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경제학상의 허구②...이데올로기 선전場
노벨 경제학상은 노벨상 아냐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주는 상일 뿐 개념 모호하고, 인과성도 없는 주장들 결국 포용적 제도란 외국인투자 보호? 과학이 아닌 종교적 신념 같은 주장 불과
이 글의 1부(제도가 경제 성장을?...노벨경제학상의 허구①)에서는 이번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이 거창하게 ‘제도’가 경제성장에 미치는 인과가 “아니라”, 그들이 정의한 소위 ‘포용적 제도’, 즉, ‘사적 소유권’과 ‘시장 자유주의’하에서만 경제가 성장할 수 있고 반대 개념인 ‘착취적 제도’하에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설명하였고, 필자는 이러한 천진난만한 이분법과 그들의 주장이 비논리적이며, 그들이 권위주의적이라고 분류한 국가주도 성장 모델에 의한 경제 성장을 설명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객관성의 빈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장에는 ‘인과관계’를 ‘경험적’으로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계량경제학적’으로) 밝혀냈다는 단서가 붙기에, 이 거대한 단어가 가지는 무언가 ‘객관적’이며 ‘과학적’이라는 함의에 의하여, 그리고 그들이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는 바로 그 ‘권위’에 의하여 일반인은 여전히 압도당할 뿐이다.
그런데 노벨 경제학상은 그렇게도 훌륭하고도 ‘공평’할까. 그리고 그들의 주장이 과연 객관적이고 과학적일까. 사실 그들이 말하는 ‘객관적 검증’ 방법에도 사실 무수한 문제점이 존재하는데, 이는 크게 그들이 말하는 ‘좋은’ 제도와 ‘나쁜’ 제도를 구분하는 ‘기준’ (내지 지표)에 대한 문제와 ‘인과성’에 대한 몰이해로 나눌 수 있다.
노벨경제학상, 그 이데올로기적 선전 도구
일단 노벨 경제학상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노벨 경제학상’이라는 것은 대중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 ‘일그러진’ 왕관에 의하여 사람들을 기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관하여 몇 가지 언급을 할 필요가 있다.
먼저, 노벨 경제학상은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고, 1969년에 스웨덴 중앙은행이 창설한 것이다. 노벨상 웹사이트에도 노벨 경제학상은 노벨상이 아니고, 단지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하기 위한 특수한 상’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애당초 노벨상 위원회 및 유족들은 이 상이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데에 반대하였고, 또한 이 상장을 ‘경제학자 자신들의 명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소위 ‘선전용’이라고 비난한 적이 있다.
또 상 선정위원회는 악명높은 ‘Mont Perlin Society(편집자주-고전적 자유주의의 사상을 논의하고, 논쟁하고, 홍보하기 위해 모인 학자, 작가, 사상적 리더들로 구성된 모임.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 의해 1947년에 설립됐다. 자유시장, 개인의 권리, 개방적인 사회라는 고전적 자유주의 이상을 보급하는 노력을 한다)’와 연관되어 있는데, 이 단체에 속한 자들 중 여덟 명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바 있었다(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스티글러, 뷰케넌, 게리 벡커, 로날드 코즈 등). 소위 극우 신자유주의의 기수들이다. 자신들이 신봉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 내지는 넓게는 주류 경제학(소위 신고전학파 경제학) 이외의 경제학은 소수의 예외(필자주-Amartya Sen이나 Herbert Simon 등) 당연히 수상에서 배제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상은 그러한 주류 시장자유주의 경제학 이론을 옹호하는 선전 도구화 및 그들의 입장을 정책에 반영시키는 유용한 도구화가 되었다. 이들 주장은 실제 미디어와 각국 정부를 통해 대중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이에는 민영화, 분배정책, 기업과 부자의 조세감면, 간접세 비중의 증가, 금융산업 탈규제화와 같은 정책들이 포함된다. 더욱이 그렇게 상을 수상한 밀턴 프리드먼이나 혹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같은 자들은 한술 더 떠서 칠레의 피노체트 등과 같은 독재 살인마를, 단지 신시장자유주의적 정책을 지지하였다는 이유로 옹호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노벨상을 수상한 소위 ‘효율적 시장가설’, ‘블랙 쇼울스 옵션 가격 결정이론’, 금융시장의 탈규제화 논의 등이 20세기 말~21세기 초의 각종 금융 공황을 부추겼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개념적 모호성
모호한 개념은 자신과 타인 기만의 수단
르 봉(Gustav Le Bon)은 그의 명저 《군중심리》에서 민주주의, 권위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평등, 자유 등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들은 모호할수록 그것이 대중에 미치는 영향력도 커진다고 했다. 왜냐하면, 듣는 사람들 각자는 그 단어들로부터 자신의 입맛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어떤 이미지를 연상하고, 그 단어에서 자신이 이미 믿고 있는 바를 역시 무의식적으로 재확인하며 열광하기 때문이다. ‘이성’에 호소하는 방법은 대중을 움직이는 수단으로서는 부적절하다.
