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트(wit), 부고 없이 떠난 ‘보통 과학자’

[김우재의 2밀리미터 렌즈]

  • 보통 과학자의 죽음 화려한 부고 하나 없이 세상을 떠난 초파리 유전학자 기예르모 마르케스는 자신의 세 제자를 평생의 가장 큰 성공으로 여겼다.
  • wit 유전자의 발견 ‘부질없는 소망’이라는 뜻의 ‘wit’ 유전자를 연구하며 시냅스 역행성 신호의 논리를 열었으나, 제도적 보상 체계 속에서 평탄치 않은 경력을 보냈다.
  • 침묵과 연구의 가치 비록 거대한 명예를 얻지 못하고 오랜 침묵을 겪었으나, 그가 열어둔 연구의 문은 오늘날 과학의 공유지가 되어 후대 연구자들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 이름 없는 손들의 유산 화려한 지표 대신 자신만의 답을 찾은 마르케스의 삶은 제도 밖의 수많은 ‘보통 과학자’들이 지식을 일구어낸 진정한 위엄을 보여준다.

며칠 전, 한 초파리 유전학자가 세상을 떠났다. 부고는 어디에도 실리지 않았다. 네이쳐(Nature)誌도, 사이언스(Science)誌도, 그가 평생을 바친 초파리 학회의 소식지조차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고인이 된 기예르모 메르케스 교수.
고인이 된 기예르모 메르케스 교수.

그의 이름은 기예르모 마르케스(Guillermo Marqués).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다. 그의 부재를 알게 된 것조차 그의 박사 제자였던 한 한국인 과학자가 페이스북에 남긴 짧은 글을 통해서였다. 스승의 아내는 부고 대신 이런 말을 전했다고 한다.

‘남편은 자신이 길러낸 세 명의 박사 제자를 평생에 걸친 가장 성공적인 과학적 성취로 여겼고, 그 세 사람이 여전히 모두 기업에서, 대학에서 과학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기뻐했노라’고.

나는 이 문장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그리고 내가 『보통과학자』라는 책에서 끝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결국 이런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음을 다시 깨달았다.

과학의 역사는 대개 거대한 이름들의 연대기로 쓰이지만, 그 이름들 사이의 광대한 여백을 채우는 것은 마르케스 같은 이들이다. 2㎜ 남짓한 초파리 유충의 몸속을 들여다보며 평생을 건 채, 정작 자신의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은 손들 말이다.

‘소망’을 이름으로 새기다

마르케스가 남긴 실질적인 과학적 유산은 초파리의 유전자 하나다. 이름은 wishful thinking, 줄여서 wit (위트). 우리말로 옮기면 ‘부질없는 소망’쯤 될 것이다. 유전자에 왜 이런 자조 섞인 이름이 붙었을까.

2000년대 초, 그가 몸담았던 마이클 오코너(Michael O’Connor)의 실험실은 애초에 신경계를 연구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찾던 것은 BMP(뼈 형성 단백질) 수용체 계열의 새로운 유전자였다.

BMP 신호가 신경 안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당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 찾은 수용체 유전자 하나가 유독 신경계에서 강하게 발현되고 있었다. 신경계에서 무언가 새로운 기능을 하리라는 막연한 기대.

하지만 돌연변이를 만들어도 초파리는 그저 번데기 속에서 죽어버릴 뿐, 이렇다 할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극적인 표현형을 바라는 것은 한낱 ‘부질없는 소망’일 뿐이라는 자조. 그렇게 이름이 정해졌다.

여기서 멈췄다면 논문도, 교수직도 없었을 것이다. 마르케스는 멈추지 않았다. 죽기 직전의 파리를 번데기에서 끄집어내고, 유충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관찰을 되풀이했다. 번데기를 억지로 열어보니 파리는 그 안에서 분명 움직이고 있었지만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꺼내 놓으면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신경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였다.

동료들과 함께 그는 wit 돌연변이 초파리의 신경근접합부(NMJ)에서 시냅스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신호를 내보내는 ‘부톤(bouton)’의 수가 줄어 있으며, 신경전달물질의 방출마저 무너져 있음을 밝혀냈다.

wit은 근육에서 신경으로 거꾸로 전해지는 신호- 이른바 역행성 신호(retrograde signaling)-를 받는 수용체였다. 근육이 자라면 그만큼 시냅스도 자라야 한다. 그 둘의 크기와 세기를 맞추는 은밀한 대화의 한쪽 귀가 바로 wit이었던 것이다.

이 그림은 뒤이어 더 온전한 형태를 갖췄다. 근육에서 분비된 Gbb라는 BMP 계열 리간드가 신경 말단의 Wit 수용체에, 그리고 Tkv·Sax 같은 1형 수용체와 짝을 이뤄 결합하면, 그 신호는 Mad라는 전사인자를 인산화해 축삭을 거슬러 신경세포의 핵까지 올라간다.

