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한국의 신(新)파시즘, 권력현상으로 설명해야
권력현상에는 행위 유발자 책임 가려야 “권력을 소지하고 있는 자들에게 특정 행동 과정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도 공평하며 필수적이다” 한국은 신파시즘을 극복할 수 있을까
1편에 이어 계속됩니다.
선동의 작동: 취약한 대중, 공포감, 그리고 인정
취약해진 인간 유형에게는 특히 ‘공포의 상상’은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그 공포감은 자신들을 지금보다 더욱 추락된, 삶에 있어서 모든 희망의 절멸감으로 이어지게 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삶을 완전히 포기하고 은둔하게 할 수도 있다. 혹은 반대로 그들 삶의 저변에 마지막까지도 남아있는 생의 에너지를 다 쥐어짜내어 가상의 적에 대항하여 폭력적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내란 선동자이거나 사이비 교주가 그들의 취약한 정신에 가상의 적에 의한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공포감을 조장하면, 대중은 공통의 적을 척결하는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 스스로 관찰하고 통제하며 ‘인정받고’, ‘소속감을 느끼며’, ‘자부심을 느끼면서‘ 공포감’을 극복하려 한다.
일단 대중들은 그 선동자가 나를 지켜보고 나를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그들이 만일 나를 지켜본다면 ‘인정’할 것이라는 생각에 잠기거나, 더 나아가서 그들이 만일 나를 지켜보며 흡족하게 ‘인정’하는 경우, 그들의 나에 대한 ‘인정’을 상상하며 나 자신을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하고 그리하여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하는 모습을 그리는 ‘상상’을 한다. 동시에 그들의 무리에 합류되어 ‘소속감’을 얻는 상상을 한다.
그리고 인정과 소속감에 대한 상상이 이제는 자기 것으로 내면화되기 시작한다. 이에는 그들 무리내에서 특정한 지위나 역할이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남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첫번째 단계는 우선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이다. 그것이 현장에서의 행동을 통해서 보여지건, 혹은 온라인상에서 비록 익명일지라도 과격한 언사를 통하건, 무엇인가가 타인에게 보여져야만 인정이라는 반대 급부를 기대할 수 있다.
시위 대열에서는 비록 사이비 교주가 직접적으로 나를 인정하지는 못하더라도, 바로 옆에 있는 자가 나를 인정하여 주는 권위를 가진 것이며, 그들에게 행동을 통해 나를 과시하며 인정을 바라는 것이다. 물론 더욱 큰 인정을 바라는 자들은 남들보다 더욱 가시적으로, 즉 더욱 과격하게 행동을 하려는 유인을 가진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의 동기에는 자신들의 행동으로 인해 공통의 적을 ‘척결’한다는 정당성, 그리고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자부심이 놓여있다. 따라서 그러한 상상의 적들로 인한 가상적 위협에서 자유롭게 되기 위한 자유의 투쟁에 기꺼이 동참하게 된다.
권력과 지배는 이러한 ‘타인의 인정에 대한 집착’과 ‘공포’라는 메커니즘을 활용하여 작동한다. 이는 폭도들의 내적 동기를 분석하는 바에 유용한 분석틀이며, 단순한 경제적 내지는 사회 구조적인 분석에 대해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인정’이라는 요소는 스스로 느끼는 사회적 위상에 있어서 박탈감의 심화에 따른 취약성을 이용하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이 되며, 이는 현재 선동자들에게 효율적으로 이용되는 듯하다.
이러한 ‘인정’의 메커니즘은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다. 경제학에서는 ‘베블런’(T. Veblen)의 ‘과시적 소비’에 의하여, 그리고 사회학에서는 부르디외(P. Bourdieu)의 ‘구별짓기’ 현상에서 이미 분석된 바 있다.
이를 통해 일견 무분별하게 보이는 폭도들 간의 구분이 가능해진다. 그들은 폭동으로 인하여 이득을 추구하는 부류로서 선동자(제 ①유형) 직접적이나 간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공동 이익을 추구하는 기득권자로서의 가담자(제 ②유형), 그리고 그러한 기득권적 이익과는 상관없이 가상의 적들의 존재에 의해 야기되는 가상의 피해로부터 위협을 상상하면서, 선동자에 의하여 심어진 대의명분을 느끼면서 공포를 극복하려는 자(제 ③유형)로 나눠진다.
권력과 책임의 문제
이렇듯 특히 첫번째의 유형에 속하는 자들이 행사하는 ‘권위’가 ‘인정’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하여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해는, 행위 유발자로서 그들에 대한 책임의 귀속 문제로 연결된다.
우리가 ‘개인의 자유의지’만을 옹호하는 경우 선동자들은 면책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 폭동 행위 자체의 주체는 폭도들이며, 그 행위는 폭도들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구조에 의한 결정이라고 말하는 경우, 그래서 자유 의지 자체를 완전히 부인하는 경우도 역시 선동자들은 면책된다. 그들도 역사와 구조의 피해자이지 가해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권력 현상에 대한 이해를 통할 때만이 비로소 우리는 책임의 문제를 논할 수 있게 된다.
필자가 지금 극우 폭도들의 행태를 선동자가 행사하는 권력의 차원에서 논의하는 이유는, 라이트 밀스(Wright Mills)가 말하였듯이, “권력을 소지하고 있는 자들에게 (…) 특정 행동 과정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도 공평하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Mills 1959: 100쪽, 룩스 2024:93쪽에서 재인용).
파시즘의 전조?