따라서 대중을 기만하기 위하여서는 이러한 단어들의 의미를 가급적 모호한 채로 은근슬쩍 사용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자신이 옹호하고 싶어 하는 개념은 아름다운 용어를 선택하여 지칭하고, 그렇지 않은 개념을 지칭하기 위하여서는 악마적인 용어를 선택하는 재주도 필요하다.
그런데 소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 중 거의 대부분은 자신이 사용하는 개념에 대하여 제대로 정의하거나 신중하게 고민하지 않으며,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영원한 진실로 간주한 채 그 단어들을 그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은근슬쩍 지록위마(指鹿爲馬) 식의 ‘언어 파괴’를 실천하기도 한다.(일례로 그들이 사용하는 ‘자본’이라는 개념이 그 한 예인데, 그때의 자본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장사 밑천이 아니라 기계장치이다. 이에 관련된 치명적 문제점은 소위 ‘자본논쟁’을 참고할 것).
제도, 사적 소유권 등의 개념이 가지는 모호성
그런데 이제 애쓰모글루 등의 주장을 살펴보자. 그들의 주장에는 여러 가지 개념들이 등장한다. 제도, 포용적 (시장자유주의), 착취적 (권위주의), 권력, 자유, 진보, 사적 소유권, 인과관계 등이 그 예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그들은 그 어느 개념도 제대로 정의하지 않고 모호함을 남겨둠으로써 무언가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제도’는 과연 무엇인가. 이에는 크게 제도에 대한 정의와 그 제도를 대표하는 계량적 변수가 무엇인가라는 두 가지 문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앞서 말한 그들의 세 저술에 국한하여 볼 때, 제도가 무엇인지를 어디에서도 명확히 정의하고 있지 않다. 유추하면 광의로 제도에 포함되는, 막스 베버 등이 강조한 중요한 요인인 ‘문화’ 등은 그 개념에서는 배제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대략 말하자면 이미 법제화된 기관, 기구, 혹은 법률상의 체제를 일컫는 것처럼 여겨진다.
또한 그들이 정의하는 ‘포용적 제도’는 보다 구체적으로는 ‘사적 소유권’, 시장에서의 ‘기업의 자유와 취업 선택의 자유’, 그리고 ‘자유로운 계약’ 등을 보장하는 공평한 법률 체계와 기구만을 문제 삼는 ‘시장자유주의’ 제도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그러한 제도가 존재하면 ‘좋은’ 것 즉 ‘포용적인 제도’, 그렇지 못하면 ‘나쁜’ 것, 즉 ‘착취적 제도’라고 그들은 명명한다. 이러한 단어의 선택을 통하여 이미 그들 자신들의 편향성을 독자들에게 세뇌시키는 듯하다.
이에 추가하여, 과연 ‘사적 소유권’과 ‘시장에서의 자유’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떤 경우까지 인정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도 남는다. 예를 들자면, 공공의 목적을 위하여, 혹은 소위 시장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하여, 일정 개인들의 자유를 침해할 수밖에 없는 제도는 좋은 것인가 아닌가에 대하여서는 모호하게 남아있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그들은 이같은 경우도 ‘권위적 제도’로서 ‘착취적 제도’의 일종으로서 간주하고 있는 듯하다.

사적소유권 = 외국인 투자자산의 몰수 위험이 낮은 제도?
그런데 이러한 모호성에 이외에도 그들이 말하는 제도의 좋고 나쁨, 내지는 사적 소유권의 유무에 대한 ‘정도’를 어떻게 ‘경험적, 계량적’으로 측정할 것인가라는 문제도 또한 남아있다. ‘사적 소유권’ 내지는 ‘시장에서의 자유’의 정도를 직접 계량적으로 측정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그것들 대신 그들이 사용한 지표는 어떤 국가가 “외국인” 투자 자산을 ‘몰수할 위험에 대한 지수’(Risk of Exploration Index)이다. 그리고, 그러한 위험이 낮은 국가는 “내국인, 외국인”을 막론하고 ‘사적 소유권’과 ‘시장에서의 자유’가 일반적으로 보호되는 국가라고 단정한다.
