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이 들려주는 얘기들

[조영학의 ‘내 이름은 붥덱’] 눈속에 피는 봄꽃, 왜 일찍 아름답게 필까 봄꽃의 처절한 투쟁은 ‘약자의 투쟁’ 모습 닮아

복수초는 꽃잎을 금잔처럼 만들어 햇볕을 모은다. 사진=조영학
복수초는 꽃잎을 금잔처럼 만들어 햇볕을 모은다. 사진=조영학

가장 먼저 핀다는 ‘복수초’

남녘에선 벌써 ‘복수초’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 복수초. 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꽃이어서일까? 신기하게도 매년 정월 초하루 즈음이면, 지리산과 강원도 동해에서 예외 없이 샛노란 꽃을 피운다. 올해도 복 많이 받고 건강하라고 우리를 축원하는 듯이 말이다. 어느 해 겨울인가, 강원도 여행 중에 나도 일부러 동해를 찾아가 복수초를 보며 가족의 안녕을 빌었더랬다.

눈 속에 핀 복수초. 눈 속에 묻힌 봄꽃을 '설중화'라고도 부른다. 사진=조영학
눈 속에 핀 복수초. 눈 속에 묻힌 봄꽃을 ‘설중화’라고도 부른다. 사진=조영학

사실 복수초가 특별히 빨리 피는 꽃은 아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제일 먼저 봄소식을 들려주는 꽃은 ‘변산바람꽃’이다. 2월 바다에서 훈풍이 불기 시작하면 남쪽에서부터 변산바람꽃의 개화소식이 들려온다. 내가 사는 경기북부에서는 변산바람꽃 대신 ‘너도바람꽃’이다. 2월말 이곳 천마산에서는 ‘앉은부채’와 너도바람꽃이 먼저 개화하고 그 꽃들이 지기 시작하는 3월 중순이나 되어야 복수초가 고개를 내민다. 동해의 복수초가 특별히 신기한 것은 그래서다. 어떻게 한겨울 꽁꽁 언 땅을 녹이고 꽃대를 내밀었을까? 그것도 제일 춥다는 강원도에서?

봄꽃은 왜 눈물나도록 아름다울까

사람들에게 봄꽃 이야기를 들려줄 때 늘 질문부터 한다. “벚꽃이 만개한 벚나무가 왜 그렇게 아름답고 인기가 많은 줄 알아요?” 그럼 대답은 대체로 “겨우 내내 꽃에 굶주렸으니 반가워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나도 2월이면 벌써 온몸이 들썩거린다. 10월 산국, 꽃향유(우리나라에서 제일 마지막에 피는 꽃은 좀딱취이지만 남부지방에서만 핀다)를 마지막으로 벌써 3개월째 꽃구경을 못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이른 봄 계곡을 가득 덮은 여리디 여린 봄꽃이 얼마나 반갑겠는가.

다만 내가 준비한 대답은, “잎이 없어서”다. 매화, 산수유, 생강나무, 벚꽃, 살구꽃, 자두꽃 등등, 우리 주변에 흔히 보는 봄 나무 꽃들이 대부분 그렇다. 여름나무와 달리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운다. 잎이 무성해야 할 자리까지 꽃이 다 차지했으니 얼마나 풍성하고 화려하겠는가.

변산바람꽃의 꽃잎처럼 보이는 흰색은 꽃받침이고 꽃잎은 꽃술처럼 변했다. 사진=조영학
변산바람꽃의 꽃잎처럼 보이는 흰색은 꽃받침이고 꽃잎은 꽃술처럼 변했다. 사진=조영학

가혹한 환경에 맞서야 하는 봄꽃

혹한의 시련을 이겨내고 새 희망을 상징하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느냐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봄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계절이다. T. S. 엘리엇은 4월이 가장 잔인한 까닭은 우리에게 헛된 희망을 주기 때문이며, 겨울이라는 죽음이 낳을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라고 했지만, 아무리 헛된 바람일지언정 새로운 생명이 싹을 틔우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어쩌면 봄꽃들에게 겨울보다 봄이 더 혹독할 수도 있다. 이제는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니까. 살아서 번식을 해야 하니까. 엘리엇의 말처럼, 겨울은 오히려 편안한 꿀잠 같았으리라. 봄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시련을 이겨냈기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가혹한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복수초, 변산바람꽃, 너도바람꽃, 노루귀, 얼레지, 현호색 등 이른 봄꽃이 피는 곳은, 햇볕 따뜻한 남쪽이 아니라 기이하게도 해가 짧아 아직 얼음도 녹지 않은 그늘진 북쪽, 산의 북사면이다. 처음 야생화에 눈을 떴을 때 무엇보다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도 이 점이었다. 왜, 봄꽃은 따뜻하고 밝은 남쪽이 아니라 춥고 어두운 북쪽에서 먼저 피는 걸까? 또 얼음도 녹지 않은 1, 2월에 서둘러 꽃을 피우려는 이유는 뭘까? 이른 봄 그렇게 계곡을 가득 채우다가도 4월 중순이 지나면 어째서 몰살이라도 당한 듯 한꺼번에 사라져버리는 걸까?

