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에서 살아남기

[조영학의 ‘내 이름은 붥덱’] 사람들 오해하는 ‘텃밭의 진짜 매력’ 병든 몸 치유하고 이웃과 작물 나눠 텃밭농업 가치 무궁무진...잘 살아남길

추운 겨울을 나고 제일 먼저 마늘 싹이 올라온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어린 삶은 아름답다. 사진=조영학
추운 겨울을 나고 제일 먼저 마늘 싹이 올라온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어린 삶은 아름답다. 사진=조영학

10년 전, 농사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내게 함께 텃밭을 해보자고 권했던 C는 바로 그 해를 마지막으로 손을 뗐다. 그 시간에 차라리 테니스 연습을 더 하겠단다. 후배도 동료들과 함께 텃밭을 하겠다며 2~3년 열심이더니 “형, 난 텃밭 체질이 아닌가봐”하며 떠났다. 도시의 중년 남성이 제일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이 ‘나는 자연인이다’라고 들었다. 콘크리트뿐인 거리, 획일적이고 답답한 사무실, 복잡한 인간관계, 편치 않은 가정사 등 문명사회에서의 삶이 만만치 않다는 반증이리라.

마음이야 훌쩍 문명을 떠나 자연 속에 숨고 싶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나마 도시농업, 이른바 텃밭놀이가 대안일텐데 한두 해 해보고는 “에이 힘들어 못하겠다”며 등을 돌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유가 뭘까? 내가 보기엔 텃밭의 매력과 가치를 오해한 데에서 비롯한다.

텃밭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엇일까

농촌진흥청에서는 도시농업의 매력과 가치로 ①뿌듯한 자부심 ②나누는 행복 ③몸과 마음의 건강 ④먹는 즐거움 ⑤가꾸는 재미를 들었다. 처음 텃밭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④먹는 즐거움→①뿌듯한 자부심→③몸과 마음의 건강 순으로 텃밭의 매력을 염두에 둘 것 같다. 텃밭을 하면 싱싱한 채소를 먹을 수 있고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몸과 마음의 건강 그리고 자부심까지 챙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텃밭 채소는 슈퍼에서 사는 채소보다 더 건강하고 싱싱하고 맛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도시농업인은 대체로 일주일에 한두 번 텃밭을 찾는다. 그에 반해 한여름 작물 자라는 속도는 눈에 보일 정도다. 예를 들어 지난주에 오이나 호박이 덜 익어 그냥 두었다면 그 다음주엔 너무 익어 씨가 커질 대로 커지고 만다. 가지는 벌레에 시달려 잔뜩 굽은 채 껍질 여기저기 누런 상채기가 박히고 수박은 기껏해야 아기 머리 크기로 자라 먹기도 전에 문드러지고 만다.

아까우니 어떻게든 요리를 해보지만 몇 해 전엔 배추가 왜 그리 뻣뻣한지 김장을 해놓고도 김치찌개 용으로나 간신히 써먹었다. 물론 잘 익은 토마토나 오이, 딸기를 만날 때는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하지만 시기를 맞추기가 어려운 데다 그건 먹는 즐거움이라기보다 직접 키운 작물이라는 프리미엄이 작용한 덕이 크다.

게다가 텃밭 작물인들 어디 저절로 크겠는가. 제때에 심고 주기적으로 추비를 하고 약을 주고 순을 따주는 등 정성을 쏟아야 그나마 그럴 듯한 작물을 얻는다. 그 수고도 장난이 아니다. 모처럼 텃밭에 왔는데 밭은 잡초가 점령하고 제대로 된 작물은 찾기 어렵다면 시간이 갈수록 한숨만 커질 따름이다. 순전히 농작물을 먹는 즐거움이라면 텃밭보다 ‘슈퍼 산(産)’이 더 나을 수 있다.

전문 농부들이야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농작물에 온갖 트릭을 부리는 사람들이 아닌가. 모양과 맛으로만 따진다면 오히려 그쪽이 선수다. 텃밭을 하며 먹는 즐거움이라면, 그보다 하루 노동을 마치고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따거나 텃밭 이웃이 모여 바비큐에 약주 한잔 걸치는 쪽이 더 가깝겠다. 실제로 그 재미로 텃밭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텃밭은 가족과 이웃이 모이는 장소다. 그로써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다워진다. 사진=조영학
텃밭은 가족과 이웃이 모이는 장소다. 그로써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다워진다. 사진=조영학

자부심과 건강도 그렇다. 어쨌든 파종을 하고 모종을 심으면 결실을 맺으니 보람도 자부심도 생기겠지만 그런 식의 기분은 사실 실체라기보다 개인의 마음가짐에 가깝다. 그러니까 이미 작은 일에 만족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도 자부심, 저녁에 술을 한 잔 덜 마셔도 자부심. 그런 마음가짐이야 개인한테든 주변사람에게든 분명 좋은 일이지만, 그런 사람은 텃밭을 하지 않아도 어디서든 얼마든지 뿌듯한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다섯 평, 열 평 텃밭 농사가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건강이라면 내게 텃밭을 권했던 C처럼 테니스를 하거나 산행을 하는 편이 낫다.