즉, 그들의 주장은, ①‘제도가 경제활동을 규정한다’라는 거창한 슬로건에서 시작하여, ②‘사적 소유권 내지는 경제적 자유가 보호되어야만 경제성장이 높다’라는 명제로 좁혀지는데, 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경험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은 ③“외국인의 투자가 몰수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되는 국가는 경제성장률이 높다”라는 아리송한 명제에 불과하다. 즉, 실제로는 북미국가, 호주, 뉴질랜드, 홍콩, 싱가포르는 외국인 투자를 보호하여 주었기에 경제성장률이 높았고, 아프리카, 남미국가들은 외국인 투자 보호 정도가 낮기에 경제성장률이 낮다는 인과관계를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그들 주장의 민낯을 보게 되면 ①, ②에는 수긍하는 사람들조차 갸우뚱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돌아가서 살펴보면, 그들이 말하는 ‘포용적 경제 제도’는 ‘외국인 투자를 보호하는 경제 제도’, 그리고 ‘착취적 경제 제도’는 ‘외국인 투자를 보호하지 않는 경제 제도’에 불과하다. 나머지 미사여구들은 모두 자신들의 편향성을 설득하기 위한 보조 장치에 불과한 듯하다.
물론 그들은 ‘사적 소유권’의 유무와 ‘외국인 투자 보호’는 큰 상관관계를 보인다고 주장한다. 본인의 견해로는 양자 간의 게량적 상관관계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역시 ‘사적 소유권’을 정의하는 문제와 ‘사적 소유권’을 계량화하는 변수에 대한 문제가 또다시 존재할 수 있기에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에 대하여서는 큰 의문을 가지고 있다.
또한 어떤 권위주의적 제도의 경우에는 외국인에 대한 투자보호가 높을 수도 있는데, 이는 외국인들은 국제 사회를 통하여 언제나 강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음에 반하여, 자국민에 대하여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국인에 대한 투자 보호’가 낮은 경우라도 그러한 현상은 기존의 식민지 정책으로 인하여 기형화된 경제 및 정치 구조상 잦은 쿠데타와 정권 교체, 그에 따라 적대적 관계에 있는 외국인 자산의 몰수 및 외국인 내지는 내국인에 대한 재불하 등의 악순환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것을 과연 원인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반대로 외국인에게는 박하지만, 경제성장이 빠른 경우도 있다. 필자가 외국대형은행에 재직시 책임지고 있던, 그 은행과 유수의 서구 대기업이 투자한 대략 2조원에 육박하는 중국의 대형 화력발전소 프로젝트가 있었다. 2001년 중국 정부가 전력 구매 계약을 파기하면서 거의 실질적으로 외국인 투자자들은 발전소만 남겨놓고 거의 빈손으로 쫓겨난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을 목격한 서구의 경제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외국인 투자보호를 하지 않는 중국경제는 망할 것이라고 저주한 바 있었지만 그 이후의 역사적 전개는 달랐다. 즉, 자국 경제의 보호를 위하여 외국인의 권리를 제약하는 경우라도 빠른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권력과 진보’에서 말하는 권력 개념의 문제
위와 같은 개념적 혼란은 그들의 책 《권력과 진보》에서도 보인다. 그 책의 중심 테마인 ‘권력’에 대하여 그들이 제시한 유일한, 실로 ‘무식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권력이라는 것은 개인이나 그룹이 명시적 혹은 암묵적인 목적들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다. 만일 두 개인이 같은 빵을 원할 때, 권력은 그 둘 중 누가 그 빵을 차지할 수 있도록 한다”.
이 구절의 첫 번째 문장을 보자. 내가 다이어트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다고 할 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도 그들의 정의에 의하면 권력이다. 혹은 슈퍼마켓에서 빵을 사기 위하여 주인에게 돈을 주고 빵을 건네받았을 때도 나는 슈퍼마켓 주인에게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셈이다. 두 번째 문장을 보자. 철수와 영희 모두 빵을 원하는데, 철수가 양보하여 연약한 영희가 빵을 먹게 되었다. 이때, 그들에 의하면 철수는 영희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 그들은 또 다른 권력에 대한 정의 비슷한 것을 제시하고 있는데, ‘설득’ (persuade) 할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일례를 들자면, 내가 어떤 길로 운전하여 어느 곳에 가는 중인데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친구가 이 길은 혼잡하니 다른 길로 가자고 나를 설득하였고, 나는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설득에 따랐다. 그들의 정의에 의하면 내 친구는 나에게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셈이다. 또 다른 예로, 연구소에서 신약을 실험하고 있는데, 어떤 연구원이 새로운 첨가제를 시도하도록 다른 연구원들을 설득하였다면 그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셈이다. 애석하게도 그들은 권력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핵심적이고, 권력에 대한 막스 베버를 위시한 각종 정의 등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지식조차도 전적으로 무지한 듯하다.
