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번역가의 변신...내 이름은 붥덱

[조영학의 ‘내 이름은 붥덱’] 붥덱=부엌데기...”아내 위해서라면”

맹지를 사서 농사를 짓고 있는 필자.
맹지를 사서 농사를 짓고 있는 필자.

[조영학 출판번역가] 가을볕이 좋은 요즘, 텃밭 배추 자라는 속도가 눈에 보일 정도다. 오늘 아침엔 배추 겉잎을 조금 따다가 배춧국을 만든다. 멸치와 다시마로 국물을 내고 된장 한 스푼 채반에 걸러 푼 다음 배추 잎과 함께 끓이면 되는 간단한 음식이지만, 아침에 속이 편하다며 아내가 좋아한다. 여기에 굴비를 굽고 나물을 한 두 가지 볶고 김장김치와 장아찌를 내고, 김 한 장 정도를 구우면 아침 상 준비가 끝난다.

필자가 직접 만든 가지탕수육.
필자가 직접 만든 가지탕수육.

우리집은 ‘남양주 맛집’

내 나이 예순하나, 성별은 남성. 영어로 된 책을 번역하고 이런 저런 책을 펴내고 여기저기 글 빚을 지는, 이른바 글쟁이이지만 우리 집 식사준비는 늘 내 몫이다. 나이와 성별을 밝힌 이유는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풍경에서 다소 벗어나 있겠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가정에서 요리하는 남자가 예전보다 많아졌다 해도, 처음 아내한테서 부엌살림을 빼앗다시피 한 2000년 대 초중반만 해도 ‘부엌은 여성의 몫’이 공식이던 시절이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 이런, XX 떨어질 소리!” 어쨌거나 칼 쥐는 것도 서툴고, 밥 물 잡는 법도 모르던 중년아재는, 그 사이에 안 만드는 음식은 있어도 못 만드는 음식은 없다고 큰소리칠 정도로 요리 솜씨가 늘었다.

딱히 거짓말도 아니다. 짬뽕, 물회, 족발, 새우장 등 어지간한 외식 메뉴도 대부분 집에서 해결하고, 처음 보는 음식도 요리법을 보면 비슷한 정도는 만들어낸다. 아이들 친구들은 우리 집을 ‘남양주 맛집’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주 최고의 금슬’ 자랑하며

선택은 기적을 낳는다고 했던가? 요리는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아내를 위해 매일매일 성심껏 밥상을 차려낸다는 얘기가 알려지면서, 어느 촌구석의 늙고 보잘 것 없는 번역쟁이가 에세이집 <상 차리는 남자? 상남자!>의 공동저자로 이름을 올리고 명망 있는 매체에 글까지 싣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정말로 변한 건 나 자신이다. 위태롭던 부부 사이는 ‘우주 최고의 금슬’이라 우길 만큼 좋아지고, 나 또한 아내와 아이들의 사랑을 담뿍 받으며 지내고 있다. 돌이켜보면 말 그대로 기적과도 같은 변화였다. 바쁜 일과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식사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족의 행복과 사랑.

내 이름은 붥덱. 내가 내게 지어준 별명이다. 붥댁이 아니라 붥덱, 붥덱 조영학이다. 눈치를 챘겠지만 붥덱은 부엌데기의 준말이다. 집에서 살림하는 여자를 낮잡아 부르는 명사를 살짝 바꾸어 별명으로 삼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필자가 만들어 아내 밥상에 올린 소고기무국.
필자가 만들어 아내 밥상에 올린 소고기무국.

부엌데기라 업신여기다니

몇 해 전 성 평등 관련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질의시간에 한 중년여성이 그런 말을 했다. “남편과 아이들이 부엌데기라고 업신여겨요.” 집에서 가족을 위해 음식을 해본 사람은 안다. 흔히 집밥이라 부르는 하찮은 음식이 사실은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하며, 그 음식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민과 전문기술이 필요한지.

“간단하게 국수나 말아먹자”는 그 국수만 해도 잔치국수, 비빔국수, 칼국수, 냉면, 짜장면, 짬뽕 등 종류만 해도 수십, 수백 가지에 달하고, 그 하나하나에 걸맞은 요리 방법도 또 다시 수십 가지다. 일류 요리사들이야 전문분야 몇 가지만 숙달하면 그만이지만, 집밥은 말 그대로 뫼비우스의 띠 같은 세상이다.

출판번역을 20년 이상 붙들고, 야생화를 10년 이상 쫓아다니고, 텃밭 재배를 10년 동안 했지만, 집밥만큼 고급 기술이 필요한 일은 단연코 없었다. 게다가 집밥이야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부엌일을 하찮게 여기고 “집에서 밥이나 하는 여자들” 운운하다니! 그러면서도 인기 좋은 요리사는 죄다 자기들 남자 차지다.

난 그 자리에서 그간 장난처럼 써오던 붥덱을 내 호(號)로 정해버렸다. 요컨대, 여자들이 하는 일은 천한 일, 남자들이 하는 일은 가치 있는 일이라는 식의 뿌리 깊은 편견에 반대한다는 의미다. 밥상 너머에도 사람이 있다.

60대 남자의 ‘부엌 투쟁기’를

번역서를 90권 이상 내고 번역이론서도 내고 야생화 책도 공저를 포함해 세 권을 출간했지만 내 직업은 누가 뭐래도 부엌살림이다. 예전에는 번역가가 본업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번역이 바쁘다는 핑계로 음식을 대충 만들어 식구들의 핀잔을 듣기도 했다. 지금은 그 반대로 번역이 뒷전이다. 일을 줄이고 그 시간에 가족들과 맛있게 살기 위한 궁리를 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은 식구들에게 건강하고 깨끗한 음식을 제공하고 집을 편안한 휴식처로 만드는 것이다. 살림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 아니겠는가. 10년 전부터는 땅을 빌려 텃밭을 시작하고 몇 해 전부터는 아예 맹지를 구입해 온갖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간장과 된장은 물론 막걸리와 맥주도 직접 담가 먹고 마신다.

“칼럼은 다들 쓰잖아요. 60대 남자의 부엌 투쟁기 어때요? 그게 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칼럼 의뢰가 들어왔을 때 내가 한 말이다. 몇 년째 칼럼을 쓰는 신문이 이미 두 곳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내가 쓰고 싶은 글이어서다. 가벼운 일상의 기록, 메시지보다 미소가 더 크고 좋은 서사, 남이 아닌 내 얘기들…음식 이야기, 텃밭 이야기, 야생화 이야기, 사는 이야기…어쩌면 생각보다 할 얘기가 많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는 삶은 세상의 바깥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이따금 해본다. 세상의 중심에서 조금 비껴나,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 보지 않는 방향을 보는 것이다. 더칼럼니스트는 고맙게도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이제부터 조금씩 그 이야기들을 풀어볼 생각이다. 생전 처음 나만의 이야기를 써볼 소중한 기회가 아닌가.

글쓴이

조영학 출판번역가

조영학 출판 번역가는 텃밭을 가꾸고 야생화를 찾아 이 산 저 산을 헤매는 일을 좋아하며, 20년 가까이 아내를 위해 밥상을 차리고 있다. 저서로는 <천마산에 꽃이 있다>, <여백을 번역하라>, <상 차리는 남자? 상남자!>(공저), <살아있는 동안 꼭 봐야 할 우리 꽃 100>(공저) 등이 있고, 번역서로 <나는 전설이다>, <스티븐 킹 단편집> 등 90여 편이 있다. 현재 서울신문, 한국일보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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