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에게 국가의 기술 전략을 묻는 나라
[김우재의 2밀리미터 렌즈] 중국 성공의 제1원리’를 빼놓은 중국 배우기 창구의 이력서가 말해주는 것
- 과학 강국의 문법 버니바 부시, 스티븐 추, 앙겔라 메르켈, 완강. 미국과 유럽과 중국의 과학기술 리더십은 실험실과 공장의 언어를 모국어로 쓰는 당사자들의 몫이었다. 기술을 아는 사람이 기술의 문제를 결정한다는 것, 그것이 과학 강국의 상식이다.
- 한국의 기형 한국 과기정책의 상층부는 경영학·경제학·행정학 출신이 장악해 왔다. 국가 과기정책의 두뇌라는 기관의 소속부터 경제·인문사회연구회다. 정책의 구호가 바뀌는 동안 설계자의 전공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고, 과학기술자는 정책의 주어가 아니라 관리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 가장 반중국적인 중국 배우기 딥시크 충격 이후 중국을 배우자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그 배움을 중개하는 창구는 다시 경영학과 행정학의 이력서로 채워진다. 중국 성공의 작동 원리는 버려두고 성공의 이미지만 수입하는, 한국 과기정책의 오래된 실패 공식 그대로다.
나는 하얼빈에서 초파리를 키운다. 중국에 온 지 5년이 넘었고, 그 사이 한국에서 날아오는 질문의 온도가 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연구가 되기는 하느냐’고 물었다. 딥시크 이후에는 ‘중국이 어떻게 그것을 해냈느냐’고 묻는다.
거부감이 두려움으로, 두려움이 배우자는 결심으로 바뀌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반가운 변화다. 중국의 발전을 애써 부정하는 일은 이제 우스꽝스럽고, 반도체 몇 년의 우위를 전 분야의 우월로 부풀리는 착각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음 장면이다. 중국을 배우자며 나서는 이들, 언론이 중국통이나 실무자로 호명하는 이들의 약력을 볼 때마다 나는 기시감을 느낀다. 경영학, 경제학, 행정학. 중국을 말하지만 중국의 문법은 아니고, 현장을 말하지만 현장의 주어는 빠져 있다. 이 글은 그 기시감의 정체에 관한 이야기다.
기술을 아는 권력의 문법
과학 강국에서는 누가 과학기술을 대표해 말하는가. 전후 미국 과학정책의 설계도인 ‘과학, 그 끝없는 프런티어(Science, the Endless Frontier)’를 쓴 버니바 부시(Vannevar Bush)는 MIT의 공학자였다.
오바마는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스티븐 추(Steven Chu)에게 에너지부를 맡겼고,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OSTP)은 물리학자 존 홀드런(John Holdren)이 이끌었다. 인간유전체계획을 지휘한 유전학자 프랜시스 콜린스(Francis Collins)는 12년간 미국 국립보건원(NIH)을 책임졌다.
독일은 양자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앙겔라 메르켈을 16년간 총리로 두었고, 2만 명 규모의 막스플랑크연구회 총재 자리는 언제나 현장 과학자의 몫이다. 그중 한 명인 동물행동학자 후베르트 마르클(Hubert Markl)은 막스플랑크 연구소를 개혁한 영웅이다. 요컨대 과학기술의 언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 과학기술을 대표한다. 그것이 문법이다.
중국은 이 문법의 가장 급진적인 실행자다. 장쩌민은 상하이교통대 전기과를, 후진타오는 칭화대 수리공정과를, 시진핑은 칭화대 화공과를 나왔다. 2007년 중국은 독일에서 공학 박사를 받고 아우디에서 10년을 일한 엔지니어 완강(萬鋼)을 과학기술부장에 앉혔다. 그는 공산당원도 아니었다.
기술 앞에서는 당적마저 양보하는 유연함이 중국엔 있다. 완강이 11년의 재임 동안 밀어붙인 전기차 전략의 열매를 지금 세계가 목격하고 있다. 2021년 말 교체된 18개 성 당서기 가운데 15명이 이공계 출신이고, 그중 13명이 석·박사 학위를 가진 기술관료였다는 집계도 있었다.
