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학
출판번역가
조영학 출판 번역가는 텃밭을 가꾸고 야생화를 찾아 이 산 저 산을 헤매는 일을 좋아하며, 20년 가까이 아내를 위해 밥상을 차리고 있다. 저서로는 <천마산에 꽃이 있다>, <여백을 번역하라>, <상 차리는 남자? 상남자!>(공저), <살아있는 동안 꼭 봐야 할 우리 꽃 100>(공저) 등이 있고, 번역서로 <나는 전설이다>, <스티븐 킹 단편집> 등 90여 편이 있다. 현재 서울신문, 한국일보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조영학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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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문화
텃밭에서 살아남기
10년 전, 농사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내게 함께 텃밭을 해보자고 권했던 C는 바로 그 해를 마지막으로 손을 뗐다. 그 시간에 차라리 테니스 연습을 더 하겠단다. 후배도 동료들과 함께 텃밭을 하겠다며 2~3년 열심이더니 “형, 난 텃밭 체질이 아닌가봐”하며 떠났다. 도시의 중년 남성이 제일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이 ‘나는 자연인이다’라고 들었다. 콘크리트뿐인 거리, 획일적이고 답답한 사무실, 복잡한 인간관계, 편치 않은 가정사 등 문명사회에서의 삶이 만만치 않다는 반증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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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문화
갇혀있는 땅 걸산리
내가 걸산리에 가고 싶다고 하자 H는 그 전에 가야 할 곳이 있다며 나를 돌려세웠다. 그가 데려간 곳은 경기도 동두천시 생연1동 못골이라는 작은 마을이다. H가 태어난 곳이자 현재 사는 곳이다. 어릴 적 H를 만나기 위해 나도 자주 들락거렸지만 수십 년만에 와보니 옛 모습은 거의 남지 않았다. 그때는 마을 한가운데 구식방앗간이 있고 그 앞에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못골이라 들었는데 지금은 예쁘게 단장한 작은 못 하나만 상징처럼 남아 있다. 기억 속 진창길도 모두 포장이 되었다. H가 이끄는 대로 못 옆을 지나니 얼마 되지 않아 산길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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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문화
페미니즘을 알면 달라지는 것-②
몇 해 전 친구와 술 한잔하는데 이 친구 자기 부인한테 섭섭한 마음이 한 두름이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 나 정도면 좋은 남편 아니냐? 돈 잘 벌어다 줘. 가정에 충실해. 내가 바람을 피우냐 뭘 하냐? 도대체 뭐가 저렇게 불만이 많은 거지?” 우습게도 오래전 내가 품었던 오해이기도 했다. 신혼 초 직장을 다니면서 퇴근 후 동료들과 한잔하고 들어가도 아내는 불만이었다. 회식이 조금 늦어지면 전화로 왜 늦느냐고 타박도 했다. 당연히 나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지 않는가. 사회 생활이 다 그렇고 남자들의 삶이 다 그렇지 않는가 말이다. 아내의 불만이 술 때문도 아니고 늦은 퇴근 때문도 아니라는 사실을 안 것은 한참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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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문화
페미니즘을 알면 달라지는 것-①
몇 해 전 #MeToo 운동이 시작될 때만 해도 기대가 컸다. 마침내 우리나라에서도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이 커지겠구나 하고. 그런데 운동이 무르익기도 전에 백래시(backlash)가 터지더니 어느 순간 “페미니즘”은 금기어처럼 되고, 페미니스트조차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하고 운을 뗀다는 웃지 못할 얘기까지 전해진다. 여성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정치가가 여당 대표가 되고 급기야 “구조적인 여성 차별은 없다”고 주장하는 인물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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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문화
누가 장애인인가?
