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가 경제 성장을?...노벨 경제학상의 허구①
[현동균의 알기 쉬운 경제] 제도가 경제활동에 미치는 인과관계 2024년 노벨 경제학상에 대한 논평 이들 주장의 모순과 잘못된 오류에 대해
2024년 노벨 경제학상은 ‘제도가 경제활동에 미치는 인과관계를 실증적으로 규명하였다’는 공로로 애쓰모글루, 사이먼 존슨, 제임스 로빈슨 등 세 명의 미국 대학 교수에게 수여되었다. 그런데 ‘제도가 경제활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은 틀린 명제는 아니되, 이 자체만으로는 너무도 진부한 말이라서 자칫 무의미할 수도 있다.
사실 그들이 주장하고 싶은 것은 ‘사적 소유권’ 등 소위 ‘시장자유주의’ 경제 체제의 주요 제도 정착이 경제성장에 중요한 ‘원인’인데, 이 같은 주장을 과거 서구 열강의 식민지 경험이 있던 국가들의 자료를 이용하여 계량적으로 ‘입증’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소위 강단 경제학자들을 포함하는 평소 시장자유주의 이념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들의 분석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반면 소수이기는 하지만 표명된 반론의 대다수는, 중국이나 한국, 그리고 여타 신흥 개발국의 경험적 사례는 이 노벨상 수상자들의 이론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필자는 이러한 반론에는 충분히 공감하되, 그러한 비판들은 다음과 같은 논점에 의하여 보완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①이 노벨상 수상자들이 주장하는 논리는 중대한 결함을 가지고 있으며, ②사용된 개념들에는 심각한 모호성이 존재하고, ③그들이 주장하는 인과성은 시간적 상관관계에 불과하지, 진정한 인과성은 아니다.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그러한 노벨상 수상자들의 불완전한 주장 뒤에는 이데올로기적 편향성이 은폐되어 있고 그들의 이론은 이데올로기적 선전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한국의 언론 매체에 게재된 논평의 대부분은 노벨상 수상자들의 불완전한 주장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인정하고 결론만을 인용하면서, ‘시장자유주의의 우월성’이 입증되었다거나, 한발 더 나아가 “자 보라! 성장을 위해서는 정부가 각종 규제를 완화하여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필자는 본 에세이에서는 위와 같은 관점에서 주로 2001년에 발표한 영향력있는 논문인 《식민지적 기원에 의한 발전의 비교 – 경험적 연구》에 국한하여 그들의 주장을 검토하려 한다. 간혹 그들이 출판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권력과 진보》도 참조하였다. 단, 필자의 시간적 제약하에서는 그들의 여타 저술들은 검토하지 못하였음도 밝힌다.
주요 주장
포용적 제도 정착이 높은 경제 성장률의 원인?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그들의 주장을 간략히 살펴보자. 우선, 이들의 신조어인, 노벨상 덕에 이제는 인구에 회자되는 그들의 핵심적 개념인 ‘포용적 제도’(inclusive institution)와 ‘착취적 제도’(extractive institution)라는 단어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에 의하면, ‘포용적 제도’란 많은 이들의 경제적 참여를 장려하여 그들이 가진 재능과 기술을 활용하도록 하고, 개인들이 원하는 선택을 가능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그런데 경제 제도가 포용적이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은 결국 ①사적 소유권, 그리고 ②경제적 자유다.(필자 주-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①사적 소유권 ②편향되지 않은 법체제, ③공공부문은 사람들이 교환하고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공평한 경쟁의 장(level playing field)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 ④기업의 자유로운 경제활동 참여 ⑤직업선택의 자유이다.) 반면 ‘착취적 제도’란 경제 구성원의 어느 한쪽이 다른 쪽으로부터 소득과 부를 ‘탈취’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제도다.
그들에 의하면 이러한 경제적인 측면은 정치적 측면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데, 착취적 정치제도는 소수의 엘리트에 의하여 권력이 집중된 사회이고, 반면 포용적 정치제도는 그 권력이 넓게 분산되어 있는 다원화된 사회이다.
