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마을의 가을걷이...곧 김장하네!

[조영학의 ‘내 이름은 붥덱’] 수확철 맞아 비 오면, 기온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 게을렀다간 낭패...올해도 ‘자연은 넉넉한 인심’

좀비농장 간판. 내가 자신의 별명을 따서 장난스럽게 지은 이름이다. 사진제공=조영학
좀비농장 간판. 내가 자신의 별명을 따서 장난스럽게 지은 이름이다. 사진제공=조영학

[조영학 번역가] 가을은 노란색이다. 풀도 나무도 곡식도 모두 노랗다. 이슬이 서리로 변하기 시작한다는 한로(寒露)가 지나자 논의 벼도 줄기가 노랗게 물들고 낱알은 고개를 숙였다. 마음 바쁜 논은 벌써 추수를 마치고 여기저기 하얀 ‘곤포 사일리지’가 나뒹군다. 예전에는 몰라서 공룡 알, 마시멜로라 불렀는데 저런 식으로 발효해 가축사료로 쓴다고 들었다.

가을걷이를 앞둔 논. 이맘때 농촌은 온통 노란색이다. 사진제공=조영학
가을걷이를 앞둔 논. 이맘때 농촌은 온통 노란색이다. 사진제공=조영학

추수철이라지만 탈곡기 소리는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요즘은 땅주인이 직접 벼농사를 짓는 경우가 드물다. 내 텃밭이 있는 이곳 경기도 가평만 해도, 전문농사꾼들이 트랙터를 몰고 다니며 대신 농사를 짓고 그 대가로 일정량의 쌀을 공물처럼 바친다. 현대적 의미의 소작농인 셈이다. 한철을 맞은 노란 메뚜기들이 논길 여기저기 펄떡펄떡 뛰어다닌다.

백로, 추분, 한로, 상강…예전 같으면 그냥 듣고 넘어갈 단어들이건만 어느 해부터인가 가을걷이 때가 되면 부지런히 절기를 챙기게 된다. 들깨를 조금 일찍 베면 영글지 않고 조금 늦게 베면 깨가 다 터지고 만다. 고구마도 일찍 캐면 맛이 덜하고 늦게 캐면 섬유질이 생기고 저장성이 떨어진다. 농사꾼이 달력과 일기예보를 마음에 품고 산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요즘은 내가 그렇다.

내가 지은 농막의 모습. 경사지에 국화를 심었는데 가을이면 그럴 듯해진다. 사진제공=조영학
내가 지은 농막의 모습. 경사지에 국화를 심었는데 가을이면 그럴 듯해진다. 사진제공=조영학

들깨를 털어 늘어놓고는 비가 오면 어쩌지 걱정이고, 갑자기 기온이 떨어진다니 이번엔 김장무가 얼까 불안하다. 배추는 영하 8도에도 견딘다지만 무는 영하 1~2도만 되어도 얼어서 모두 버려야 한다. 고추는 더 심하다. 원래 열대식물이라 더운 지방에서는 나무처럼 자란다는데 이곳에서는 서리 한 번에 폭탄이라도 맞은 듯 주저앉아 버린다.

가을에 거두어야 하는 수확이 농작물만은 아니다. 한로 즈음이면 들판에 냉이, 달래, 전호, 망초, 씀바귀들이 새로 싹을 내밀기 시작한다. 땅은 인심이 좋다. 3월부터 냉이, 달래, 다래 순, 두릅 순, 엄나무 순 등으로 본격적으로 농작물이 나오기 전, 한해의 입맛을 돋우더니, 농사가 막바지에 이르러 먹거리가 궁해지니 다시 이렇게 넉넉한 품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을 냉이, 달래도 봄 만큼 맛과 향이 뛰어나다는 건 먹어본 사람만이 안다. 이때 거둔 냉이는 살짝 데쳐서 냉동하면 겨우내 향기로운 된장국, 된장무침을 즐길 수 있다. 서울사람들이 땅땅거리며 산다지만 땅은 시골에 내려와서야 비로소 본분을 다한다. 키우고 살찌우고 베푸는 것, 그거야말로 땅이 할 일이 아니겠는가.

올해는 배추가 잘자랐다. 11월 중순에 이 배추로 농장에서 김장을 한다. 사진제공=조영학
올해는 배추가 잘자랐다. 11월 중순에 이 배추로 농장에서 김장을 한다. 사진제공=조영학

가을걷이라 했지만 거두는 것만으로 일이 끝나지는 않는다. 냉이, 달래만 해도 그렇다. 시장에서야 대부분 어느 정도 씻고 다듬어 상품으로 내놓지만, 노지 나물은 하나하나 오물을 벗겨내고 몇 번을 다듬고 씻어야 간신히 식재료로 이용할 수 있다. 텃밭의 가을걷이 대부분이 그렇다. 들깨는 베어낸 다음 7~10일을 말리고 깨를 털어낸 다음에도 이물질을 날리고 씻고 말리기를 거듭해야 방앗간에 가져가 들기름을 짜낼 수 있다.