너도바람꽃은 흰 꽃잎은 꽃받침이 변한 것이다. 실제 꽃잎은 노란 꿀샘을 달고 있다.사진=조영학
너도바람꽃은 흰 꽃잎은 꽃받침이 변한 것이다. 실제 꽃잎은 노란 꿀샘을 달고 있다.사진=조영학

인류가 처절한 생존투쟁을 벌였듯이

봄꽃은 어쩌면 약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햇볕 가득, 따뜻한 남쪽은 키 큰 나무와 튼튼한 꽃들한테 빼앗기고, 경쟁을 피해 춥고 척박한 북사면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런데 환경이 열악하기에 이제 힘 센 친구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경쟁을 해야 한다. 7만 년 전, 인류가 따뜻하고 비옥한 아프리카를 벗어나 유라시아로 떠나야 했을 때 추위와 부족한 일조량을 극복하기 위해 피부색을 흰색으로 바꾸었듯, 이제 봄꽃들은 이 척박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한다.

봄꽃이 자리 잡은 북사면 계곡은 해가 짧고 춥고 나비와 벌 같은 매개곤충이 귀하다. 더욱이 수량이 풍부해 낙엽활엽수가 광범위하게 자리를 잡기에 4월이면 활엽수 잎이 하늘을 막아 봄꽃들이 햇볕을 받기가 점점 어렵게 된다. 혹한을 무릅쓰고라도 서둘러 이른 꽃을 피우고 아름답게 단장해야 하는 이유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든 양분을 아끼고 곤충을 불러들이고 수정을 하고 씨방을 맺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루귀는 꽃이 진 다음에 잎을 낸다. 꽃잎처럼 보이는 것은 역시 꽃받침이다.
노루귀는 꽃이 진 다음에 잎을 낸다. 꽃잎처럼 보이는 것은 역시 꽃받침이다.

양분을 아끼고 꿀벌을 유혹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한 투쟁도 눈물겹다. 복수초가 1월 초, 동토에서 꽃을 피우는 비결은 주변보다 꽃의 체온이 6~7도 높아서다. 복수초는 눈이 부시도록 밝은 노란색 꽃잎을 금잔처럼 만들어 햇볕을 잔뜩 머금고 그 햇볕으로 곤충들을 끌어 모은다. 곤충들은 그 속에서 몸을 녹이며 놀면서 몸에 꽃가루를 묻히고 꽃의 수정을 도와준다. 얼음 사이로 핀다고 얼음새꽃, 눈을 녹이고 나온다 하여 눈색이꽃이다. 이런 별명들이 괜히 붙은 것은 아니다.

변산바람꽃, 너도바람꽃 같은 바람꽃 종류나 노루귀 등의 투쟁은 더욱 치열하다. 이들은 아예 꽃받침을 꽃잎처럼 바꾸고 꽃잎을 꽃술로 만들어 꿀샘까지 만들어낸다. 역시 부족한 양분을 아끼고 매개곤충들을 최대한 유혹하기 위한 전략이다. 변산바람꽃에서 보는 다섯 개의 흰 꽃잎이 실은 꽃받침이고 꽃술을 둘러싼 녹색의 깔대기가 바로 꽃잎이다. 너도바람꽃이라면 노란색의 꿀샘이 달린 꽃술이 꽃잎이다. 노루귀 같은 꽃도 꽃잎이 꽃받침의 변신이지만 거기에 더해 벚나무처럼 꽃을 먼저 피우고 꽃이 진 다음에야 잎을 낸다. 이보다 더 치열한 변신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른바 생존을 위한 투쟁이 진화로 이어진 것이다.

봄꽃은 약자들의 혁명이다

벚꽃, 매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만큼 봄이 살아내기에 혹독한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 많지 않은 나비와 벌 같은 매개곤충의 이목을 끌고 유혹하기 위해 잎이 있을 자리까지 모두 꽃으로 채워 넣었다. 꽃 한 송이는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오랜 투쟁과 진화의 산물이다. 인류의 조상이 편안한 고향을 떠나 자신과의 처절한 투쟁 끝에 찬란한 유럽문명을 꽃피웠듯, 봄꽃의 아름다움은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지금도 얼마나 혹독하게 싸우고 있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봄꽃은 이를테면 약한 자들의 투쟁이자 혁명이다. 봄이 온다. 봄꽃이 온다.

글쓴이

조영학 출판번역가

조영학 출판 번역가는 텃밭을 가꾸고 야생화를 찾아 이 산 저 산을 헤매는 일을 좋아하며, 20년 가까이 아내를 위해 밥상을 차리고 있다. 저서로는 <천마산에 꽃이 있다>, <여백을 번역하라>, <상 차리는 남자? 상남자!>(공저), <살아있는 동안 꼭 봐야 할 우리 꽃 100>(공저) 등이 있고, 번역서로 <나는 전설이다>, <스티븐 킹 단편집> 등 90여 편이 있다. 현재 서울신문, 한국일보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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