그들이 제시한 포용적 제도의 대표적인 예는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홍콩, 싱가포르 등 주로 과거 구 영국식민지 국가들이고 그에 추가하여 놀랍게도 고도 경제 성장기의 한국이 포함된다. 반면 착취적 제도의 예로는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화한 후, 자원과 인력을 수탈하던 아프리카나 남미의 국가들, 그리고 약방의 감초처럼 북한이 거론된다.
그들은 이러한 국가들의 경험적 자료에 근거하여 포용적 사회는 경제성장과 번영을 구가하며, 착취적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는 ‘인과성’을 계량적으로 ‘입증’하였다고 한다. 무언가 그럴듯하게 들린다. (필자주- 이어지는 글 연재에서 설명하겠지만, 그들의 소위 계량경제학적 분석상, 포용적 제도를 계량적으로 대표하기 위해 사용한 변수는 계량화가 힘든 ‘사적 소유권’이나 혹은 ‘경제적 자유’가 아니라 아리송하게도 각 국가별 ‘외국인 투자 자산의 몰수로부터의 안전성 지표’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크게 두 가지 사례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과거 서구 열강의 식민지 경험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①삶의 환경이 좋고(즉, 이주민 사망률이 낮고), 인구 밀도가 낮은 곳에는 포용적인 이념을 가진 백인들의 식민지 이주가 높다. ②그곳에서는 포용적 제도가 정착한다. ③따라서 경제 성장률이 높다. 반대로 이주민 사망률이 높은 곳에서는 백인들의 이주가 적고, 그 대신 식민지의 자원 등을 수탈하는 ‘착취적’ 제도가 도입되어 고착되고 경제성장률이 낮게 된다. 이때 그들이 말하는 소위 인과관계의 순서를 다시 단순화시켜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이주민 사망률 →②포용적 제도 정착→③ 경제성장.
두 번째는 마치 찰스 디킨스의 소설 제목을 본뜬 듯한 ‘두 도시 이야기’이다. 멕시코와 미국의 경계에 놓인 도시의 가운데로 국경이 통과하여 그 도시가 양분되어 있다. 동일한 인종, 동일한 지리적 기후적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쪽은 잘 살고 멕시코 쪽은 그렇지 못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에 따르자면 미국 쪽은 포용적 제도를 도입하였고, 멕시코 쪽은 착취적 제도를 도입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이 모든 주장은 그럴듯하게 보인다. 하지만 과연 정말로 그러할까.
논리의 빈곤
이분법은 현실을 오해할 위험성을 내포한다
우선, 이들은 세상을 ‘포용적 제도’와 ‘착취적 제도’라는 흑백 논리로 어설프게 구분하고 있는데, 그들이 말하는 ‘포용적 제도’와 ‘착취적 제도’는 상호 반대의 개념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이 노벨상 수상자들이 ‘권위주의적 제도’라고 구분하면서 ‘착취적 제도’와 동일시하는 듯한 (케인즈적) 수정자본주의, 국가자본주의, 개발독재 내지는 혹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사실 이 노벨상 수상자들이 말하는 ‘착취적 제도’도, 혹은 ‘포용적 제도’도 아니다. 또한 그들이 ‘포용적 제도’라고 분류한 싱가포르나 한국의 개발 과정은 결코 그들이 말하는 ‘포용적 제도’는 아니며 오히려 ‘권위주의적 제도’에 기반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이 말하는 ‘포용적 제도’는 동시에 ‘착취적 제도’도 될 수 있고, 일국 내에 구분되어 공존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칠레의 피노체트 주의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소유한 자’들의 자유를 최대로 보장하는 ‘포용적 제도’를 표방하는 반면, 소유하지 못한 자들에 대한 ‘착취적 제도’다.
