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우익의 광란, 한국의 대중들은 왜 취약한가
대중의 폭력성 증가 원인이 사회, 문화, 경제적인 요인 등에도 있지만 사회적 ‘인정’ 원하는 대중의 취약성 이용하고 조종하는 권력 현상에도 주목해야 한다.
광신적 행태 어떻게 설명할까
현재 대한민국에서 암세포처럼 자라고 있는 ‘급진적 우경화’ 혹은 폭력을 동반하는 광신적 행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어떠한 비상식과 허구도 사실로 둔갑되고, 어떠한 자명한 사실도 허구로 변하는, 그러한 상식과 사실의 전도, 그리고 인간 간의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선동과 유언비어에 왜 일부 대중은 취약성을 노출하며 행동하고 있는가.
이 모습은 이념 투쟁인가. 아니면 이념은 단지 다른 무엇을 위하여, 억지로 그들의 위로 ‘덮어 씌어진’ 수단에 불과한가.
피상적으로는 이념, 몰락한 지도자에 대한 막연한 동정심, 종교적 정당화, 야당 지도자에 대한 반감 등의 그 모든 것이 직접적 원인들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사라지면 과연 지금의 광란은 해소될 것인가. 인간의 상상력은 또 다른 무엇인가를 날조하여 이전의 논리를 대체하지는 않을 것인가.
거시적 원인은 ‘필요조건’에 불과
이러한 현상이 21세기에, 그것도 어느 정도 법치와 민주주의가 ‘성숙되었다’고 최근까지도 자부하였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그리고 경제적 공황과도 같은 극심한 물질적 기반의 위기도, 지정학적으로 외적인 직접적 위협도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시점에서 고개를 드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통상적으로 대중의 폭력성 증가의 원인으로 사회, 문화, 경제적인 외적 요인 등을 지적하면서, 폭도들의 심리 형성에 경제적, 사회적 설명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런 설명이 중요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극도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으로 인해 인간은 취약해지며, 선동가는 작은 핀 하나로도 그들을 찔러 자극할 수 있다.
이는 프랑스 혁명에서처럼 “빵을 달라”는 외침에서 비롯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케익을 먹어라”라는 답변은 대중의 공분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그 경제적 불만의 이유가 빵이 없어서 거의 ‘아사’의 상태에 직면한 것인지(절대적 빈곤), 혹은 나는 수입산 돼지고기를 먹는데 옆집은 값 비싼 한우고기를 먹는지(상대적 빈곤)의 차이인가. 이러한 순수히 경제적인 문제보다는 대중들이 처한 ‘사회적 위상’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에서 비롯되는 ‘강박감’을 포함한 문화적, 사회적 현상에 주목할 수도 있다.
종래의 사회과학적 연구는 대체로 경제적 변수, 사회적 변수 등 소위 ‘거시적 변수’들을 방정식의 한 쪽으로 정리하고, 실제적 행동을 대표하는 변수들을 다른 한 쪽으로 몰아넣은 후, 양자간의 상관 관계를 연구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그 변수들을 제대로 잘 선정하고 분석하여 유의미한 결론을 도출한 훌륭한 논문들도 존재한다.(예를 들자면 Gidron & Hall, 2917).
그러나 대중들이 가지는 분노, 불만, 혹은 강박과, 그들의 실제 어떠한 행동을 취함과는 사이에는 찻잔과 입술 간의 간격과도 같은 무엇이 즉, 손이 움직여야만 하는 그러한 간극이 존재한다.
‘선동의 작동방식’에 대한 이해 필요성
이러한 상관관계를 설명하려면 구체적인 작동방식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즉, 다분히 거시적인 설명에 있어서 간과되는 미시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현상에서는 ‘영향을 미치는 인간, 제도 혹은 구조’가 있고, 반대쪽에서 ‘영향을 받는 자’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후자들을 취약하게 만드는 어떠한 방식과 그들의 행동을 자극하기 위한 도구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왜 인간은 취약하게 되는가? 그리고 그러한 취약성은 누구에 의하여 어떤 방식으로 ‘남용’될 수 있는가 하는 사실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인간의 취약성을 이용하는 ‘권력과 지배’의 문제에 대한 고민으로 우리를 이끌며, 단순히 외적 요인, 혹은 구조의 탓으로 모든 것을 돌리는 경우 간과될 수 밖에 없는, 행위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논하는 단초가 된다.
이 글에서 필자가 주장하는 논지를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현재 대한민국에서 보이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공포’라는 감정의 조장에 의해 인간의 ‘취약성’을 남용하는, 대중의 ‘정서를 조작하고 조종하는’ 권력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이같은 시각은 기존의 구조적, 거시적 논의를 보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기존의 심리적 분석과도 차별화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선동과 폭동은 ‘권력현상’이다
누구인가가 의도적으로 대중을 선동하고, 대중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가는 것, 이것은 ‘권력 현상’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 선동가가 (공동체를 위한) 선의를 가지고 있든, 혹은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득을 위한 것이든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즉, 민주주의를 외치던 프랑스 (부르주아) 혁명이나, 혹은 나찌의 선동에서도 공히 보여진다.