이러한 개념적 정의의 모호성 내지는 불완전성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논의는 본 에세이에서의 한정된 지면상 생략하기로 한다. 단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이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그들이 주장에서의 핵심 개념의 ‘정의’를 내림에 있어 아주 서툴며, 대부분의 경우는 정의를 하지 않고 본론을 시작한다. 그 노벨상 수상자들은 계량경제학은 잘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인 사회학적, 논리적, 철학적 소양과 훈련은 거의 낙제점 수준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이렇듯 자신들이 주장에서 핵심적인 개념에 대하여 이해가 결여되어 있는데 그로부터 도출되는 결론과 그에 근거한 경험적 검증은 사상누각일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특히 그러한 저술들이 노벨 경제학상이라는 ‘삐뚤어진 왕관’을 뒤집어쓴 경우라면 자신과 타인들 모두를 기만하는 독약이 될 수도 있다.
인과성의 혼동
계량 경제학에서의 인과성은 진정한 인과성이 아니다
이번 노벨경제학상 수상 이유는 제도와 경제 간의 중요한 ‘인과관계를 경험적으로 규명’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경험적이라는 말은 소위 ‘계량경제학적 분석’을 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의 모든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그들이 말하는 계량 경제학에서의 인과관계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인과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계량경제학에서 x가 y의 원인이라고 말함은 x가 y에 비하여 시간상으로 ‘먼저 관찰’된다거나, 혹은 통계학적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것들은 인과관계를 구성하는 필요조건도 아니고 충분조건도 아니며, 단지 어떠한 상관성이 있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음의 명제에서 p와 q간의 상관관계가 아주 높다고 하더라도 시간상으로 선행하는 p는 q의 원인이 아니다. 즉, p가 q에 비하여 시간상으로 ‘항상’ 선행하여 발생하였다고 하더라도 p는 q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p: 크리스마스카드가 많이 팔린다. q: 크리스마스가 왔다.
p: 우산이 많이 팔린다. q: 홍수가 난다.
위의 예에서 자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은 p, q 모두 어떤 다른 제3의 원인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이며, p와 q 간의 인과성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는 1편 글에서 이용한 다음과 같은 명제를 보자: “배가 고파서 숟가락을 사용하여 밥을 먹어서 허기를 달래었다”. 숟가락을 사용하는 행위와 밥을 먹는 행위 간의 상관관계는 한국의 경우에는 아주 높게 나타난다. 반면 일본의 경우에는 그 상관관계는 낮고, 오히려 젓가락을 사용하는 행위와 밥을 먹는 행위 간의 상관관계가 높다. 즉 그 상관성은 다분히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이 경우에 있어서 숟가락이나 젓가락은 ‘원인’이 아니라 ‘수단’이며, 진정한 원인은 배가 고파서 먹고자 하는 의도이다. 또한, 그 결과를 초래하는 보다 중요한 요인은 밥이지 숟가락이나 젓가락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어떤 주어진 환경하에서 상관관계가 높다는 것은 인과성을 항상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적으로 인과관계를 규명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자 계량경제학을 모르는 대중과 분석자 자기 자신도 속이는 것이다. 계량경제학적 검증은 일종의 참고자료이며, 중요한 것은 그 상관관계를 제대로 해석하는‘제대로 된’ 이론과 연구자의 통찰이다.
경험적 분석과 인과성을 오인 및 남용한 결과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번 노벨상 수상자들의 경험적 검증에 대한 논리를 살펴보자. (필자주-고등학교 수학시간에서 배웠듯이, 아래의 “~”표시는 논리학에서 부정을 나타낸다. A는 북미 식민지, B는 아프리카 및 남미 식민지 상황이며, X는 포용적 제도, Y는 높은 경제성장을 각각 표시한다.) 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①A라는 환경에서 X와 Y의 상관관계가 높다. ②그런데, B라는 환경에서는 ~X와 ~Y의 상관관계가 높다. ③따라서, ‘보편적으로’ X는 Y와 상관관계가 높다. ④따라서, X는 Y의 ‘원인’이다.