또한 그들이 ‘포용적 제도’의 예로 거론한 홍콩은, 시장 질서와 ‘사적 소유권’을 인정할지언정 실상은 ‘시장의 원리’라는 가면하에 높은 지대를 통하여 자국민을 착취하는 지대추구적 ‘착취적 제도’와 기타 경제활동에 있어서의 ‘포용적 제도’가 공존한다. 그리고 그들은 ‘착취적’이라는 용어를 ‘강압’을 통한 것으로 한정하고 있는 듯한데, 사실 시장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암묵적인 강압’도 존재하며, 홍콩 같은 ‘지대추구 경제’ 혹은 독점자본주의는 비록 명시적 강압에 의하지는 않을지언정 ‘착취적’임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식민지 치하 자원부존국의 경우에 있어서는 자원을 가진 엘리트들의 소유권을 철저히 보장하는 ‘포용적 제도’와 그에서 제외된,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는 ‘시장의 원칙’이라는 명목하에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착취적인’ 제도가 동시에 공존하는 것은 아닌가. 시장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지배는 그 지배의 형태가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명시적 강압에 의한 지배보다 더욱 강력한 것이라고, 일찍이 막스 베버(Max Weber)가 말한 바를 유념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단호한 흑백 논리에 의하여 그들이 말하는 이념형인 ‘포용적 제도’ 이외의 것은 모두 ‘착취적 제도’이며, 그러한 ‘포용적 제도’ 이외의 모든 것들을 마치 전근대적 노예제도와도 흡사한 제도로 ‘매도’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그런데, 국가주도 성장 모델들은 노예제도와는 엄연히 다르다.

북미 식민지의 건설은 영국 본국 영토확장의 일환
다음과 같은 가상적 경우를 한번 생각하여 보자. 자본주의 성장기 영국에서 산업화가 더욱 진전되고 교통수단이 발달하며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기존에는 인구밀도가 적고, 과거 산업 중심지로부터 떨어져 있어 개발이 부진하였던 ‘영국 내의’ 신개발 지역으로 경제활동이 확장되어 가던 과정을 살펴보자.
이제 새로운 마을과 공장이 들어서며, 농지도 새로 개척되는 변화가 일어나면서 그 새로운 개발 지역에서 경제가 성장하게 되었다고 하자. 이 경우, 당연히 기존의 자본주의 운행을 위하여 필요한 사적 소유권, 시장 제도 및 상법 체계와, 그에 더하여 영국 경제 내에 축적되어 있던 화폐 자본과 ‘사회적 자본’ (지식, 기술, 경험, 조직 운영 방식, 업무 관행 등)이 자연스럽게 이전 적용될 것이다.(필자주- ‘사회적 자본’은 본 에세이의 목적상 그 내용의 반복을 피하기 위하여 필자가 임의로 사용하는 용어이며, 부르디외(Bourdieu)가 말하는 인적 네트워크 등의 ‘사회적 자본’의 의미는 아니다.)
더욱이 특히 그 신개발지가 인구밀도도 적은 지역이었다면, 기존 주민들의 저항이 상대적으로 약하기에 개발을 위한 각종 인프라 건설 등이 보다 용이할 수 있다. 따라서 기존의 경제 중심지에 비하여 경제가 오히려 효율적일 수 있고, 경제활동이 거의 무(無)의 상태에서 시작하기에 경제 성장률은 종래의 경제 중심지보다도 빠를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런데, 사실 이 같은 ‘영국 내’의 신개발지 개척과 영국의 북미대륙 식민지 개척과의 차이점이라고는 경제의 중심지와의 거리 차이뿐이다 (북미 인디언들의 뼈아픈 항쟁은 논외로 하자). 이때 북미 지역의 성장을 위하여서는 다양한 요인들이 영향을 미쳤음이 틀림없는데, ‘포용적 제도’의 이전 및 정착 이외에도 본국 경제 영역의 확장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본국 경제 내에 이미 축적되어 있던 위에 언급한 ‘화폐 및 사회적 자본’ 등의 이전이 핵심적일 수 있음은 확실하다. 그런데, 이러한 ‘화폐 및 사회적 자본’은 소위 ‘포용적 제도’에만 존재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일례로, 그 영국 신개발 지역은 초기에 기간 산업 등의 공적 투자들이 필요하고, 또한 민간의 개별적 이익 내지는 사적 소유권과 공적 이익이 상충하는 경우가 존재하기에 공공의 목적을 위하여 어느 정도 사적 소유권을 침해하면서(예: 토지의 수용),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 혹은 ‘권위주의적’인 제도가 도입된다고 가정하자. 그런 경우 소위 포용적 제도에만 의존하는 경우에 비하여 보다 높은 경제성장이 결과될 수도 있다. 따라서 소위 ‘포용적 제도’가 경제 성장을 위한 필수적인 ‘선결 조건’이라거나 혹은 더 효율적이라고 단정하기도 힘들다.