현대적 권력론의 시조라고도 할 수 있는 스티븐 룩스에 의하면, 권력이란 권력자의 의도에 따라 “상대방의 순응을 확보할 수 있는 역량”이며, 그것의 하위 범주로서 ‘지배’라는 것은 (공동선을 위하는 것이 아닌) 단지 권력자의 이해관심에 맞추어 상대방의 순응을 확보하는 것이다. 특히 그가 말하는 ’3차원적 권력’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의식과 선호를 통제하거나 욕망과 신념을 조형하여” 그렇게 함을 의미한다(룩스 2024).
그런데 남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굳이 직접적 무력이나 위협이 있을 필요가 없다. 대중 선동가는 대중을 동원함에 있어서 물리적 폭력이나, 혹은 (순응하지 않을 경우의) ‘제재의 위협’과 ‘순응에 대한 보상’이라는 한비자(韓非子) 식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권력의 일종인 ‘권위’를 사용한다.
권력현상의 작동: 타인의 ‘인정’
독일의 사회철학자 하인리히 포피츠는 이러한 ‘권위적 권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권위적 권력’이란 타인들이 가지고 있는 [타인으로부터] ‘인정에의 집착성’(Anerkennungsfixiertheit)을 의식적으로 유용함으로써 타인들의 마음자세와 행위를 조종하는 사람에 의하여 행사되는 권력이다” (Popitz 1992:133쪽).
이 구절에는 조종하는 사람, 영향받는 타인, 그리고 영향을 받게 되는 작동원리로서의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에의 집착’이 설명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회과학 연구자들이 간과하거나 혹은 소홀히 하는 바가 바로 위와 같은 권력과 지배의 작동 방식에 대한 고찰이다. 위에서 설명된 세 가지 요소들을 차례로 설명하여 보기로 한다.
취약성의 탄생: 인정에의 집착
어떤 경우에 현대적 인간이 권위적 권력자의 영향에 ‘취약’하게 되는가. 그 근본적인 이유로, 인간은 홀로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명한 사실에 있다. 같이 사는 한 인간은 타인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전근대적 사회에서 있어서 타인의 반응은 신분적 질서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신분적 질서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현대적 개인은 그렇게 자유롭게 자신을 주장하며, 동시에 ‘이론적’으로는 타인에게 자신을 인정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이론상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이란 있을 수 없다.
‘인정’이 다분히 신분적 질서에 따르던 전근대적 사회에서 대중의 정서란 다름아닌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을 ‘체념’함이라고 한다면, 현대에서는 상대적으로 사회적 위상이 낮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계층이 가진 정서는,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함에 대한 ‘좌절’이라고 할 수 있다. 남들이 모두 도달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 혼자만 뒤처짐으로 인한 좌절은, 이미 고정되어 있는 신분적 질서 하에서 자신의 타고난 운명에 대한 ‘한탄’과는 다른 정서이다. 그러면서 개인은 자신보다 앞서 나가는 타인들의 무리에 끼지 못한다는 슬픔에 젖는다. 타인의 몰인정에 대한 슬픔과 소속감의 상실, 이것이 취약성의 근본 원인이다.
또한 이것이 자신이 처한 사회적 위상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 원인을 타인에게 돌리던 혹은 자신에게 돌리든, 그 결과는 남들이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소속감의 상실이다. 그렇기에 자신을 인정해주고 그 일원으로 받아들여 소속감을 부여해주는 어떤 권위에 귀를 기울기에 된다. 또 자신이 인정받고 있다는 작은 암시에 드디어 자신을 헌신하게 할 수 있다. 상대적 박탈감이 심할수록 그에게 어떠한 권력자의 권위가 인정과 소속감을 제공한다면 더욱 그에게 의존적이게 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물질적, 정치적 탄압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한다면, 이렇듯 현대에서 인간이 가지는 취약성은 타인의 몰인정과 소속감의 상실, 그리고 누군가가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인정해주면서 소속감이라는 안식처를 제공하여 줄 수도 있다는 어떤 가능성에 귀 기울임에서 비롯된다.

폭동에 참여하는 인간 군상들
일반적인 대중 운동이라는 현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인간 군상들이 존재한다. ①영향을 주는자로서, 직접적 이득을 얻기 위하여 선동을 하는 자. 예를 들어 사이비 목사나 극우 유튜버처럼 금전적 이득을 노리거나, 내란 수괴나 국힘당 의원들처럼 권력과 여타 이득을 노리는 자. ②자신이나 인척, 혹은 자신이 속하는 집단이나 계급이 실질적으로 직접적(신체적, 심리적, 물질적) 피해를 입었거나 혹은 입을 수 있음을 ‘체감’할 수 있는 자. 그리고 ③이러한 직접적 이해관계와는 전혀 상관없는, 타인의 심리적 선동에 의하여 ‘상상 속의 공포와 희망’을 느끼는 가담자.