이렇게 단순화시켜서 정리하면, 이 논리가 가지는 문제점이 명백해진다. ③은 ①및 ②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명제가 아니다. 즉, ③을 도출하기 위하여서는 최소한 ②도 A라는 동일한 환경하에서 성립된다는 점을 검증하여야만 한다. 더욱이 지난 글에서 필자가 제시한 예들은 A라는 환경에서 ~X가 도입되더라도 Y가 결과될 수 있으며, B라는 환경에서 X가 도입되더라도 ~Y가 결과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보편적’으로 X와 Y가 상관관계가 높다는 그들의 주장이 비논리적임을 지적했다. 또한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비록 X와 Y의 통계학적 상관 관계가 높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말하는 X는 ‘원인’이 아니라, 수단이거나 혹은 다른 원인의 또다른 결과일 수 있다. 즉, ③로부터 ④를 단정할 수도 없다.
정리하자면, 포용적 제도를 정의하고, 측정하는 문제를 차지하고라도, 그들의 계량경제학적 연구 자체로 볼 때 포용적 제도와 경제성장간의 상관관계가 ‘보편적으로’ 존재함을 입증하지는 못하며, 설사 그 같은 상관관계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상관관계는 항상 인과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론
개념적 모호성과 인과성에 대한 몰이해
이번 노벨상 수상은 ‘제도가 경제활동에 미치는 인과관계를 규명하였다’라는 공로로 애쓰모글루 등 세 명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이들이 ‘제도’라고 규정한 것은 사실 ‘사적 소유권’과 ‘시장자유주의 시장경제’ 체제이며, 이러한 것들이 보장되는 사회제도를 그들은 ‘포용적 제도’라고 칭하고 있다. 그들의 불분명한 용법에 의하면 그렇지 못한 사회제도는 ‘착취적 제도’라고 칭하는데, 이에는 국가 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지는 중국을 포함하는 국가주도 성장 모델을 따르는 ‘권위주의적’ 제도도 포함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기타 경제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문화’ 등의 광의의 제도는 배제되어 있다.
또한 그들의 가장 중요한 공헌이라고 간주되는 그러한 인과관계에 대한 ‘계량적’ 연구에는 여러 중요한 난점과 혼란이 내재되어 있는데, 그들이 사용한 ‘사적 소유권’과 시장 자유의 정도를 대표하는 변수는 ‘외국인 투자 보호’ 지수에 다름아니다. 결국 그들의 주장은 논의의 시작과는 달리 ‘외국인의 투자를 몰수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면 경제 성장률이 높아진다’라는 아리송한 명제로 귀착된다.
논리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그들의 주장은 여러 난점을 내포한다. 그들이 말하는 ‘포용적 경제’만이 높은 경제성장을 현시할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며, 또한 그들이 말하는 포용적 경제라는 것은 경제성장의 ‘원인’이 아니라, 여러 가능한 수단 중의 하나에 불과하거나, 혹은 경제성장률과도 마찬가지로 다른 원인에 의한 결과의 일부일 수 있다. 또한 그들이 ‘착취적 제도’라고 암묵적으로 간주하는 중국과도 같은 ‘권위주의적 제도’도 빠른 경제 성장을 시현할 수 있으며, 그들이 ‘포용적 제도’로 간주한 싱가포르나 한국의 초기 경제 성장 과정은 사실 ‘권위주의적’ 제도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후자와 같은 경우가 19세기~20세기에 있어서의 경제성장을 설명함에 있어서 주류이고, 그들이 말하는 ‘포용적 제도’의 도입에 의한 자본주의적 성장이 오히려 예외적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말하는 경험을 통한 과학적 검증이라는 주장도 그들이 말하는 포용적 제도와 경제성장과의 ‘상관관계’를 “보편적으로” 주장할 수 없으며, ‘인과관계’는 더더욱 아니다.
과학적이기 보다는 종교적 신념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이러한 난점을 은폐한 채, 사적 소유권의 신성화와 시장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들의 이론은, 평소 자유주의라는 종교를 믿고 싶어하고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론이며, 그리하여 자신들의 평소 신념을 재확인하며 열광하게 하는 종교교리와도 유사하지, 소위 과학적 분석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필자의 의견이다. 그렇기에 필자의 눈에는 그들의 주장은 다분히 종교적 편향성의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케인즈의 ‘보충성의 원칙’의 중요성
물론 필자가 사적 소유권이나 자본주의 경제 질서가 가지는 장점을 철저히 도외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것들의 긍정적인 면은 인정하되, 국가의 역할과 민간의 역할이 ‘상호보완’되어야만 한다는 케인즈가 말한 ‘보충성의 원칙’을 염두에 두고서 경제 성장과 발전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동시에 이번 노벨 수상자들이 주장하는 흑백 논리와 종교적 편향성이 가지는 위험성을 명심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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