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 사회...매뉴얼이 목적일 순 없다

[정신의학자 강웅구의 ‘마음의 길’] ‘법률’이란 매뉴얼, 뭐든 해결할까? 매뉴얼은 확일화...창조성과는 멀어 익히고 떠나야할 매뉴얼, 집착 안해야 “진정한 가르침은 매뉴얼로 할 수 없다”

넷플릭스의 '흑백요리사'에 등장한 최강 셰프들.
넷플릭스의 '흑백요리사'에 등장한 최강 셰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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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비하적으로 “주먹구구”라는 말이 쓰인다. 세심히 계획해서 해야 될 일을 어림잡아서 대충 하는 태도를 말한다. 우리가 선진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이런 원시적인 태도를 보다 합리적인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배워왔다. 우리 사회는 이제 선진화되었고, 주먹구구는 다양한 매뉴얼들로 대체되었다. 매뉴얼이 정말 잘 되어있고 잘 지켜지는지는 둘째 치고, 매뉴얼이 지배하는 세상이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매뉴얼이 하고 있다고 상정되는 것

보험을 가입하는 사람은 매뉴얼의 폐해(?)를 한번쯤 느꼈을 것이다. 보험 약관(매뉴얼)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한 대책을 담고 있다고 가정된다. 그래서 엄청나게 길고 내용도 종잡을 수 없다. 보험 판매자가 핵심적 내용만 뽑아서 알기 쉽게 설명해주면 나는 그 말을 듣고 가입한다. 이해한 것은 극히 일부지만 그것 만으로도 거래는 충분히 성립한다. 하지만 막상 보험금을 청구할 때는, 당시 설명되지 않았던 약관의 세부 내용이 나를 좌절시킬 수도 있다. 나는 이미 약관을 읽고 동의한다고 서명하였기 때문이다.

그 세부 내용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보험 가입을 안 했을 수도 있다. 나의 입장에서 보험사 매뉴얼은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매뉴얼이 있음으로 해서, 매뉴얼을 읽고 이해했다고 서명함으로 해서, 문제가 생겼을 때 결론은 분명해진다. 이것이 매뉴얼 사회의 편리한 점이다. 매뉴얼에 언급됨으로써 문제는 해결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국가 매뉴얼인 법률도, 잘 만들어만 놓으면 국가적 문제가 해결되리라 기대한다.

보험사 약관이란 매뉴얼이 아무리 두껍게 만들어져 있어도, 정작 보험금 청구를 할 땐 소비자를 외면할 때가 많다. 사진=SBS캡쳐
보험사 약관이란 매뉴얼이 아무리 두껍게 만들어져 있어도, 정작 보험금 청구를 할 땐 소비자를 외면할 때가 많다. 사진=SBS캡쳐

매뉴얼이 추구하는 것은 획일화

매뉴얼은 이런 경우에 이렇게 하라는 내용을 체계적으로 기술한 체계다. 요리 레시피가 대표적이다. 소 불고기 4인분을 만드는 경우에 “소고기 무슨 부위 몇 그램“으로 시작하여 다양한 할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간혹 사용자에게 선택권을 주기도 한다. “진간장이 없으면 맛소금으로 대체 가능” 식이다. 그러나 매뉴얼은 자의적인 행동을 없애고 누가 해도 모두 똑같게 표준에 따라 작업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므로, 선택권을 주더라도 사용자의 자의성 보다는 주어진 조건아래서 선택하도록 한다. 매뉴얼의 목표는 표준화인데, 표준화는 획일화를 의미한다. 레시피에 따라 요리하면 똑 같은 맛의 음식이 만들어진다.

