스로의 판단으로 살아가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맡기고 산다. 복종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자신이 지배자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명시적으로 인식하면서 하는 경우와 스스로는 복종한다는 인식이 없지만 결과적으로 복종하게 되는 경우다. 후자의 경우 자신은 자율적으로 판단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지배자에게 조종당하는 것이다(“가스라이팅” 등). 지배-복종의 관계를 인식하는 경우에는, 복종자가 자발적으로 복종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고 강요당해서 어쩔 수 없이 복종하 경우도 있다. 그 구분이 스스로에게 애매한 경우도 있다. 복종에 대해 양가감정(兩價感情)을 갖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복종한다는 결정이 이미 가스라이팅 당한 것일 수도 있다.

자발적 복종자는 자아의 힘이 약한 사람이다. 험난하고 도전으로 가득찬 세상에 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나서지 못하고 누군가가 보호해 주어야 그 아래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 어린이들이 부모의 보호가 있어야 외출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어린이가 성장한다는 것은 자아의 힘이 강해져서 부모에게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 판단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연령상 성인이 된다고 누구나 이런 수준의 자아의 힘을 갖는 것은 아니다. 자기도 모르게 복종하는 사람 역시 자아의 힘이 약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부족한 힘은 자기 상황을 객관적으로 돌이켜 볼 수 있는 성찰 능력이다.

강제적 복종을 규범으로 삼는 대표적인 직종이 노예다. 노예도 자기 스스로의 판단력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지만, 그 범위는 주인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곳까지다. 그러므로 노예는 스스로 판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판단은 자신의 뜻이 아닌 주인의 뜻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선한 주인을 섬기고 있다고 하더라도 노예의 복종은 강요당하는 복종이다.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한 J. S. 밀은 “자유론”에서 계약은 자유로운 것이지만 자신을 노예로 파는 계약만은 무효라고 주장한다. 아무리 자유로워 보여도 노예는 자유인이 아니라는 의미다.

사람들 간의 지배-복종 서열은 한 단계가 아니라 중첩되어 있다. 최고위 지배자는 다음단계 복종자를 지배하고, 이 복종자들은 더 낮은 단계 복종자에 대해서는 지배자의 권위를 갖는다. 생태계 먹이 사슬의 중첩된 포식자-피식자 관계가 사회적 생태계의 지배자-복종자 관계에서 재현된다. 지배는 피지배자를 사회적으로 포식하는 것이다. 최고위자와 최하위자를 제외하면 그들은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동시에 누군가를 지배한다. 이것이 계급사회의 기본적 구성이다. 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은 이 생태계 어딘가에서 자신의 지위를 찾는다.

지배자가 사람이 아닌 경우도 있다. 어떤 이는 물질의 지배를 받는다. 대표적인 예가 알코올의존 환자들이다. 이들은 술이 좋아서 스스로 마신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술이 내리는 명령을 거역할 수 없는 노예 상태에 있다. 지배자가 이념일 수도 있다. 강력한 이념을 가진 사람 중에는 자신이 그 이념에 복종하는 “도구”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복종이 그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 되는데, 이념이 단순할수록 복종자의 힘은 강해진다. 생각할 필요없이 행동으로 옮기면 되기 때문이다. 노예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들은 스스로의 뜻에 따라 이념에 복종하기로 했다고 주장하겠지만, 자신의 자유의지로 노예가 되었다는 것은 밀의 견해에 의하면 모순되는 것이다.

청년들은 기성세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반항으로 전체주의에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자율적 반항자의 힘을 찾아내면 이를 버릴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국민대회’에 참여한 청년. 사진= 연합뉴스
청년들은 기성세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반항으로 전체주의에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자율적 반항자의 힘을 찾아내면 이를 버릴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국민대회’에 참여한 청년. 사진= 연합뉴스

반항하는 자

지배자와 복종자는 상호의존 하면서 지배-복종 생태계에 자리잡고 있지만, 반항자는 딱히 위치가 없다. 진화적으로 반항자는 니치(niche)가 확실치 않은 돌연변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대개의 돌연변이와 같이, 반항자는 생태계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돌연변이는 진화의 원동력으로 시대를 바꿀 수도 있다. 이런 반항의 역사는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멀지 않은 역사를 보자면 1960년대 전세계를 휩쓴 반문화(counterculture)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군부독재정권 시절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은 적어도 그 당시에는 반항자에 속했다.