①의 유형에 속하는 자들은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선동을 하며, 가스라이팅하는 (스티븐 룩스의 분류에 따르자면) 3차원적 권력의 행사자로 작용한다. 그러한 그들의 행동은 대부분 의식적이거나 혹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을 수도 있다(그런데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다보면, 얼굴 모양이 가면에 맞게 변한다고 스티븐 룩스가 지적한 바 있다. 우리는 한국 정치인들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이 같은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② 유형의 대표적인 경우는 역사상 되풀이되어 등장하는 농민이나 노예의 반란이다. 물론 개별적 차원에서 ‘반란’은 그 개인에게 불이익을 초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 반란자들의 집단적 행위는 그들이 체감할 수 있는 집단의 공통 이익과 관련되어 있다(예를 들자면, 노예제로부터의 해방 등). 단, 이에는 단순히 억눌린 자의 반동 뿐만 아니라 지배적 계층에 의한 반동도 포함된다(예를 들자면 기득권의 보호 및 확대를 위한 투쟁). 양자 모두 자신이 속한 그룹의 이익을 따를 뿐이다. 한국의 경우 극우에는 이러한 기득권 층이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다분히 ③의 유형에 속하는 자들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폭도들의 경우에는, 오히려 자신들의 만행으로 인하여 스스로 실질적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으며(법적 구속, 혹은 사회 경제적 불안정으로 인한 간접적인 물질적 피해), 그들 집단에서는 직접적이거나 혹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구체적인 체감 가능한 ‘희망’, 즉 자신들 삶의 개선에 대한 희망이라는 요소는 찾기 힘들다.
이에는 위에서 설명하였던, 인정받지 못하거나 소속감을 상실한, 즉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대중들이 해당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만회해 줄 수 있는 목소리에 쉽게 영향받게 되는데, 정치 선동가, 그리고 사이비 종교가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빌어 그러한 목소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정치적 선동이 종교적 선동과 결합되었을 때 그 선동은 가장 강력한 힘을 행사할 수 있다.
공포의 조장
지금의 대한민국에 있어서는 그러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대중을 조종하는 유효한 수단은, 상상적 피해로 인하여 그나마 최소한이라도 가지고 있던 것마저도 상실할 수 있음에서 비롯되는 ‘공포감’으로 보인다. 일전에 디즈니 만화 주제가로 사용되던 노래를 번안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함께 느끼는 희망과 공포”. 하지만 그들은 선동가들에 의하여 “공포”만을 함께 느끼도록 된다.
그들이 느끼는 공포감은 다분히 선동에 의해 상상 속에서 날조된 것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자면 야당, 특정 언론인과 지식인, 특정 지방 출신 사람들, 심지어는 동성애자들은 북한에 의하여 조종을 받는 종북 좌파이며 이들로 인하여 공산화가 될 수 있다는 상상, 동성애를 용인하면 인구 감소 등의 사회적 피해가 생기거나 신이 그런 사회에는 벌을 내린다는 상상, 중국의 식민지가 될 수 있다는 상상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상들은 중세 시대에 마녀가 페스트를 퍼뜨린다거나,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상상, 혹은 일본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 비어와 다름이 없다.
이는 과거 나치 정권이나 지금 유럽의 극우정당이 포퓰리즘적 ‘복지 정책’ 등을 통한, 삶의 개선을 약속하는 ‘희망’의 논리에 의하여 인기를 얻게되는 것과는 반대의 현상이다. 오히려 자유방임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한국의 극우 선동자들은, 야당을 포함하는 적들이 주장하는 재정확장을 하거나 복지를 늘리면 그것은 곧 ‘사회주의로의 이행’이고, 결국은 중국의 식민지가 된다고 말하면서 공포를 조장하고 있다.
반면 그들의 주장에 담긴 희망의 메시지는 너무도 미약하다. 재정긴축을 하게 되면, 미묘한 자연의 섭리에 의하여 경제가 부활한다는 논리는 일반인에게 이해되기는 쉽지 않다. 부자 감세를 하더라도 부자들이 ‘바로 당신 자신’을 취직시켜준다는 확실성을 느낄 수도 없다. 신이나 사이비 종교 지도자가 그들의 삶을 (최소한 천국에서) 구제하여 준다는 것도 긍정적 희망을 심어주기에는 너무도 비현실적이다.
이렇듯 희망의 논리가 부재한 상태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적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동당한 자들은, 그 적들이 나에게 알량하게나마 남아있는 그 모든 것들조차도 앗아가 버리고, 심지어 불운한 나에게 혹시 어느 순간(예를 들어 투기를 통하여) 기적적으로 인생 역전을 할 수 있다는,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상상속의 희망조차도 빼앗아버릴 수도 있다는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인간이 가진 상상력은 무한하고, 따라서 공포에 대한 상상도 무한하며, 상상의 적들도 무한하게 날조될 수 있다. 2편에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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