‘이과를 무겁게, 문과를 가볍게 여긴다’는 중리경문(重理輕文)의 전통은 기업에서도 이어진다. 딥시크의 창업자는 직접 모델을 만들던 엔지니어 출신이고, 화웨이의 창업자는 인민해방군의 엔지니어였다.
즉, 국가든 기업이든 결정하는 사람이 ‘기술’을 안다. 딥시크 충격의 진짜 내용은 모델의 성능이 아니라, 그 성능을 가능하게 한 인적 구조다.

최형섭의 나라에서 사례집의 나라로
한국이 처음부터 지금 같았던 것은 아니다.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설계한 초대 소장 최형섭은 금속공학자였다.
그는 연구소를 짓고 예산을 따내고 해외의 한국 과학자들을 직접 불러모았으며, 7년 6개월을 재임한 역대 최장수 과학기술처 장관이 되었다. 대통령은 그의 말을 들었고, 그 연구소에서 길러진 사람들이 철강과 전자 산업의 기초를 놓았다. 기술을 아는 사람이 설계한 제도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은 어떤가. 국가 과기정책의 두뇌를 자처하는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은 소속부터 경제·인문사회연구회이고, 역대 원장의 약력은 행정학·경영학·경제학 전공이 대다수다.
국가 연구개발 예산의 기획과 평가를 맡는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장관 자리는 정치인과 관료가 순환하는 보직이 되었고, 재임 기간은 정책의 호흡보다 짧다.
그 사이 정책의 이름만 화려하게 바뀌었다. 녹색성장, 창조경제, 4차 산업혁명, 디지털 뉴딜, 그리고 이제는 AI다. 유행어를 갈아 끼우는 동안 바뀌지 않은 것은 설계자의 전공이다. 실험실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원장, 현장을 견학으로만 아는 연구위원, 해외 보고서를 오려 붙이는 기획관, 이런 사람들이 근사해 보이는 외국 사례를 수입해 자리를 차지하고, 자기네 상상에 따라 과학기술의 미래를 설계해 왔다.
독일 프라운호퍼연구회의 겉모양만 가져와 정부출연연구기관에 연구과제중심제도(PBS)라는 옷을 입히고, 연구자가 연구보다 과제 수주에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만든 것도 같은 방식이었다.
정책을 쓰는 사람이 실험의 실패를 알리 없고, 실패를 모르는 사람이 혁신을 설계하는 아이러니. 그리고 실패의 원인이 실패를 평가하고 다음 정책을 쓴다. 지난 30년 한국 과기정책의 비극은 이 세 문장으로 요약된다.
이 구조의 눈에 과학은 거대한 자판기다. 예산이라는 동전을 넣으면 노벨상이나 혁신 기술이라는 캔음료가 떨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과학이 그런 물건이었다면 세계의 모든 부국이 과학 강국이 되었을 것이다.
정부는 연구개발 예산을 한 해 만에 두 자릿수 비율로 깎았다가 여론이 나빠지자 되돌리는 곡예까지 보여주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다가 음료가 늦게 나온다고 발로 찬 셈이다. 한 해 30조 원 안팎의 국가 연구개발 예산이 이 구조 위에서 배분된다. 예산을 짜는 사람도, 평가지표를 만드는 사람도, 그 지표로 현장을 훈육하는 사람도 과학기술의 실패를 몸으로 겪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연구는 관리의 대상이 되고, 과학자는 엑셀 시트의 행으로 전락한다.

‘가장 반중국적인’ 중국 배우기
딥시크 이후 한국의 담론은 분명 달라졌다. 중국산을 비웃던 언론이 중국의 혁신을 배우자고 말하고, 정부와 기업의 시찰단이 상하이와 선전으로 향한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배우자는 결심과 배우는 방식 사이에 균열이 있다. 중국 과학기술 굴기의 제1원리는 ‘기술을 아는 사람이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 원리를 배우자는 나라가, 배움을 중개하는 창구의 인선에서부터 그 원리를 위반한다.