반항자들은 힘으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자신을 지배하려 할 때 거부할 ‘자아의 힘’은 지닌 사람들이다. 자신이 가스라이팅 당하는지를 살펴볼 성찰 능력도 중요하다. 반항의 기저에는 자신을 지배하려는 기존의 구조와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성향, 호기심이 있다. 호기심은 익숙하지 않은 것에 강한 관심을 갖는 태도다. 호기심은 나이들면서 점점 약해진다(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강아지들도 성견(成犬) 보다 호기심이 많다). 그래서 반항은 전통적으로 젊은이들의 몫이다. 나이 들어 호기심을 잃어버리면서 젊은이는 기성세대가 되어 지배-복종 구조에 편입된다.

젊은이들이 살면서 겪는 것은 세대 별로 다르다. 필자의 세대는 전체주의를 몸으로 체험하면서 자랐기에, 민주주의는 새로운 것,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당시 젊은이들은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고, 주인의식과 힘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체험을 가지고 나이가 들었다.

반면 지금의 젊은이들은 그런 험난한 시대를 경험하지 못하고 성장했다. 이들에게 익숙한 것은 제도적 폭력이 통하지 않는 시민들의 사회인데, 이 속에서 젊은이들은 스스로가 힘을 가졌다거나 사회의 중심이라는 체험을 하지는 못하고 살아왔을 것이다.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와 함께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은 특히 남성들이 자신을 “주변인”으로 느끼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호기심으로 다가온 것은 강력한 힘과 지배를 추구하는 마초(macho)적 전체주의다. 기성세대가 젊었을 때 추구한 반항이 민주주의였다면 지금의 젊은 세대가 추구하는 반항은 전체주의가 된 것이다. 전체주의에 자신을 동화시키는 체험을 통해 젊은이들은 자신이 가진 힘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집단적 폭력으로 구현되는 힘이다. 기성세대에 치여 살던 젊은이들은 이 반항을 통해 사회의 중심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했을 수도 있다. 이 심리가 소위 말하는 “청년층 우경화”의 기저에 있을 것이다. 이들이 이 상태로 나이가 들어 기성세대가 된다면 우리 사회에 폭력과 전체주의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겠지만, 이들의 전체주의에 대한 호기심은 조만간 환멸로 매듭지어질 것이다.

한번 더 생각해 보면 젊은 반항자들이 찾은 것은 새로운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는 새롭게 찾아낸 것이 아니라 한 세대 전에 너무 당연시되던 것이다. 민주화 이후 전체주의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음지에서 꾸준히 서식해 왔다. 대놓고 양지에서 정치세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 호기심 많은 반항자가 되어 전체주의를 새롭게 찾아낸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자들이 펼쳐 놓은 덫에 걸려서 낡은 이념의 복종자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젊은이들은 호기심은 있지만 불행하게도 성찰 능력은 부족했다. 그들은 자신이 힘있고 자유롭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제로는 이들이 느낀 힘은 자율적 반항자의 힘이 아니라 복종자, 노예의 힘일 뿐이다. 지배자는 사상을 공급한다는 명목으로 젊은이들을 착취하면서 자신의 이득을 긁어모으고 있다. 젊은이들이 조만간 이 사실을 성찰하면 전체주의를 버릴 것이다.

글쓴이

강웅구 서울대 의대 교수

강웅구는 1988년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정신건강의학과 수련을 받았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뇌의 유전자 발현 이상 보다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이라는 관점에서 정신질환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 대표저서로 <정신병리학 – 정신병리의 개념적 접근>(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1)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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