포용적 제도 도입은 개발과정상 수반되는 ‘수단’ 혹은 ‘결과’
이 노벨상 수상자들은 ‘포용적 제도’가 경제 성장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인과성’에 대한 보다 상세한 철학적 논의는 생략하고, 우리가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것은 ①이 ‘포용적 제도’는 ‘원인’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수단’이다. 예를 들자면 “배가 고파서 숟가락을 사용하여 밥을 먹어 허기를 달래었다”라는 명제에서 숟가락을 ‘원인’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는 ‘수단’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같다. 원인은 배가 고픔 혹은 살고자 하는 충동이다. ②그리고 ‘숟가락’, 혹은 ‘젓가락’이 단독으로 작용하여 허기를 달랠 수는 절대로 없고, 어떤 경우라도 ‘밥’이 있어야만 한다. ‘화폐 및 사회적 자본’의 이전이 어찌 보면 ‘포용적’ 혹은 ‘권위적’ 제도라는 수단에 비하여 보다 본질적인 부분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숟가락은 다른 대용 수단이 존재하지만, ‘밥’은 언제나 필수적인 부분이다.
③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필히 ‘포용적 제도’라는 수단만이 높은 경제성장을 결과하는 것도 아니다. 숟가락이 아니라 젓가락으로 밥을 먹을 수도 있다. ④일본 같은 어떤 문화권에서는 숟가락을 이용하여 밥을 먹는 것을 천하다고 금기시하는 것처럼, 숟가락을 사용하는가 혹은 젓가락을 사용하는가의 결정은 그 주어진 상황에 따라서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포용적 제도’ 혹은 ‘권위적 제도’를 도입하는 결정은 다분히 본국의 경제 제도 형태와도 같은 주어진 환경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그렇다면 경제 성장의 ‘원인’은 무엇인가. 일단 위에서 필자가 열거한 사례로 보자면, 그 원인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 것들은 ①제도의 형태와 상관없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의미에 있어서 ‘화폐 및 사회적 자본’의 존재와 그것의 이전, 혹은 ②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팽창 동인(動因) 내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소위 ‘자본의 법칙’일 수도 있다.
사실 이 질문은 쉽게 답할 수 없는 어렵고도 중요한 질문이기에, 필자는 그에 대한 확답은 유보하고자 하며, 이 글의 목적상 ‘포용적 제도’는 노벨상 수상자들이 말하고 싶어하는 원인으로는 간주될 수 없다는 점만을 확인하고자 한다.
만일 중국같은 ‘권위주의적’ 제도가 북미를 개척하였더라면?
③ 또 다른 예로 다음과 같은 ‘반사실적 가정’을 한번 상정하여 보자. 현재 빠른 성장을 구가하는 ‘권위주의적 제도’를 가지는 중국이 우연히도 과거 북미 신대륙과도 같은 미지의 개척지를 발견하였고, 그에 따라 주민 이주 및 지역개발을 현재 중국식 경제 제도를 도입하여 실행하였다고 가정하여 보자.(티베트 지역의 개발이 실례이다). 그렇다면 그 신개척지는 역시 고성장률을 현시할 수 있지 않을까.
즉, 만일 중국경제가 그들에 의하여 아주 모호하게 정의되어 있는 ‘착취적 제도’의 일종으로 간주된다면, 그 착취적 제도하에서라도 높은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며, 경제 성장을 위하여서는 ‘포용적 제도’가 필수적 선결 조건은 아닐 수 있다.
④ 멕시코와 미국의 경계에 놓인, 양분된 도시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자. 그런데, 미국과 남쪽 국경 경계를 가진 국가가 멕시코가 아니라, 현대의 중국경제라는 반사실적 가정을 다시 한번 도입하여 보자. 그렇다면 중국에 소속되어 있는 남쪽은 미국에 속한 북쪽의 도시에 비하여 경제성장률이 현저히 저하되어 보일 것인가. 위의 ③과 마찬가지의 논리로 경제 성장을 좌우하는 원인은 소위 ‘포용적 제도’나 혹은 ‘착취적 제도’는 아닌 듯 싶다.
만일 아프리카에서 포용적 제도가 도입되었더라면?