창조성은 표준화가 불가능하다

창조성은 표준화가 불가능하다. 기술 매뉴얼(technical manual)은 많은데 예술 매뉴얼(artistic manual)은 없는 것을 보면 분명하다. 예술 창작 도구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한 매뉴얼은 있더라도 창작 자체는 표준화가 불가능하다. 기술은 표준화-획일화를 통해 안정적으로 적용되는 것을 목표로 삼지만 예술은 그렇게 하는 분야가 아니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예술가를 대체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챗GTP는 지브리 풍의 그림을 그려준다. 그러나 이것은 예술이 아니다. “지브리 풍”의 특징에 대한 알고리듬(매뉴얼)을 장착한 시스템이 사용자의 쿼리에 대한 출력을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기술적으로 평가하면 매뉴얼을 따른 성공적 생산품이겠지만, 예술적 가치는 없다. 영화나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이 특히 깊은 모양인데, 이 분야는 이미 산업으로 자리매김한 곳, 예술 창작이 아닌 기술로서 생산을 하는 곳이다. 인공지능은 창작 공장에서 생산에 동원되는 자동화 기계다.

예술가의 창조성은 삶과 세계에 대한 체험이 무르익다가 어느 순간 ‘아하(Eureka)!’의 통찰을 얻음으로써 탄생하는(創發, emerged) 것이지 매뉴얼을 적용함으로써 제조되는(生産, manufactured) 것이 아니다.

매뉴얼은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없다.

세상은 정보로 가득 차 있다. 정보는 우리가 움직이는 환경, 또는 맥락(context)이 된다. 이 맥락 안에서 우리는 특정 내용(content)의 과제를 해결한다. 매뉴얼이 담을 수 있는 것은 내용에 국한된다. 맥락은 수치화/문서화하기 어려운 미묘한 정보로 구성되어 있고 범위가 매우 넓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화상담원의 매뉴얼에 “상담 중 갑자기 설사가 나려 해서 화장실이 급할 때” 어떻게 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지는 않을 것이다.

살다 보면 한번쯤은 닥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이런 내용들을 모두 담는 완벽한 매뉴얼은 있을 수 없다. 보험 약관은 다 읽기 불가능할 정도로 매우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분명한 부분이 있어서 보험사와 고객 간에 다툼이 벌어진다. 아무리 상세한 법률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소송이 넘쳐나고 판사들을 과로하게 만든다.

매뉴얼의 한계: 정신의학에서의 예

정신의학계에서도 다양한 매뉴얼이 통용된다. 병을 진단하는데 사용되는 매뉴얼은 세계 표준적인 것이다. 특정 질병의 심각도를 측정하는 매뉴얼들도 있다. 그 질병의 어떤 상태에서는 어떤 약물이나 치료법을 사용하라는 매뉴얼들도 있다. 매뉴얼들은 객관적이고 근거에 기반한(evidence-based) 진료를 목표로 만들어진 것이다. 많은 전문가와 빅데이터와 큰 비용을 동원해서 훌륭한 매뉴얼들이 개발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매뉴얼에 의존해서 임상 진료를 하는 정신과의사는 별로 없을 것이다.

오래 전 필자는 “선진국”의 젊은 의사를 한 사람 만났는데, 그는 자기들은 우울증 환자 한 사람을 진료할 때마다 항상 우울증 심각도에 대한 척도(매뉴얼) 평가를 한다면서 자랑스러워했다. 그 때 필자는 “점수를 매기는 것이 환자를 이해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필자는 환자의 표정, 목소리 크기와 음조, 몸짓의 크기와 빈도 등으로 환자가 얼마나 우울한지를 비언어적으로 파악하는데, 우울증 척도는 의사-환자간 질문과 대답에 의거할 뿐 이런 미묘한 것을 담지 못한다. 미묘한 것들은 수치화 할 수 없는, “객관적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요사이는 우리나라의 건강보험도 우울증 진료시 객관적 척도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음의 고통을 매뉴얼에 의거해서 수치화하는 것은 혈액 검사로 염증 수치를 측정하는 것과 의미가 많이 다르지만, 매뉴얼화 하는 순간 그 차이점은 더 이상 눈에 띄지 않게 된다.

매뉴얼이 절대화되면…

매뉴얼은 최소한도의 품질을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다. 매뉴얼은 목적일 수 없다. 전문성이 부족한 사람이 매뉴얼을 절대적으로 신봉해서 전문가들을 컨트롤하려 한다면, 매뉴얼은 이점보다는 문제점이 더 커진다. 의사들은 “절대 매뉴얼” 앞에 좌절한다. 건강보험 심사평가원(심평원)의 매뉴얼에 “어떤 치료제나 시술은 어떤 병에만 적용된다”는 내용이 등재되면, 이에 부합하지 않는 진료행위는 삭감 당한다. 진료하고도 보험공단에서 진료비를 받지 못한다.