“난 사지마비 환자예요. 어린아들과 침대에 누워 있는데 물이 빠르게 치고 올라와요. 제발 도와주세요.” 2005년 하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스를 휩쓸었을 때 실제로 있던 일이다. 제방이 무너져 마을의 60%가 물에 잠겼지만 홍수에 이동권과 돌봄서비스를 빼앗긴 중증장애인들은 꼼짝없이 사지에 내몰려야 했다. 급히 911에 전화를 했으나 도움은 없었다. 장애인 구조계획 자체가 잡혀있지 않은 탓이다. 당시 48만 4000 뉴올리언스 주민 중 23.2%만이 도시를 빠져나갔는데, 홍수가 났을 때 다섯 살 이상의 장애인이 10만2122명이었다. 장애인이 카트리나에 얼마나 희생당했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장애인 희생자 비율이 훨씬 더 컸으리라는 정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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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문화
봄은 텃밭에서부터 온다
“여기, 냉이 올라왔다.” “정말?” “응, 이거 냉이 아닌가?” 모처럼 따뜻한 봄날, 점심 산책 중에 아내가 찾아낸 것은 냉이가 아니라 지칭개였다. 아내는 식물에 눈이 밝지 않아 매년 지칭개와 냉이를 헷갈려한다. 아직 냉이는 보이지 않지만 쑥과 곰보배추, 망초 등은 여기저기 새싹을 내밀기 시작했다. 따뜻한 남녘과 달리 이곳 경기 북부는, 매화 꽃눈도 아직 이르고 텃밭에는 아직 녹지 않은 얼음이 가득하다. 그래도 자세히 보면 어김없이 봄은 바로 곁에까지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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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무당이 다스리는 나라
“우리 전략은 완전히 실패했어. 카이사르가 스페인을 쑥밭으로 만들고 다니는데 그냥 멍하니 앉아만 있잖아. 내가 보기엔 (폼페이우스가) 점괘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어. 새와 짐승 내장이 평상시에야 의미가 있다손 쳐도 그런 식으로 군대를 통솔할 수는 없지. 천재 지휘관이라고 큰소리는 치는데 솔직히 요즘은 갸우뚱한다니까.”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 『딕타토르』의 한 구절이다. 카이사르가 준동하자 키케로는 폼페이우스와 동맹을 맺고 그에 맞서지만, 서민 출신의 합리적인 키케로와 달리 덩치만 크고 무식한 귀족 폼페이우스는 미신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치밀한 작전과 냉철한 판단이 아니라 장복관의 점괘에 따라 출정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키케로의 탄식에도 불구하고 결국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 대패하고 만다. ‘장복관(腸卜官)’이란 제물을 죽인 후 내장을 살펴 징조를 결정하는 일종의 무당이다. 제정일치의 시대이니 점괘를 따지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미신이나 무속이 판단을 흐리고 잘못된 결정을 하게 만든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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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문화
봄꽃이 들려주는 얘기들
남녘에선 벌써 ‘복수초’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 복수초. 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꽃이어서일까? 신기하게도 매년 정월 초하루 즈음이면, 지리산과 강원도 동해에서 예외 없이 샛노란 꽃을 피운다. 올해도 복 많이 받고 건강하라고 우리를 축원하는 듯이 말이다. 어느 해 겨울인가, 강원도 여행 중에 나도 일부러 동해를 찾아가 복수초를 보며 가족의 안녕을 빌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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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문화
꽃 한송이 꺾는 것이 곧 ‘멸종의 시작’이다
[조영학 출판번역가] 강원도 화천, ‘비수구미 마을’엔 아주아주 특별한 공간이 있다. 비수구미는 평화의 댐 근처의 오지마을이다. 가구 수는 셋, 일반인은 차를 타고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오지(7km의 임도를 걷거나 1.5km 산길을 넘어가야 한다)이나, 마을 이름의 뜻이 “신비로운 물이 빚은 아홉 가지 아름다운 고장”일 정도로 정취가 아름다워, 불편한 교통에도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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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문화
좀비마을의 가을걷이...곧 김장하네!
[조영학 번역가] 가을은 노란색이다. 풀도 나무도 곡식도 모두 노랗다. 이슬이 서리로 변하기 시작한다는 한로(寒露)가 지나자 논의 벼도 줄기가 노랗게 물들고 낱알은 고개를 숙였다. 마음 바쁜 논은 벌써 추수를 마치고 여기저기 하얀 ‘곤포 사일리지’가 나뒹군다. 예전에는 몰라서 공룡 알, 마시멜로라 불렀는데 저런 식으로 발효해 가축사료로 쓴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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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문화
60대 번역가의 변신...내 이름은 붥덱
[조영학 출판번역가] 가을볕이 좋은 요즘, 텃밭 배추 자라는 속도가 눈에 보일 정도다. 오늘 아침엔 배추 겉잎을 조금 따다가 배춧국을 만든다. 멸치와 다시마로 국물을 내고 된장 한 스푼 채반에 걸러 푼 다음 배추 잎과 함께 끓이면 되는 간단한 음식이지만, 아침에 속이 편하다며 아내가 좋아한다. 여기에 굴비를 굽고 나물을 한 두 가지 볶고 김장김치와 장아찌를 내고, 김 한 장 정도를 구우면 아침 상 준비가 끝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