근육에서 켜진 스위치 하나가 세포체로 되짚어 올라가 시냅스를 키우는 유전자들을 깨우는 셈이다. 마르케스가 열어젖힌 것은 단지 유전자 하나가 아니라, 시냅스가 스스로의 크기를 감지하고 조율하는 하나의 논리였다.

스무 해의 침묵이 말해주는 것

흥미롭게도 같은 발견이 두 곳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오코너 실험실이 BMP 수용체를 뒤쫓다 이 유전자에 다다랐다면, 코리 굿맨(Corey Goodman)의 실험실은 아예 시냅스 성장에 이상을 보이는 돌연변이를 직접 찾아 나서 같은 유전자에 도착했다.

서로 다른 길에서 출발한 두 팀의 논문은 2002년 2월, 같은 호의 Neuron에 나란히 실렸다1,2. 굿맨은 이 발견을 “이 분야의 주요한 돌파구”라 불렀다. 중요한 발견이 여러 곳에서 우연처럼 동시에 터지는 일은 과학사에서 드물지 않다. 그만큼 무르익은 문제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유망했던 분야는 그 뒤로 스무 해가 넘도록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이 침묵을 두고 마르케스의 능력을 탓하기는 어렵다. 여러 실험실이 독립적으로 확인했고 숱한 연구자가 뛰어들었던 문제가 오래 정체되었다는 것은, 그 문제가 원래 그만큼 어려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아무도 넘지 못한 벽을 혼자 부숴버릴 초인적 재능까지 보여주지는 못했다. 세상 대부분의 과학자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바로 이 대목이 내가 ‘보통 과학자’라 부르는 존재의 자리다. 과학의 보상 체계는 벽을 홀로 부수는 소수의 초인에게만 정년보장과 상과 부고를 몰아준다.

마르케스는 2004년 퓨 바이오메디컬 스칼라(Pew Biomedical Scholar)로 선정된, 한때 촉망받던 젊은 과학자였다. 그러나 앨라배마대학교(UAB)에서 정년보장을 받지 못했고, 미네소타대학교로 돌아와 이미징 센터의 책임자로 일했으며, 예기치 못한 뇌수술과 함께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접어야 했다.

세상의 저울로 달면 ‘끝내 이루지 못한 약속’의 이야기다. 마치 그가 유전자에 새겨 넣은 그 이름처럼- wishful thinking, 부질없는 소망.

그러나 나는 그 저울 자체를 의심한다. 과학의 성공을 임팩트 팩터와 정년보장과 부고 기사의 길이로 환산하는 습관은, 정작 지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조금도 설명하지 못한다. 한 사람이 열어둔 문으로 스무 해 동안 수십 개의 실험실이 드나들었다면, 그 문을 단 사람의 이름은 어느 지표에도 잡히지 않더라도 이미 과학의 일부가 되어 있다.

마르케스가 자신의 성공을 논문 목록이 아니라 세 명의 제자로 셈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그가 이 왜곡된 저울을 일찌감치 내려놓았다는 증거처럼 읽힌다. 성공을 무엇으로 재느냐는 질문 앞에서, 그는 제도가 강요하는 답 대신 자기 자신의 답을 골랐다.

‘위트’라는 이름의 위엄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그렇게 읽지 않는다. wit이라는 이름에는 좌절만이 아니라 위트(wit)가 담겨 있다. 극적인 발견을 바랐다가 번번이 죽어버리는 번데기 앞에서, 그 실망마저 유전자의 이름으로 새겨 넣는 능청.

그것은 냉정한 보상 체계 앞에서도 끝내 품위를 잃지 않는, 보통 과학자의 방식이다.

그가 남긴 것은 부고 기사가 아니라 다른 곳에 적혀 있다. wit이라는 세 글자에, 그 발견 위에서 지금도 이어지는 시냅스 가소성과 역행성 신호 연구에,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스스로 최고의 성취라 여겼던 세 명의 제자에게.

모건과 브리지스와 드미렉으로 이어지는 초파리 유전학의 공유지(commons)는 원래 이런 이름 없는 손들이 한 세대씩 이어 붙여 만든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의 실험실에서만 지식이 자라는 것이 아니다. 정년을 얻지 못한 조교수의 실험대 위에서도, 유충의 번데기를 밤새 열어보던 누군가의 손끝에서도 지식은 자란다.

언젠가 홀연히 누군가 나타나 wit이 열어둔 문을 활짝 밀어젖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날 그 문에는 여전히 마르케스의 손자국이 남아 있을 것이다. 스무 해의 침묵은 실패가 아니라, 다음 세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문턱이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부고 없이 떠난 한 보통 과학자를 위해, 나는 이 짧은 글을 그의 부고 대신 남긴다.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무심코 가르쳐 준 단어 하나를 오래 기억하려 한다. 위트.

글쓴이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

초파리 유전학자, 김우재 중국 하얼빈공대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현재 하얼빈공대에서 초파리와 함께 꿀벌의 행동을 신경회로와 유전자 관점에서 연구한다. 본업인 연구에 매진하고 싶으나, 가끔 과학과 사회에 대한 글을 쓰는 취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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