⑤그들이 ‘착취적 제도’라고 규정한, 자원이 풍부하지만, 높은 이주민 사망률로 인하여 이주민 정착보다는 자원을 수탈하는 경제의 대표적인 사례인 아프리카의 국가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다음과 같은 반사실적 가정을 도입하여 보자.
다행히 제국주의에 의한 점령을 피할 수 있었던 어떤 경제에서 어느 날 갑자기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군주의 혜안으로 사적 소유권을 포함한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는 ‘포용적 경제 제도’가 도입되어 실행되었다고 가정하자.(필자주-물론 전통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에로의 이행은 그러한 이행을 선도하는 주체가 백인 침략자이건 아니면 전통 군주이건 어느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고, 장구한 시간을 요하는 전반적인 ‘문화적 변화’를 필요로 하며, 폴라니(Karl Polanyi)가 말하는 소위 ‘이중운동’ (double movement)의 과정이 존재한다. 또한 과거 식민정부가 거의 준 강제적으로 식민지에 화폐를 도입하여 자본주의화하려는 시도가 실패하였다는 사례는 많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 경제는 ‘자생적’으로 높은 경제 성장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기존의 토지 및 광물 자원을 독점하고 있던 엘리트 지배층들이 이제는 더욱 명확하고 확고해진 ‘소유권’에 기반하여 창출된 부를 국내에 재투자하는 선순환 구조가 과연 시현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반대로 광물이나 기타 자원 산업 부분은 경제의 여타 부분과는 고립되어 존재하고 오로지 수출을 위하여만 존재하는 경제 내의 ‘고립된 섬’으로 존재하며, 그 채굴시설의 주요 운영은 ‘수입된’ 외국 인력에 의존하고, 내국 노동자는 단순노동 내지는 ‘경비원’의 역할에만 국한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로부터 창출된 부는 정부의 강력한 ‘규제’가 존재하지 않는 한 해외로 유출되지 않을까.
권위주의적 제도의 도입은 항상 저성장을 이끌까?
이에 비교하여, 알버트 허시만(Albert Hirschman)의 경제 성장 이론에서 시사하듯이 권위주의적일 수 있더라도 정부가 전방위 산업과 후방위 산업의 연계를 강조하면서 전반적 경제 정책 수립을 도입하고, 수입대체산업을 육성하며, 장기적 안목에서 교육에 투자하고, 창출된 부의 해외 유출을 규제하면서 국내에 재투자하도록 ‘강제’하는 등 공공의 목적을 위하여 어느 정도 개인의 자유를 억제하는 전략이 더욱 성장을 촉진할 수 있지 않을까. 노벨 수상자들이 제시한 예들은 이미 제국주의 수탈에 의하여 기형적으로 변한 사회가, 만일 애당초부터 ‘포용적 경제 제도’를 도입하였더라면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막연하고도 천진난만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근거하는 것은 아닐까.
한국, 중국, 싱가포르등의 경험은 어떻게 설명할까?
노벨상 수상자들의 이야기는 결국 경제적 자유와 사유 재산권을 보장하는, 그리하여 정부의 역할은 그러한 제도들을 정착시킬 수 있도록 함에 국한되어 있는 국가들 ‘만이’ 높은 성장이 가능하고, 그렇지 못한 국가들은 성장을 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위에서 지적하였다시피 많은 논리적 결함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권위주의적’ 내지는 ‘착취적’ 제도라고 간주하는 경제도 고도성장을 시현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며, 실제로 중국이나 아시아의 신흥 개발국의 경우에는 그러한 가능성을 증명한 바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이나 싱가포르가 마치 자유경제의 모델을 따라서 성장한 것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데, 이는 이론으로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자신들의 이론에 억지로 맞추는,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도 같은 시도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위와 같은 여러 논리적 문제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이론이 환영받는 이유는, 그들의 이론은 이미 ‘시장자유주의’의 우월성을 신념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신념을 재확인하면서 열광하게 만드는 종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겠는가.
두번째 글에서는 그들이 주장하는 ‘객관성’, 즉 ‘경험적 검증’에 의하여 ‘포용적 제도’가 높은 경제성장을 결과한다는 ‘인과성’이 증명되었다는 주장을 검토하고,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그들의 주장은 개념적 모호성과 인과관계에 대한 혼동에서 비롯된 것임을 설명하고자 한다. ②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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