그런데 삭감 당할 것이 뻔하지만 그래도 특정 진료를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제법 있다. 예컨대 A와 비슷한 병 B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C 약물이 효과적인데 심평원 매뉴얼에는 C 약물은 A에만 사용할 수 있다고 되어있다. B를 앓는 환자를 돕기 위해 C 약물을 쓰려면 의사는 손해 볼 것을 각오하거나 어떤 편법을 동원하게 된다. 편법 와중에 의사가 범죄자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매뉴얼은 의료환경의 변화에 따라 개정되지만 현재를 즉시 반영할 수 없고, 의료계의 입장이 참조되지만 보험재정 안정성 등 의료 이외의 문제에 대한 고려도 적용된다. 이런 매뉴얼은 표준화는 이루겠지만, 도달하는 곳은 최선-최적과는 거리가 있다.

의료가 아닌 다른 분야들에도 이런 현상들은 있을 것이다. 소수의 저품질을 통제하기 위한 매뉴얼이 고품질까지 통제함으로써 전반적인 품질이 떨어지는 경우다. 더구나 형식적으로 매뉴얼은 지키지만 실제 품질은 보장되지 않는 방법이 통용된다면, 매뉴얼은 저품질에 면죄부를 주는 역할만 할 수도 있다.

산업재해가 일어났을 때 사용자측은 “안전 매뉴얼을 지켰으므로 회사는 책임을 다했다”고 주장한다. 법률에도 이런 문제점들이 나타나서, 평범한 시민들은 법률에 의해 규제 당하지만 “법꾸라지”들은 당당하게 세상을 활보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아무리 완벽한 매뉴얼이나 법률도 그 자체가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매뉴얼 적용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그 사람의 품질이 실제 결과를 결정할 것이다.

사진 출처=유튜브 가인지TV
사진 출처=유튜브 가인지TV

매뉴얼은 배우고 넘어가는 것

그래서 사람이 매뉴얼보다 중요하다. 매뉴얼이 목표로 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적당한 수준의 수행이기 때문에, 진짜 전문가라면 매뉴얼보다 더 잘한다.

가위로 쓱쓱 자르면 몇 분 안에 단정한 머리모양을 만드는 나이든 이발사의 매뉴얼은 그의 손에 녹아 들어있다. 예술가의 손이다. 모델의 헤어스타일에 맞추어 고객의 머리를 다듬는 초보 헤어디자이너는 매뉴얼을 통해 배운 기술을 집행하는 기술자이다. 초보 요리사는 레시피에 적힌 대로 저울과 타이머를 사용하고 불 세기를 조절해서 평균적 맛을 내는 음식을 만든다. 그러나 진정한 셰프는 저울도 타이머도 사용하지 않지만 먹는 이들이 감탄하는 음식을 만든다. 물론 이 초보자들도 경험을 쌓아 고수(高手)가 되면 매뉴얼을 떠날 것이다. 복잡한 세상이 매뉴얼 없이 돌아갈 수는 없지만, 매뉴얼은 익히고 나면 떠나야 할 것이지 진리인 양 집착할 것이 아니다.

중국 고전 서유기(西遊記)의 말미에, 삼장법사 일행은 각고 끝에 서천에 도착해서 원하던 불경을 얻는데 처음 얻은 것은 백지인 ‘무자진경’(無字眞經)이었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삼장 일행은 되돌아가서 유자진경으로 바꾸고서야 비로소 귀국한다. 그들은 매뉴얼을 극복하지 못하는 단계였던 것이다. 무자진경은 삼장 일행의 모험에 재미있는 에피소드의 하나로 들어간 것이겠지만, 여기 담겨있는 메시지는 “진정한 가르침은 문자(매뉴얼)로 표현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으리라.

글쓴이

강웅구 서울대 의대 교수

강웅구는 1988년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정신건강의학과 수련을 받았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뇌의 유전자 발현 이상 보다는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이라는 관점에서 정신질환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다. 대표저서로 <정신병리학 – 정신병리의 개념적 접근>(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1)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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