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혀있는 땅 걸산리

[조영학의 ‘내 이름은 붥덱’] 경기도 동두천내 최후의 오지마을 1951년 미군 주둔후 70년간 방치 “살던 사람들 내쫓고, 죽든살든 나 몰라라해”

걸산동 입구.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가 번갈아 이어진다.
걸산동 입구.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가 번갈아 이어진다.

1951년 미군 주둔하며 ‘비극’ 시작

내가 걸산리에 가고 싶다고 하자 H는 그 전에 가야 할 곳이 있다며 나를 돌려세웠다. 그가 데려간 곳은 경기도 동두천시 생연1동 못골이라는 작은 마을이다. H가 태어난 곳이자 현재 사는 곳이다. 어릴 적 H를 만나기 위해 나도 자주 들락거렸지만 수십 년만에 와보니 옛 모습은 거의 남지 않았다.

그때는 마을 한가운데 구식방앗간이 있고 그 앞에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못골이라 들었는데 지금은 예쁘게 단장한 작은 못 하나만 상징처럼 남아 있다. 기억 속 진창길도 모두 포장이 되었다. H가 이끄는 대로 못 옆을 지나니 얼마 되지 않아 산길이 나왔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약초 캐러 다니시던 길이야.” 산 언덕을 넘어가자 완전한 산골이다. 도심에서 얼마 들어오지 않았건만 이 길엔 허름한 농가 두어 채와 축사, 밭뿐이다. 길도 경운기나 겨우 다닐 정도의 비포장길이었다. 그렇게 언덕을 넘어 1킬로미터쯤 걸었을까, 갑자기 길이 뚝 끊기고 만다. 아니, 길은 있는데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미 2사단 캠프 케이시 울타리가 가로막아 진입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동두천엔 이런 곳이 더 있어. 이런 식으로 길을 막아 아예 마을 자체가 사라지기도 했지. 여기서도 시내 나가려면 산길을 거꾸로 돌아가야 하니 사람이 살 수가 없잖아. 샛길도 못 내게 하고.”

쇠목 앞의 비석. 1990년 이곳에서 우리땅 반환운동이 시작됐다.
쇠목 앞의 비석. 1990년 이곳에서 우리땅 반환운동이 시작됐다.

“우리 땅”이라는 비석, 우리 땅 아니던가?

걸산리 가는 길은 턱거리 쇠목이라는 곳에서 시작한다. 쇠목 입구에 세워둔 “우리 땅” 이라는 비석이 무척이나 비장해보였다. 여기가 우리 땅이 아니면 누구 땅이라는 말인가? 걸산리까지 임도로 7~8킬로미터(㎞), 산허리를 한참 감아 돌기에 어른 셋이 점심까지 해결하면서 꼬박 세 시간이 걸렸다. 늦여름의 산행이라 무덥고 지루했다. H 말로는 야생화도 많고 경치도 절경이라 요즘엔 MTB 길로도 종종 이용한단다. 그러고 보니 이따금 자전거들이 지나다니기는 했다.

걸산리라는 마을이름은 어릴 적에 듣기만 했지 직접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사이 벌써 45년이 훌쩍 흘러가고 말았다. 당시 그곳 아이들은 산길을 두 시간 이상씩 걸어서 등교를 했다. 그 친구들하고 친하지 못한 것도 어쩌면 그래서였겠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귀가를 서둘러야 했을테니 함께 놀 시간이 어디 있었으랴. 난 그게 어떤 의미인 줄도 모르고 “걸산리 촌놈들”이라며 놀리기까지 했건만.

내가 갑자기 걸산리 타령을 한 것도 H의 얘기 때문이었다. “걸산리는 아직도 도로가 없다. 임도로 걸어가야 하는데 어른 걸음으로도 두 시간이야. 원래 그 길도 없었어. 그런데 20년 전쯤 미군들 사격훈련으로 불이 나는 바람에 만들었다더군. 그 전엔 지게 매고 산길로만 다녔지.”

걸산리에 들어가는 임도는 두 곳이다. 두 곳 다 자동차 출입이 가능은 하지만 길이 험하고 대부분 비포장이라 일반 승용차로는 접근 자체가 어렵다. 말 그대로 임도인 것이다. 그나마 눈이 오거나 비가 오면 꼼짝달싹할 수가 없다. 걸산리, 지금은 걸산동이라고 부른다. 경기도 최후의 오지마을, 육지의 섬마을로 알려진 곳이다.

1951년 미군이 보산리 인근에 주둔하기로 하면서 정부는 동두천 땅 42%, 1415만 제곱미터(㎡)를 강제로 징발했다. 그때 쫓겨난 사람들이 생연동(리), 지행리, 턱거리 그리고 이곳 걸산리 산골짜기까지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걸산리 사람들에겐 그때부터 더 큰 비극이 시작됐다.

50원에 땅 뺏긴 후, 삶의 터진 또 뺏겨

미군부대를 만들면서 마을의 남쪽 입구는 미군부대, 동북쪽은 소요산 줄기에 가로막혀 오도가도 못하게 된 것이다. 20년쯤 후 미군부대 패스가 일부 나오기는 했지만 그 수도 적고 제약은 많았거니와 훈련이나 비상경계가 떨어지면 그마저 끊겨 세 시간 산길을 돌아가야 했다. 1992년 미군은 아예 그 산길마저 철조망으로 막아버렸다.

우리는 걸산리에 들어가 친구 동생 L씨와 그의 어머니를 만나 얘기를 들었다. 어머니는 그 당시부터 그곳에 사신 분이다. “처음에는 미군들도 이쪽으로 오갔어. 그땐, 여기 클럽 홀도 수십 개였고 양색시도 많이 드나들었지. 그때는 살 만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후문을 닫아버린 거야. 그러니 오도가도 못하게 된 거야. 억지로 터전을 만들어놓고 그 터전을 다시 폐허로 만들었으니 말이야.”