이런 과격한 폭도들의 행태에 대해 ‘파시즘의 전조’라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파시즘(fascism)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 파시스(fascis)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원래 의미는 ‘묶음, 다발’이며, 곧은 나무가지 여러개를 하나로 묶고 그렇게 묶은 나무 다발에 도끼날을 끼워넣은, 실용적인 목적은 없는 일종의 상징적인 도구를 뜻한다 (그림 참고). 나무 다발 각기는 힘이 없지만 묶으면 강해지고 그 다발에 삽입되어 있는 도끼는 ‘권위’, ‘권력’을 의미하며 고대 로마의 관료들은 이 도끼를 일종의 국가 권력과 정의의 상징으로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파시스’는 바로 ‘권위’를 과시하는 ‘권력 현상’을 시사한다. ‘파시스’라는 단어는 19세기 이태리에서 재현되어 (좌우를 막론한) 단결적 집단행동을 의미했는데, 재차 ‘국가 파시스트 당’(Partito Nazionale Fascista, PN)이라는 무솔리니가 창건한 당의 이름으로 부활했다. 그리하여 이는 권위적 통치에 의거해 단결된 집단적 권력을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파시즘의 현상에는 조종하는 자로서의 권위자와, 마치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그 권위자에 의하여 조종당하는 대중이 존재한다. 그리하여 파시즘은 대중이 조종에 ‘취약’하게 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새로운 모습을 띠면서 출현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파시즘은 취약해진 대중의 정서를 조형하고 조종하여, 그들의 자발적 순응을 확보함으로써 권력자나 권력자 집단의 이익을 도모하는 정치 체제이다. 이것이 필자가 주장하는 ‘광의의’ 파시즘이다. 그리고 파시즘은 단순히 경제적 현상이나 정치적 현상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스티븐 룩스가 말하는 ‘3차원적 지배 현상’이다.
이태리의 경우에는 무정부성(性)과 사회적, 경제적 혼란이 대중을 취약하게 만들었고, 그 대중들에게 새로운 사회적, 공동체적 희망을(즉, 어떠한 미래에 있어서 공동 이익을) 제시하는 이데올로기로서 파시즘이 등장했다면, 지금 대한민국에서 보여지는 현상은 대중의 상대적 박탈감과 인정에의 욕구, 그리고 공포 조장을 이용한 파시즘이라는 의미에서 굳이 명명하자면 ‘신(新 파시즘)’이라고도 할 수 있다.
파시즘은 민주주의의 남용
이태리의 파시즘과 대한민국의 신(新)파시즘 두 경우에 있어서, 물론 대중의 취약성의 근원과 그 작동방식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양자 사이에는 ‘민주주의의 남용’이라는 공통점이 보인다‒파시즘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중우 민주주의’를 이용하는 것이다. 폰 비저(von Wieser)는 스페인과 이태리에서의 파시즘의 등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는 1926년에 영면하였기에, 독일 파시즘의 본격적 등장을 거론하지는 않았다):
“이 두 사람[무솔리니와 스페인의 리베라] 모두 군대라는 권력 수단에 의존하기는 하였지만,(…) 그들 모두 민주주의적 이념에 반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단지 그것을 남용하려 하였을 뿐이다. 그들은 공론에 의거하려 하였고, 그러한 공론이 자신들을 추종하는 것을 대중들이 자신들에게 보내는 추인으로 간주하였다”(비저 2023:694쪽).
즉, 파시즘은 결코 민주주의의 부정이 아닌, 민주주의를 남용하는 정치 체제인데, 그 배후에는 대중의 정서를 지배하며 조종하는 권력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그 권력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글을 맺으며, 다음과 같은 비저의 의미심장한 경구에 주목하고자 한다:
“분열에 시달리고 또한 편협한 정당 체제하의 신생 민주주의가 국민감정이 요청하는, 책임감 있고 강력한 정부를 형성할 능력이 없는 경우 파시즘이 목소리를 내게 된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대중들이 강력한 인물인 독재자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바로 대중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어떠한 기대도 가지지 않는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대중은 말뿐인 민주주의에 식상했을 뿐이고 그 대신 행동을 하는 민주주의, 즉 강력한 대중을 원할 뿐이다. 반면 강력한 자유적 리더십과 확고한 정당 정치에 기반한 대중(Partei masse)이 존재하는 국가에서는 파시즘에 의해 대중의 힘을 찬탈당할 염려가 없다. [파시즘적] 국민적 독재는 민주주의의 발전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국민에게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게서 696-7쪽).
그렇다면 2025년의 대한민국은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국민들이 과연 이미 충분히 도야되어 몰려오는 파시즘이라는 먹구름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의 정당 정치 체계는 과연 굳건하게 파시즘적 경향을 극복할 수 있는가. 만약 새로운 정치가 시작된다면, 그 먹구름은 과연 사라질 수 있을 것인가.
인용 자료
Gidron, Noam; Hall; Peter A. (2017) The politics of social status: economic and cultural roots of the populist right, The British Journal of Sociology, Volume68, Issue S1, 2017.
Mills, C. W. (1959), The Causes of World War Three. London: Secker & Warburg
Popitz, Heinrich (1922), Phenomene der Macht, J. C. B. Mohr (Paul Siebeck) Tübingen 1992 (2025.5월경 번역 출판 예정. 서명: 권력의 현상).
비저, 프리드리히 폰 (2023), 권력의 법칙 (현동균 역). 원저: Wieser, Friedrich von (1926), Gesetz der Macht.
룩스, 스티븐 (2024), 권력이란 무엇인가 (현동균 역). 원저: Lukes, Steven (2021), Power – A Radical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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