투자비에도 미치지 못할 소출, 잡초와의 끝없는 싸움, 30도를 훌쩍 넘는 무더위에서의 노동. 기껏 한주에 하루 가는 터라 도시농업은 하루종일 힘겨운 노동을 피할 길이 없다. 가물면 물 걱정, 장마에는 병해 걱정, 더위엔 일 걱정…그래도 난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텃밭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텃밭이 주는 삶과 행복을 누리면 좋겠다.

텃밭에서 치유받고 살아갈 힘도 얻어

내가 텃밭을 포기 못 하는 이유는 그곳에 삶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텃밭하는 사람을 ‘도시농부’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다. 텃밭을 하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은 대부분 도시인들이거나 흙과 무관한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요컨대, 도시의 콘크리트 밭에서 뒹굴며 살아간다는 뜻이다.

콘크리트밭과 텃밭은 생태계 자체가 다르다. 도시는 철저히 자본주의와 경쟁, 지배/피지배의 세계이지만 텃밭은 원시 세계에 가깝다(도시농업과 귀농은 그 점에서 다르다. 농사가 업이 되는 순간 자본주의 논리에 종속되고 만다). 이곳 원시 세계에는 잉여가치도 없고 착취와 비착취도 없다. 오로지 몸과 흙이 만나 삶을 만들어내고 삶을 나누고 그로써 내가 치유를 받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 도시농업인은 땅을 닮아 마음이 더 없이 풍요롭고 너그럽다. 그리하여 흙이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듯 자신이 거둔 작물을 이웃에게 나누어준다. 그것만으로도 난 도시농업인이 많아질수록 세상이 밝아지고 건강해지리라 믿는다.

옆집에서 많이 있다며 밤, 호박, 고구마를 가져왔다. 사진=조영학
옆집에서 많이 있다며 밤, 호박, 고구마를 가져왔다. 사진=조영학

그런데 오세훈 서울시장은 전임 시장의 치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도시농업 전담부서를 없애고 예산도 60% 이상 삭감하려고 들었다. 서울의 도시농업은 2022년 5월 현재 면적이 218㏊에 참여자가 66만명이다. 지난 10년간 면적은 7.5배, 참여인구는 15배 가깝게 늘어났다. 그만큼 도심 속 자연을 갈망하는 사람이 늘고 있건만 말 그대로 시대를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오 시장이야 콘크리트 세계의 대변인 같은 사람이니 도시의 흙을 모두 콘크리트로 덮고 싶겠지만 도대체 저 콘크리트 세계에서는 어떤 삶이 움트고 살아갈 수 있을까? 흙이, 땅이 줄고 있다. 도시인들이 땅과 만날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도시농업은 단순히 취미 활동이 아니다. 도시 텃밭은 도시인들에게 콘크리트 사막 속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삶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고 그로써 스스로 삶의 기운을 얻는다. 콘크리트 세상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과학저술가 조현욱은 <프리즘>에 기고한 칼럼에서 “도시인들이 알레르기 질환과 천식, 자가면역 질환 등에 많이 걸리는 이유가 자연과 접촉이 부족한 탓”이라며 2012년 5월 미국 국립과학 아카데미 회보의 논문을 인용하였다. “박테리아는 인체의 미생물상(相)을 다양하게 만들며 이것은 면역계가 정상적으로 발달하고 유지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건강에 이로운 박테리아는 도시가 아닌 지역에 훨씬 더 많이 존재한다”고 했다. 땅은 도시인들의 병든 마음과 몸을 치료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펜데믹 시대를 맞아 땅과 도시농업의 치유능력이 주목받고 있다. 삶이,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 것이다. 텃밭은 단순히 취미경작이 아니다. 흙을 만지고 작물을 키우고 이웃과 만나 나누는 행위만으로도, 도시농업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무궁무진하다. 나는 사람들이 텃밭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꼭 텃밭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 그래야 텃밭에서만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

글쓴이

조영학 출판번역가

조영학 출판 번역가는 텃밭을 가꾸고 야생화를 찾아 이 산 저 산을 헤매는 일을 좋아하며, 20년 가까이 아내를 위해 밥상을 차리고 있다. 저서로는 <천마산에 꽃이 있다>, <여백을 번역하라>, <상 차리는 남자? 상남자!>(공저), <살아있는 동안 꼭 봐야 할 우리 꽃 100>(공저) 등이 있고, 번역서로 <나는 전설이다>, <스티븐 킹 단편집> 등 90여 편이 있다. 서울신문에 <번역과 반역>으로 정기칼럼을 연재했으며, 지금은 한국일보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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