“어머니. 그 후엔 어떻게 사셨어요? 생계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
“화전을 쳐먹었지. 동네 사람들이 갑자기 다 화전민이 된 거야. 살만해서 살았나? 죽지 못해 살았지.”

무려 70여 년, 이곳 사람들은 평당 50원, 70원에 고향 땅을 빼앗긴 후(그 돈도 공무원들의 농간으로 대부분 빼앗기고 말았단다) 이곳에 들어와 그 기나긴 세월을 갇혀 살았다. 정부와 미군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기만 했을 뿐 그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불법점유라며 지금도 매년 몇십만 원씩 벌금을 떼어가기도 한단다.

그건 고인이 된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평안도 실향민인 아버지도 보산리에서 크게 양복점을 하다가 미군부대가 들어서면서 쫓겨났다. 그후 생연동에 작은 가게를 열고 새 출발을 기획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취직자리를 구하기 위해 청계천으로 떠나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가족도 가난의 굴레에 갇히고 말았다. 아버지는 전쟁으로 생활터전을 두 번이나 빼앗기고도 오히려 당신 탓만 했다. 그래도 나라를 해방하러 온 사람들이 아니냐며.

걸산리는 아름답고 한적한 마을이다. 산기슭 여기저기 작은 길이 나 있고 그 주변으로 5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지금은 빈집도 드문드문 보이고 새로 짓는 집도 몇 곳이 있다. 상점, 식당, 병원, 약국, 학교 같은 편의 시절은 어디에도 없었다.

“와, 70년. 고향을 빼앗기고 감옥처럼 갇혀 지낸 세월이잖아요. 보상도 없이 다들 화병이라도 났겠어요.”
“사실 미군보다 우리나라 정부가 더 원망스럽습니다. 걸산동이야말로 최대 피해자이잖아요. 그것도 나라를 위해서 말이에요. 매향리, 영평 같은 곳은 사격장 때문에라도 보상을 해준다는데 이곳 걸산동은 아예 보이지 않는가 봐요. 사방이 막혀 있지만 여기도 분명 대한민국 땅이고 국민입니다.” L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뱉는다.

마을회관 게시판. '아름다운 걸산리에 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마을회관 게시판. ‘아름다운 걸산리에 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오다가 보니까 새로 집을 짓는 곳이 몇 군데 되던데 새로 들어온 분들인가요?”
“사실 이사 들어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죠. 여기가 지금 52세대인데 그건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에요. 그동안 20퍼센트, 기껏 10여 가구가 외지인이라는 얘기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떠나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거든요. 그래서 늘 50가구 정도인 겁니다.”
“떠났다가 돌아오는 분이 없나요?”
“내가 아는 한 아직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긴 감옥이에요. 왜 돌아오겠어요?”
“마을 회관 게시판에는 ‘육지 속 섬마을서 힐링, 걸산동으로 오세요’라는 신문광고가 붙어 있던데, 아닌가요?”
“말 그대로 홍보죠. 이따금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은 있지만 솔직히 반갑지 않습니다. 다들 멋을 찾아서 오잖아요. 마치 아무 근심도 없는 고장인 양 말이에요. 여긴 멋이 아니라 한이 많은 곳입니다. 내가 알리고 싶은 건 한이에요.”

“이 땅에 국민이 살고 있음을 정부가 알아야”

L은 어떻게든 공론화가 되어 이 땅에도 국민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정부가 알았으면 좋겠다며 마지막 당부를 했다.

미군부대 안으로 개천이 흐른다. 처음에는 밖에 있었지만 나중에 미군기지를 넓히면서 포함이 되었다.
미군부대 안으로 개천이 흐른다. 처음에는 밖에 있었지만 나중에 미군기지를 넓히면서 포함이 되었다.

돌아올 때는 H가 미군부대 담장 옆을 지나는 산길로 인도했다. 예전에 미군이 럭비장 주변에 울타리를 치는 바람에 산길이 끊겼다는데 어느샌가 몰래 도둑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미군부대 안으로 꽤 넓은 개천이 흐른다. 아주 아주 옛날, 보산리 아이들이 수영도 하고 피라미도 잡았을 개울, 지금은 우리 땅이 아니라 미국 땅이 되어 있었다.

“점령군이 따로 있나? 원래 살던 사람들 힘으로 내쫓고 살든 죽든 나 몰라라 하면 그게 점령군이지. 살길을 막았으면 샛길이라도 터줘야 할 것 아냐? 무조건 치고 들어오면 다야? 해방군 같은 소리 하네. 미군이나 정부나 다 똑같아.” H는 점령군이 어디 얼굴에 점령군이라고 쓰고 들어오냐며 씩씩거린다.

돌아와 보니, 쇠목 입구 비석의 “우 리 땅”이라는 세 글자가 더욱 섧기만 하다.

글쓴이

조영학 출판번역가

조영학 출판 번역가는 텃밭을 가꾸고 야생화를 찾아 이 산 저 산을 헤매는 일을 좋아하며, 20년 가까이 아내를 위해 밥상을 차리고 있다. 저서로는 <천마산에 꽃이 있다>, <여백을 번역하라>, <상 차리는 남자? 상남자!>(공저), <살아있는 동안 꼭 봐야 할 우리 꽃 100>(공저) 등이 있고, 번역서로 <나는 전설이다>, <스티븐 킹 단편집> 등 90여 편이 있다. 서울신문에 <번역과 반역>으로 정기칼럼을 연재했으며, 지금은 한국일보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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