가을걷이한 고추도 정리 작업이 만만치 않다. 고추는 빨간고추, 청양고추, 풋고추로 구분해 딴 다음 깨끗하게 씻은 뒤, 빨간고추는 말려 고춧가루를 만들고, 청양고추와 풋고추는 소금에 절여 삭힌고추를 만들거나 간장물을 끓여 장아찌로 만들어야 한다. 다행히 올해는 고추농사가 제법이다. 그간 따서 말린 고춧가루가 8㎏이 나왔다. 지난해만 해도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죄다 탄저병에 걸려 못 쓰게 되었건만.

“텃밭 농사는 재미있는데 수확 이후가 더 문제야. 일이, 일이 끝도 없네.” 점심식사를 마친 후 아내와 국화차를 마시며 내가 밑도 끝도 없이 투덜거렸다. 사실이 그렇다. 조금만 게으르면 애써 키운 작물들이 냉장고에서 잠을 자다 썩어나가고 만다. 그래서 당장 쓰지 못할 수확물은 데쳐서 말리거나 냉동실에 저장해둔다. 농사는 뒷처리가 70%라던가. 처리 무서워 농사 못 짓는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서울사람들은 속도 모르고 소확행이니 뭐니 하며 부러워 하지만 내게는 그저 일상일 뿐이다.

식사 때가 되면 식사준비를 하듯, 주말이 되면 어떻게든 하루를 비워 이곳으로 내려온다. 텃밭이 반려동물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주인의 관심이 끊기면 반려동물이 야생으로 돌아가듯, 이곳 역시 손길, 발길이 끊기면 금세 야생식물들이 점령하고 말 것이다. 반려동물과 다르다면, 텃밭은 돌보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보답해준다는 점이겠다. 다시 말하지만 자연은 인심이 좋다.

마늘은 월동식물이다. 지금 심으면 겨울을 나고 내년 6월에 수확이 가능하다. 사진제공=조영학
마늘은 월동식물이다. 지금 심으면 겨울을 나고 내년 6월에 수확이 가능하다. 사진제공=조영학

가을걷이가 끝나면 겨울준비에 들어간다. 오후에는 마늘밭을 마련해 멀칭(폴리에틸렌 같은 필름으로 땅의 표면을 덮어 주는 것)을 하고 씨마늘을 심어야 한다. 마늘은 그렇게 겨울을 나고 내년 6월에 수확을 하게 된다. 양파도 비슷하지만 추운 곳이어서인지 매년 실패만 거듭하고 있다.

11월 중순이면 배추, 무, 쪽파, 대파, 갓 등 김장거리를 수확해,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서 곧바로 김장을 한다. 그러면 3월 중순 감자 심기부터 시작한 한해의 농사가 모두 끝나고, 이곳은 내년 2월 중순경 다시 문을 열 때까지 동면에 들어간다.

나는 차를 마시며 텃밭을 내려다보았다. 올해는 감자, 고추, 배추가 풍년이고, 호박, 양배추, 고구마는 망했으며, 그 밖의 작물들은 그저 그런 수준이다. 어차피 자연이 주는 만큼만 가져가자고 시작한 일, 이 정도면 선방이다 싶다.

좀비 농장, 필자의 작은 농장 이름이다. 500평의 맹지에 농막을 짓고 텃밭을 만들고 과수를 몇 그루 심었다. 텃밭을 시작한 지 10년, 이곳에 터를 잡은 지도 7년이 저물어간다. 문득 10년째 지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텃밭을 지켜온 내가 장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동안 얼마나 자연과 가까워졌을까?

글쓴이

조영학 출판번역가

조영학 출판 번역가는 텃밭을 가꾸고 야생화를 찾아 이 산 저 산을 헤매는 일을 좋아하며, 20년 가까이 아내를 위해 밥상을 차리고 있다. 저서로는 <천마산에 꽃이 있다>, <여백을 번역하라>, <상 차리는 남자? 상남자!>(공저), <살아있는 동안 꼭 봐야 할 우리 꽃 100>(공저) 등이 있고, 번역서로 <나는 전설이다>, <스티븐 킹 단편집> 등 90여 편이 있다. 현재 서울신문, 한국일보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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