중국의 산업과 정책을 해설하는 자리, 협력을 중개하는 자리, 중국의 성취를 한국어로 통역하는 자리의 이력서는 여전히 경영학과 경제학과 행정학으로 채워진다. 벤치마크 대상의 작동 원리는 거부하면서 성공의 이미지만 수입하는 것. 나는 이것을 ‘가장 반중국적인’ 중국 배우기라 부른다. 중국 배우기가 아니라 ‘중국 소비하기’다.
실무라는 말도 다시 정의해야 한다. 전시관을 열고 시찰을 안내하고 개설서를 쓰는 일도 물론 실무다. 그러나 과학기술 협력의 실무 핵심은 ‘기술 판단’이다. 어느 기술 경로가 막다른 길인지, 상대의 강점이 어디까지 실물이고 어디부터 선전인지, 전력망과 데이터센터와 반도체와 배터리가 하나의 생태계로 맞물리는지를 현장의 언어로 판별하는 일이다.
가설을 세우고 실패해본 과학자, 팹에서 수율을 올려본 엔지니어, 논문과 제품 사이의 죽음의 계곡을 건너본 개발자만이 할 수 있는 판단이다. 그 판별의 언어를 모국어로 쓰지 못하는 창구는 아무리 성실해도 통역 이상이 될 수 없다. 통역에게 국가의 기술 전략을 묻는 나라는 없다.
거부감과 두려움의 정체도 여기서 다시 읽힌다. 기술을 아는 눈에 중국은 분석의 대상이다. 강점과 약점이 보이고, 따라잡을 경로와 포기할 전선이 보인다. 기술을 모르는 눈에 중국은 기분의 대상이다. 어제는 어설퍼 보여서 웃었고, 오늘은 거대해 보여서 무섭다.
한국의 대중국 인식이 거부감과 두려움 사이를 오가는 것은 국민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인식을 중개해온 창구의 문제다. 그리고 중국 과기계의 리더들은 바보가 아니다. 몇 마디만 나누어 보아도 상대가 기술의 언어를 직접 말하는 사람인지, 사례집의 문장을 외운 사람인지 알아챈다.
명함은 대화를 시작하게 만들지만, 전문성만이 대화를 계속하게 만든다. 상대가 페어(peer)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 대화는 브리핑과 의전으로 바뀐다. 그 순간 한국은 배우는 나라가 아니라 관리되는 시장이 된다.

창구의 이력서를 바꿔라
나는 하얼빈에서 매일 이 나라의 일상을 본다. 내 연구실의 대학원생들은 아침 여덟 시면 실험대 앞에 앉아 있고, 이 대학 출신의 엔지니어들은 우주선을 쏘아 올리며, 바로 그 이유로 이 대학의 이름은 미국의 제재 명단에 올라 있다.
이 도시에서 내가 매일 확인하는 것은 단순한 사실 하나다. 이 나라에서는 기술을 아는 사람이 기술의 문제를 결정한다는 것. 그 상식이 부럽다면, 배워야 할 것은 전시관의 규모나 시찰의 일정표가 아니라 바로 그 상식이다.
경영학의 지식이 쓸모없다는 말이 아니다. 산업의 지도를 읽고 시장을 중개하는 데 그 지식은 요긴하다. 문제는 위계다.
보조 지식이 주인의 자리를 차지할 때 정책은 다시 상상이 되고, 상상으로 쓴 정책이 현장을 규율할 때 보통과학자는 다시 엑셀표의 숫자로 전락한다. 한국이 먼저 인정해야 할 상대는 중국이 아니라 한국의 과학기술자다. 실험실과 팹과 코드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을 정책의 주어로 세우는 것, 중국의 과기 리더와 페어로 마주 앉을 사람을 창구에 앉히는 것. 중국 배우기는 거기서 시작된다.
2밀리미터의 초파리는 10만 개가 넘는 신경세포로 슈퍼컴퓨터가 겨우 흉내 내는 일을 해낸다. 초파리가 제 몸의 언어로 세계를 읽기 때문이다. 정책도 다르지 않다.
과학기술의 언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 정책을 읽고 쓸 때, 비로소 배움은 시작된다. 창구의 이력서를 바꾸지 못하는 중국 배우기는 배우기가 아니라, 실패의 원인을 성공의 입구에 세워두는 자기기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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